53.
생각지 못한 답에 나는 숨을 멈췄다.
“물속에 있는 내내 깨어나지 말라는 듯이 저주의 말이 저를 붙잡았습니다. 울음 섞인 목소리가 제발 죽어 달라, 했습니다. 죽어 줬으면 좋겠다고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게…….”
“너무 오래 그 목소리를 들었더니 깨어난 뒤에도 멈추지 않아요.”
“그런…….”
“처음엔 매 순간 들렸지만 지금은 많이 나아졌습니다.”
“…….”
“그럼에도 눈을 감으면 어김없이 들려요.”
노마가 살며시 눈을 감으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눈을 감은 그 얼굴은 마치 잠을 자는 사람처럼 평온하게만 보여,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감내하고 있는 것이 저런 것인 줄은 몰랐다. 어떻게 12년 동안 죽으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는지 나로선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저주는…… 끝났어요.”
적어도 지금, 그를 향한 저주와 봉인은 모두 끝났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는 지나치게 떨렸다.
끝날 수 없는 문제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쪽으로 말주변이 없어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저주가, 저주만으로 끝나는 건 아니더군요.”
그 말에 결국 나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가 담담히 한 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내 표정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이고의 목소리가 언젠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이런 일엔 후유증이 남기 마련이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저는 그날을, 그 목소리를 완전히 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러기엔 너무 큰일이었고, 저는 세간의 평가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지나간 일은 지나갔을 뿐, 없던 것이 될 순 없다. 이 역시 내가 누구보다 잘 아는 사실이었다.
“다만, 전―.”
노마가 다시 눈을 뜨며 그의 금안이 드러났다. 촛불에 의해 노란 눈동자가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그 목소리가 아무리 절 불러도 따라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무리 제가 죽기를 바라도 저는 죽지 않을 겁니다.”
노마의 목소리는 주변을 의식하는 듯 작았지만 어느 때보다 분명하고 힘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숨을 멈추고 주먹을 쥐었다. 손끝으로 미약한 전율이 일었기 때문이다.
“전부 아이사 님 덕분입니다. 저는 죽기 싫다는 아이사 님 목소리에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아이사 님이 제게 종종 무심히 던진 말에 어리석은 저도, 살아도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난, 그렇게 대단한 말을 해 준 기억이 없는데요.”
“당신이 제게 하신 모든 말이 제게는 살아도 된다고 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는 그러면서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멋대로 감정이 울컥 차올랐다.
이거였나 보군. 당신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하고 눈이 가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나 보군.
당신에게 죽음에 쫓기고 있는 사람 특유의 불안감이 느껴져서 그랬나 보다. 당신이 나와 비슷한 감각에 쫓기고 있어서 나는 그렇게 신경이 쓰였나 보다.
막을 새 없이 표정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내 얼굴이 울상으로 일그러짐에 따라 노마의 눈썹도 점점 모로 휘었다. 그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제 이야기가 당신을 슬프게 했군요. 역시 제가 괜한 소리를 했습니다.”
젠장. 그만 말해.
어쩐지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해 나는 눈을 꾹 감아 버렸다. 미처 눈꺼풀 뒤로 넘어가지 못한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내 무릎에 얌전히 앉아 있던 앙투아네트가 놀라 달아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어금니를 꽉 물어 치미는 감정을 삼키고 다시 눈을 부릅떴다. 뿌연 시야로 난감한 얼굴을 한 노마가 보였다.
“……저는 당신이 슬픈 게 싫습니다.”
그는 나보다 더 울상인 표정으로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을 피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는 결국 눈물을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곧 탄타로스에서 막 빠져나와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오열하던 때처럼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아까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는데. 그 망할 계집애가 그러고 사라져도 분노의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렸는데.
“으헝! 이게 다! 당신, 당신 때문이야. 으허헝! 내가, 내가 걔 앞에서도 안 울었는데. 참을 수 있었는데. 결국 이게 뭐야, 으엉!”
노마는 분주하게 내 눈물을 닦으며 연신 이렇게 우시면 안 됩니다, 몸이 상하신다, 이런 말이나 했다. 그는 본인이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위로를 더럽게 못하는 듯했다.
나는 슬프고 분하고, 울면서도 쪽팔려서 그런 그에게 닥쳐요, 하고 말했다. 탄타로스 때도 느낀 것이지만, 그간 눈물을 참은 시간이 긴 탓인지 한 번 시작되면 멈출 줄을 몰랐다.
‘개같은 닉스 놈. 망할 오필리아, 이기적인 계집애. 죽이는 것도 아까운 모퍽. 조카 키워 봤자 소용없고, 에리카는 어차피 남이라 이거지. 가노는 갑자기 뭘 처먹고 그러는지 모르겠어.’
새삼 모든 게 슬프고 억울했다. 내 숨은 점점 거칠어졌고 가빠졌다. 쉴 틈 없이 쏟아지는 내 눈물을 일일이 닦아 주던 노마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이사 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노마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왔다.
“뭐, 무슨―.”
탄타로스를 빠져나와 나를 꽉 끌어안고 등을 규칙적으로 두드려 줬을 때처럼, 그가 숨이 턱 막히게 나를 안아 왔다. 그러곤 조용히 내 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등을 두드려 주는 속도에 맞춰 숨을 쉬기 위해 헐떡였다. 벌이고 뭐고 울면서 숨 쉬는 걸로 충분히 벅찼다.
너덜너덜한 정신 상태로 울어 대니 체력은 빠르게 소진됐다. 나는 곧 기절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마지막 남은 정신 한 줄을 끌어다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오늘 일은, 절대 함구해요. 내가 운 거 어디 가서, 소문내기만 해 봐. 재미없을 겁니다.”
“네, 아이사 님.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 진짜. 당신 인생도, 뭐 같아요.”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던 손이 잠시간 멈칫했지만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내, 흐엉, 인생도 뭐 같고. 굳, 이 우열을 따지자면 내가 좀 더 엉망인 것 같긴 한데, 흑! 어쨌든 당신 인생도, 거지 같아.”
“네. 그렇습니다, 아이사 님.”
그는 인사불성 수준으로 내뱉는 내 말에 꼬박꼬박 대답해 주었다.
“우린 왜 이래. 내 인생 왜 이래! 나는, 조금, 힘들어.”
“힘이 드셨군요.”
“나 죽고, 흑! 다들 행복한 게 싫어요.”
“당신은 살아 계십니다.”
“바보가 된 기분이야. 내가 선택한 모든 걸, 내가 걸어온 모든 길을 아주 부정당한 기분이 들어서, 꼭, 내가 가짜가 된―.”
그때 숨 막히게 나를 안은 팔에 힘이 풀렸다. 단단하게 나를 잡던 힘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나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갑자기 왜? 하는 허탈한 얼굴을 하고 그를 봤다. 코가 닿을 거리에 노마의 금안이 다가와 있었다.
“아이사 님.”
“딸꾹.”
오열 다음은 딸꾹질이었다. 나는 직전의 두려움과 딸꾹질의 쪽팔림 사이에서 방황하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꼴이 엉망일 게 분명한데, 노마는 그런 나를 향해 자상하게 웃어 주고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렇게 눈물을 흘리고, 말을 하고, 저와 눈을 마주쳐 주시는 걸요.”
그러면서 노마는 또다시 내 눈물을 닦아 내며 얼굴에 들러붙은 머리칼을 하나씩 떼어 주었다. 퍽 자상한 손길이라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당신이 왜 부정당하는 기분을 느끼시는지 저는 잘 알 수 없지만. 당신의 존재는 제게 이곳이 현실이란 걸 알려 줍니다. 당신의 존재로 저는 매 순간 제가 살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당신이 바로 제겐 현실인데.”
서운하다는 듯 슬프게 눈썹을 모은 노마가 다시 날 꽉 안아 주며 계속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듣기 좋은 자장가처럼 느껴져, 나는 빠르게 수마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당신의 하루가 전부 모여 지금의 당신이 있는데, 누가 당신을 부정할 수 있나요. 누구도 당신 삶을 부정할 수 없어요. 그러니 다시는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너무 속이 상합니다.”
“하지만, 제가 알던 건 반쪽짜리였는걸요.”
“……저 역시 한때 제가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부 알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합니다. 우린 우리가 보고 들은 것들로, 직접 경험한 걸로 세상을 볼 수밖에 없으니까요.”
노마는 자신이 모르는 이고를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충분히 하셨습니다. 아이사 님은 그런 분이니까요. 당신은 제가 본 사람 중 가장 열심히 사는 분입니다.”
나는 그의 가슴팍에 파묻힌 채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하십니다.”
‘충분하대. 충분한가?’
머리가 뒤죽박죽인 탓에 그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렸다. 그가 그렇다 하면 그런 건가 싶었다.
그가 규칙적으로 등을 두드려 주는 감각에 몸을 맡겼다. 그러자 딱딱하게 힘을 주었던 몸에서 힘이 풀렸다.
“혹여나 당신을 부정하는 못된 사람이 있다면 제가 혼쭐을 내 주겠습니다. 그러니, 아무런 걱정 말고 오늘은 이만 편히 주무세요.”
그래, 마침 말 잘했다.
나는 오늘 날 힘들게 한 사람들의 이름을 웅얼웅얼 되뇌다가 완전히 잠에 들었다. 볼썽사나운 딸꾹질도 어느 순간 멈춰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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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노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사가 완전히 잠에 든 모양이었다. 그녀가 잠들었다는 걸 알지만 혹시나 깰까 봐 그는 다시 수십 분을 같은 자세로 버텼다.
밖은 어느새 어두운 새벽이었다. 곧 어둠도 끝나고 해가 밝아 올 것이다.
노마는 어쩐지 아쉬움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제 가슴팍에서 잠든 그녀를 향해 속삭였다.
“아이사 님. 부디 아무 꿈도 꾸지 말고 편히 주무세요.”
그러곤 어느 때보다 신중한 몸짓으로 그녀를 시트에 내려놓았다. 보기만 해도 불편한 그녀의 드레스엔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 아쉬운 대로 그녀의 머리칼을 살살 넘겨 주고, 이불을 끌어다 덮어 주려 했다.
그때 이상한 것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불을 쥔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하얀 시트엔 아무렇게나 잘린 금발 머리칼 무더기가 흐트러져 있었다.
노마는 그제야 아이사가 잠들기 직전 웅얼거리던 것 중 하나가 ‘오필리아 망할 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렇게 우셨구나.’
그는 아이사의 눈물로 축축하게 젖은 셔츠를 내려다보다, 미동 없이 잠자는 아이사를 바라봤다.
그녀가 울던 모습이 떠오르자 다시 가슴이 죄어 와 마른세수를 했다. 볼이 축축했다. 딱히 운 기억은 없는데, 저도 모르게 운 모양이었다.
눈물이 난 건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몰랐다. 아이사는 노마가 처음 마음에 담은 사람이며, 그가 본 이들 중 가장 서럽게 우는 사람이기도 했다.
노마는 잠든 아이사 옆을 바로 떠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정말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자기만 했다. 예민한 신체 능력을 가진 노마조차 정신을 집중하고 귀를 기울여야 그녀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때 눈치 좋게 옆에 빠져 있던 앙투아네트가 노마에게 살랑살랑 다가와 얼굴을 비볐다.
“그래, 이제 그만 가야지.”
기척을 완전히 지우려면 그만 제 방으로 가야 했다. 그래야 그녀가 난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려던 노마는 다시 한번 발에 못이 박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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