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미안해.”
창백하게 질린 오필리아가 죽어 가는 사람처럼 속닥거렸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다시 사납게 입을 벌렸다.
“그러고 보니 넌 내가 죽어야 맥포이로 돌아올 수 있던데. 그게 네 해피 엔딩인가 봐?”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다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눈앞의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다.
‘해피 엔딩’이라는 단어에 오필리아는 더 이상 내 말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 애의 눈동자엔 혼란만 가득했다.
“아, 이번엔 아닌가? ‘오필리아’는 닉스를 죽이고 놈이 어떻게 부활했는지 그 진상을 밝혀 영웅이 되어야, 해피 엔딩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야. 어쩌나? 이번엔 틀렸는데!”
나는 한껏 비열한 표정을 짓고 오필리아를 비웃었다. 내 말이 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오필리아는 그런 게 아니라는 듯이 절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와중에 억지로 올린 내 입꼬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내 공격에 어쩐지 내가 다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미련 없는 사람처럼 상체를 세워 오필리아에게서 멀어졌다.
“이제 꺼져. 다신, 맥포이 땅을 밟지 마. 진짜 죽여 버리기 전에.”
나는 무섭게 굳은 얼굴로 짓씹듯이 내뱉었다.
“내가 그렇게 하면 네가, 행복할까.”
그때 오필리아가 뜬금없이 중얼댔다. 상상도 못 한 사이코 같은 발언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행복이라니. 네 입에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행복이라니. 주제넘었다.
나는 경악에 찬 눈으로 오필리아를 노려봤다. 그사이 오필리아가 비척대며 나를 따라 일어섰다.
“그게 네가 원하는 거면, 그래야 네가 좋다면 그렇게 할게. 그럴게.”
오필리아가 완전히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러면서 갑자기 손을 뻗어 와, 나는 반사 작용처럼 뒷걸음을 쳤다. 그러나 침대에 가로막혀 물러설 곳은 없었다.
내가 잠시 허우적거리는 틈을 타 오필리아가 내 손에 구깃구깃하다 못해 축축해진 쪽지 하나를 억지로 쥐여 줬다. 손안의 쪽지처럼 내 미간이 처참히 구겨졌다.
“미안.”
의미 없는 사과만 반복하는 것에 짜증이 나, 나는 다시 성을 내려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오필리아가 눈앞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기척 없이 왔던 것처럼, 눈 한 번 깜빡한 사이에. 순식간이었다.
‘꿈, 이었나?’
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어정쩡한 자세로 선 채로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러나 내 손엔 오필리아가 쥐여 준 쪽지가 있었다.
‘꿈은 아닌데.’
나는 멍하니 종이를 내려다보다 구깃구깃 접힌 쪽지를 펼쳤다. 눅눅한 종이를 펼치는 손이 벌벌 떨리는 건 애써 무시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멀쩡한 척하는 것은 나의 습관이었다.
패트라 랑드라이가 필립 모퍽의 아이를 가짐. 다음 봄에 아들을 낳음. 산파는 그녀의 언니, 크루거 부인.
쪽지는 짧았다. 모르긴 몰라도 쪽지를 읽은 순간 내 표정은 어느 때보다 험악했을 것이다.
내 죽음 후 2년 뒤를 보았다, 혹은 살았다고 주장하는 증거라도 되는 걸까.
내 정보원에 따르면 소넷 크루거의 살림은 형편없었다. 늙은 남편이 죽고 아무도 없는 본가로 돌아간 그녀가 동생인 패트라가 보내는 돈으로 그나마 연명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노동을 하면 큰일 나는 것처럼 구는 귀족 사회에서, 단순히 할 줄 아는 게 없어 돈을 받는 줄 알았더니…….
먼저 산파는 아무나 할 수 없었다. 또한 산파가 되려면 성력이 있어야 했다. 무엇보다 치정을 끔찍이 여기는 제국은 마찬가지로 사생아를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제국은 산파를 철저하게 통제했고 등록된 산파만이 아이를 받을 수 있다. 패트라의 언니, 소넷 크루거는 산파로 등록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유는 모르겠으나 성력이 없는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결국 사생아 문제가 맞았군.’
앞뒤가 맞지 않는 이유는 아주 오래된 기록부터 가짜였기 때문이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편지 내용 때문은 아니었다. 귀부인이 남몰래 산파역을 하고 다니며 생계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전개였지만, 시간을 들이면 언젠간 찾아냈을 내용이었을 것이다.
다만 글씨가, 왼손으로 썼을 글씨가 더 이상 내가 아는 그 애 글씨체가 아닌 게 너무나 불쾌했다.
그 생각을 끝으로 아침부터 창창 금이 가기 시작한 발밑이 마침내 우수수 무너지기 시작했다. 탄타로스의 가장 높은 감옥에서 추락했을 때처럼 심장이 발밑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열 해를 가꿔 온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는 무시무시했다. 그 험한 세상을 견딘 것이 모두 풍문인 것처럼, 나는 쉽게 무너졌다.
단순히 오필리아를 만나서는 아니었다. 정확히는 드디어 허용치를 넘어 버린 것이었다.
닉스의 부활, 탄타로스의 일, <오필리아와 밤>.
추문과 모퍽.
나 없이도 잘만 살 것 같은 아치와 에리카.
갈급하게 구는 가노.
물론 이런 것들은 하나하나 상대했다면 아무렇지 않았을 문제였다. 그러나 이것들이 한 번에 들이닥치자 안 그래도 위태롭던 내 발밑이 창― 창― 금이 가다 마침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아. 더 이상 아무것도 못 하겠다.’
뭐든 더는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아,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작게 몸서리를 쳤다.
나는 추락을 느끼며 주저앉았다. 어마어마한 실패감과 무력감이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서서 한참을 앞만 바라보다 천천히 바닥에 엎드렸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모든 걸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죽은 듯이 바닥에 엎어진 채 한동안 그렇게 숨을 죽였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았던 앙투아네트가 다가와, 일어나라는 듯 내 볼을 날름날름 핥아 댔다. 나는 문득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오필리아와 만난 건 아주 잠깐이었다. 아마 내가 바닥에 죽은 듯 누워 있던 시간이 훨씬 더 길었을 것이다.
10년 만에 오필리아를 만난 소감을 말하자면 가위에 눌린 기분이었다. 평소의 악몽보다 생생한, 그런 뭐 같은 꿈을 꾸다 깬 기분이었다.
꽤 오랫동안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나는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그새 식은땀이 말라붙어 만신이 찝찝하고 몸살이 난 것처럼 으슬으슬거렸다.
‘답답해.’
나는 여태 목에 주렁주렁 걸린 목걸이를 신경질적으로 쥐어뜯었다.
다음으로 땋아 올린 머리칼에 박혀 쩔렁거리는 머리 장식들을 움켜쥐고 아래로 당겼다. 두피가 아프게 당기며 후드득, 망가진 머리 장식이 한 알 한 알 카펫 위에 튀었다. 땋은 머리가 풀리며 풍성한 곱슬머리가 내 등허리로 쏟아졌다.
옷이 불편한 어린아이처럼 굴어도 답답함은 해소되지 않았다. 목과 가슴 부근을 메운 드레스 앞섶을 쥐고 뜯어 봤지만 내 악력으로는 꼼꼼한 실밥을 뜯어낼 수 없었다.
짜증이 치밀자 호흡은 더욱 가빠졌다. 나는 급한 대로 테라스에 달려가 창을 열어젖혔다. 죽을 쑨 머리가 생각하는 것을 포기한 탓에 모든 행동이 충동적이었다.
훅, 차가운 겨울바람이 다 식은 몸을 찔렀다. 매서운 바람결은 아프기까지 했다. 덕분에 정신은 번쩍 들었으나 시린 바람 때문에 뻑뻑해진 눈을 몇 번이고 고쳐 떠야 했다.
엉망이 된 몰골을 하고 난간을 짚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눈알을 굴렸다.
모두가 잠에 든 듯 성채는 고요했다. 깨어 있는 사람이라곤 나뿐인 것처럼. 내 발밑은 무너졌는데 세상은 이렇게나 평화롭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돌아가는 게 웃겼다.
“하하, 하!”
내가 울음 같은 너털웃음을 작게 터뜨릴 때였다.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 속, 혼자 움직이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전체적으로 하얀 그것은 달밤에 홀로 반짝반짝, 잘도 눈에 띄었다. 혹은 달빛이 그것을 졸졸 따라다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몽유병에 걸린 사람처럼 정원을 헤매는, 노마 디아시였다.
처음엔 정말 귀신이라도 본 줄 알았다. 오늘 내겐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시달릴 대로 시달려 스스로 제정신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날 같은 바람 덕에 곧 저 하얀 형체가 노마 디아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모양새가 정처 없이 어둠 속을 헤매는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미간을 모았다.
노마는 여전히 무언가에 시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에게 저주를 건 친구 또는 칼리페시. 혹은 둘 다.
10초 정도 그의 뒷모습을 구경했을까.
나는 기척 숨길 줄 모르는 사람이었고, 노마는 정신이 오락가락해도 고강한 성기사였다. 내 기척을 눈치챘는지 유령처럼 정원을 떠돌던 그가 아주 느리게 뒤를 돌았다.
설마 이 밤중에, 이 거리에서 눈이 마주칠까 싶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와 정확히 눈이 마주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날 보는 건가? 아니면 그때처럼 또 다른 걸 보고 있나?’
나는 카탐으로 향하는 길에 들른 여관 식당에서 난동을 부리다 허공을 보던 그를 생각했다. 난간을 짚은 손에 어쩐지 힘이 들어갔다.
그때 열린 창틈 사이로 나를 따라 나온 앙투아네트가 폴짝 뛰어올랐다. 앙투아네트는 내 옆에 서는 듯하더니 노마를 발견하곤 곧장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아!”
나는 순간 내 침실의 높이를 생각하고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놀람은 잠시였다. 앙투아네트는 고양잇과 맹수답게 능숙하게 땅에 착지했다. 졸리지도 않은지 신나게 폴짝이며 제 주인에게 달려갔다.
노마가 양팔을 뻗어 앙투아네트를 안아 드는 것이 보였다. 그러곤 분명,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다시 들어 올렸다. 이번엔 확실히 알겠다.
‘날 보고 있군.’
야밤에 잠도 자지 않고 남의 성을 쏘다니는 노마의 행동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설마 밤마다 저러나? 저러다 다치거나 사고라도 나면 어쩌지? 디아시 쪽에 알려야 하나?’
퍽 위태로운 노마의 모습에 나는 추위까지 잊고 고민했다. 물론 내가 누굴 걱정할 군번은 아니었다. 그저 더 이상 일이 터졌다간 정말 감당 못 할 것 같아서 그랬다.
내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멍하니 이쪽을 쳐다보던 노마가 갑자기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곤 다시 이쪽을 빤히 바라봤다. 그의 수상쩍은 행동에 그걸 지켜보는 내 표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그리고 일순, 노마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식겁해 사라진 노마를 찾으려 바쁘게 눈알을 굴렸고, 곧 그가 하늘에서 똑 떨어졌다.
노마는 어느새 내 침실 테라스와 가장 가까이 있는 나무에 비스듬히 올라서 있었다. 앙투아네트를 양팔로 소중히 안은 채였다.
달빛을 등진 탓에 노마의 표정은 여전히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몸짓은 어딘가 꿈을 꾸는 사람처럼 평소보다 둔했다. 냉큼 예를 갖추어야 마땅함에도 내가 헛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와중에 테라스 난간에 올라서는 건 생각도 못 하는 듯, 헛것을 마주한 사람치고는 행동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날이 춥습니다, 아이사 님.”
그때 노마가 말했다. 그러는 그는 한참을 밖에서 헤맨 것 같았다.
“어째서 또 울고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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