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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드 엔딩 후에-52화 (52/139)

52.

또라니.

그의 물음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 몰라 볼을 더듬어 봤지만 차갑고 얼얼하기만 했다.

“안 울었는데.”

“하지만 꼭,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표정이신 걸요.”

노마가 잠시 숨을 멈추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한숨이 섞인 그 목소린 퍽 속상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의 입장에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라고 하면 탄타로스에서 닉스와 대치했을 때가 아닌가. 그가 눈을 뜨자마자 본 건 별안간 제 머리통을 붙잡고 오열하는 미역 머리 여자였다.

나는 그때를 떠올리고 미간을 세차게 구겼다.

‘글쎄, 뭐가. 난 아무렇지도 않다.’

대차게 얼굴을 찌푸린 주제에 나는 습관처럼 괜찮다고 답하려 했다. 그러나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젠장. 예상치 못한 노마의 등장으로 잠시 잊었던 우울감이 빠르게 치고 올라왔다. 이대로 있다간 그가 말한 것처럼 진짜 울어 버릴 것만 같았다.

위태로운 꼴을 외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곤죽 상태인 머리는 빠르게 이성적인 방안을 내놓지 못했다. 상황을 피하고 보자는 충동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노마를 못 본 척하기엔 한참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를 보지 못한 셈 치고 침실로 들어가기를 택했다. 맥포이 가주 인생에 몇 없는 회피였을 것이다.

충동적으로 몸을 움직였으나 그사이 몸이 얼기라도 했는지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내 의도는 몸을 돌려 발걸음을 떼는 것이었지만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다행이라면 내 손이 난간을 짚고 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꼴사납게 뒤로 넘어가는 꼴은 면할 수 있었다.

혼자서 비틀거린 정도로 끝낼 수 있었다, 이 말이다. 휘청거린 내가 다시 중심을 잡기 전에 노마가 난간을 넘어와 등허리를 낚아채지 않았다면.

내가 노마 앞에서 자주 쓰러지고 넘어지고 휘청이긴 했기로서니 이건 좀 과보호가 아닐까. 노마는 내가 그대로 엎어지기라도 할 줄 안 모양이다.

1초 만에 날아온 노마 때문에 우리는 굉장히, 이상한 그림이 되어 버렸다. 뒤로 꺾인 나의 상체와 그걸 지탱하는 그의 팔뚝, 그리고 눈 맞춤. 마치 무도회에서 열정적인 듀엣을 선보인 남녀가 마지막 동작을 끝낸 후 여운에 젖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코가 닿을 듯한 거리감에 드디어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내 허리를 낚아챈 장본인은 나보다 더 놀란 듯이 커다랗게 눈을 떴다. 누가 보면 내가 갑자기 그를 붙잡은 줄 알 것이다. 달빛 아래에서 마주친 눈동자 두 쌍이 마구 흔들렸다.

이건 명백히 그의 탓이다.

상황을 파악한 내 미간이 서서히 구겨졌다. 그에 맞춘 듯 노마의 입술이 황망하게 벌어졌다.

“……당신이 진짜이신 줄은.”

노마가 헛소리를 뱉었다. 그는 날 정말 헛것이라고 여기고 말을 건 모양이었다.

“제가, 허락도 없이 당신을 잡은 걸 용서해 주세요.”

그가 신전에 속죄를 구하는 사람처럼 멍하니 중얼거렸다.

“또한 당신의 공간에 허락 없이 발을 디딘 것을…….”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래도 제대로 고장 난 듯했다.

창백한 달빛 아래에 서 있음에도 노마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는 게 보였다. 정수리에선 김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런 그를 비웃거나 다그칠 수 없었다. 과부하가 온 건 나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나도, 그……. 결혼도 안 한 남녀가 이 밤에 침실 발코니에 함께 있는 건.”

그 이상 붉어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노마의 얼굴은 ‘침실’에서 한 단계 더 붉게 물들었다.

나는 곧 터질 것 같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쩐지 그를 괴롭히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라고 봅니다.”

“…….”

“그런데.”

어딜 남의 침실에 발을 디디냐며 곧장 그를 쫓아내기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을 이었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요.”

맹세코 사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진심으로, 그가 갑작스럽게 나를 낚아채는 바람에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하반신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게 억울해 절로 울상이 지어졌다.

다시 한번, 이건 전부 그의 탓이다.

이대로 노마를 쫓아내고 사용인들을 부르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이미 약한 꼴을 보인 김에 그에게 조금 신세를 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저 좀, 부축하시죠.”

명령이 익숙해 부탁이 낯설었다. 동시에 항시 친절한 그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역시 남녀가 유별한 ‘디아시’에겐 너무 무리한 부탁이었나 싶었다. 짧은 정적이 이어지고 묘한 긴장감에 남몰래 침을 삼킬 때였다.

“제가 당신을 모셔도 되겠습니까?”

반쯤 눈을 내리깐 노마가 무언갈 참는 사람처럼 물었다. 내 쪽팔림을 그도 느꼈는지 여전히 활활 타는 얼굴을 한 주제에 덤덤한 척하려 애쓰는 것 같았다.

“……예. 뭐.”

“맥포이 가주를 모실 기회를 얻어 영광입니다.”

노마는 그럼, 하더니 내 무릎 뒤로 신속하고 조심스럽게 팔을 걸었다. 중심축이 순식간에 뒤로 넘어갔다. 억! 하는 순간 그대로 몸이 들리며 노마 품에 안기게 되었다. 그의 탄탄한 몸을 느끼며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젠장, 이 자세는.’

수치스러운 공주님 안기는 이걸로 두 번째였다. 그땐 곧장 정신을 잃기라도 했지 맨정신으로 이런 자세를 소화하기엔 얼굴에 깔 철판이 부족했다.

‘부축해 달라 했지 누가 들어 달랬나!’

나는 그에게 당장 내려 달라고 소리칠 요량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

그러나 노마에게 내려 달라고 소리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이 사뭇 비장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긴장한 듯 미묘하게 떨리는 그의 턱 끝을 보자니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아니,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부끄러워하는데. 그냥 안 들면 되잖아.’

하지만 그런 노마와 더 말을 나눴다간 그의 떨림이 옮을 것만 같아, 나는 결국 입만 뻥긋대다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어색하게 모은 손끝만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는 사이 그가 호기롭게 걸음을 뗐다.

안타깝게도 노마는 반쯤 열린 발코니 창을 두고 곧장 1차 위기에 직면했다. 그는 발코니 창 너머, 침실을 보고 멈칫했다.

“……!”

팔뚝으로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느껴져 반사적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이내 노마가 눈을 질끈 감고 창을 통과했다.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눈을 감았다. 그의 반응 때문에 정말로 함께 나쁜 짓이라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침실에 들어선 노마는 날 어디에 내려 둬야 할지 몰라 2차 위기를 맞았다. 부끄럼을 얼마나 타는지 아직도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이 옷감 너머로 느껴졌다.

“침대에 내려 줘요.”

그의 팔에 안겨 있는 건 여러 의미로 고역이라, 나는 지체 없이 답을 알려 줬다.

그러자 노마가 이번엔 한숨처럼 날숨을 뱉었다. 그가 시험에 든 사람처럼 힘겹게 눈을 감았다. 동시에 날 안은 팔엔 딱딱하게 힘이 들어갔다.

나는 또다시 반사 작용처럼 퍼뜩 그를 올려다봤다. 이를 악물기라도 했는지 그의 턱에 힘줄이 솟은 것이 보였다.

때마침 다시 눈을 뜬 그와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부딪힌 순간 그가 습관처럼 얼굴을 붉혔다. 와중에 꿋꿋하게 시선을 피하지 않는 것이, 은근히 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들어 가는 건 전염성이 있었다. 시선을 피한 것은 결국 나였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늦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섭게 뛰는 노마의 심장 소리에 맞추듯, 내 심장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두 사람 분이 세차게 뛰니 쿵쿵쿵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드디어 노마가 나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나를 대하는 그의 동작은 불편할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나는 어색함에 내내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딴청을 피웠다.

노마가 퍼뜩 뒤를 돈 것은 그때였다. 침실에 들어오는 일 자체를 부끄러워하던 것이 무색하게, 그는 사방을 매섭게 둘러봤다.

“왜 그러세요?”

“아이사 님, 방금까지 누가 있었습니까?”

그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오필리아가 떠난 지 꽤 되었을 텐데, 그 기척을 느낀 듯했다. 노마의 경계 어린 반응을 보니 그 애가 날 찾아온 것은 아무래도 독단적인 행동인 모양이었다.

“아니요.”

나는 태연히 거짓말을 했고, 내 말을 의심할 생각도 못 하는 순진한 남자의 얼굴은 더욱 심각하게 굳었다.

하여간 이렇게 보면 세상 멀쩡했다. 나는 속으로 귀찮다는 듯이 혀를 차며 태연히 말을 돌렸다.

“그보다 당신이야말로 야밤에 왜 남의 정원은 서성거립니까? 수상하게.”

“……잠을 잘 수가 없어서 그랬습니다.”

잠자리가 불편하진 않았을 거다. 내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데. 그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눈을 못 뜨기라도 할까 봐 그럽니까?”

그건 탄타로스를 벗어날 때 나도 느낀 적 있는 공포였다. 노마가 조금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머뭇거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부끄럽게도 그런 불안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노마가 말끝을 흐렸다. 찰나의 순간 그의 표정이 무너져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피곤하실 텐데,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그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걸 보고 있자니 어쩐지 기분이 나빴다. 그래, 왜인지 모르겠으나 화가 났다.

당신 말이 맞다. 몹시 피곤하지.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어느 때보다 피곤하고 힘들었다. 오늘 내게 일어난 일만으로 충분히 벅찼고, 손에 꼽을 정도로 최악인 하루였다.

또한 미혼인 귀족 여성의 침실에 외간 남자가 들어온 것 자체가 불경한 일이었다. 도와준 것은 고마우나 오늘 일을 함구하라는 약속을 받아 내고 당장 그를 내보내야 했다.

무엇보다 그의, 타인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건 위험했다. 자칫 선을 넘을 수 있었으니까. 이미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허락했으므로 더 이상은 안 된다는 경보음이 들리기도 했다.

쫒아내야 해. 선을 그어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제길, 저런 얼굴을 하고 괜찮다고만 하면 난들 어쩌라는 건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노마 디아시에게 한없이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가 거슬렸다. 저 인간을 어쩐지 내버려 둘 수가 없다.

‘내 일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하고 있는 주제에, 도대체 왜 노마를 신경 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잠 못 들고 유령처럼 헤매는 그. 이따금 허공을 바라보는 공허한 금안.

그 예쁜 눈동자가 순간순간 텅 비어 버릴 때마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또다시 충동을 내뱉었다.

“당신이 괜찮다면 말하셔도 됩니다.”

그 말에 노마의 금안이 잘게 흔들렸다. 그의 기다란 속눈썹이 그에 맞춰 바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동시에 어떤 예감이 들었다. 이걸 들으면 돌이킬 수 없이 그와 엮이게 될 것만 같은, 그런 예감이.

아뿔싸 싶어 ‘잠시’를 외치려 했지만 노마가 움직인 것이 더 빨랐다. 그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촉촉한 눈동자로 날 올려다봤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때 어딜 갔나 했던 앙투아네트가 폴짝 침대 위로 뛰어올라 내 무릎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 반사적으로 앙투아네트를 안은 나를 향해 노마가 말했다.

“아이사 님, 저는.”

그의 음성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가만 눈을 내리깔고 힘겹게 말을 이었다.

“눈을 감으면 죽어 달라는 소리가 들려서 잠에 들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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