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나는 미련한 사람이라 ‘혹시나’를 버리지 못하고 또다시 확인을 했다.
그러나 나의 바람와 다르게 내 눈앞의 오필리아는 <오필리아와 밤>에 나오는 그 ‘오필리아’가 맞는 모양이다.
소설에 의하면 성력이 없는 오필리아는 검기를 갈고닦아 10년 동안 닉스의 부활을 막기 위해 니콜라스 일행과 함께 온 제국을 떠돈다.
그 모험은 한순간도 희망찬 종류가 아니었다.
한 번은, 오필리아는 오른팔이 잘린다. 잘려 나간 팔을 뒤늦게 찾아다 붙인 탓에 니콜라스의 성력을 부어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니콜라스는 오필리아의 오른쪽 팔을 완전히 살려 내지 못한다.
<오필리아와 밤>이 진짜인지 확인하는 건 더 이상 시간 낭비인 듯했다. 나는 오필리아의 시체 같은 오른팔을 쥐고서 또다시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고마워서, 미안해서, 안타까워서?
후회스러워서?
아니다.
‘그 망할 소설이 전부 진짜면 나는 이제 어쩌면 좋아.’
머리가 새하얘질 정도로 화가 났기 때문이다. 네 이야기는 나를 향한 기만이다. 네 10년은, 내 10년을 아주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이야기다.
네가 멋대로 내 숨을 붙여 놓은 것.
내게 생명력이 없어 네 성력으로 숨을 쉬고 있다는 것.
네가 닉스의 조각난 신체를 찾아 하나씩 불태우기 위해 10년을 헤매고 산 것.
오른손잡이였던 네가 왼손잡이가 된 것.
아―.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는 엿같은 사실까지.
하나같이 아이사 맥포이를 부정하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나는 <오필리아와 밤>을 평생 몰랐어야 했다. 신이 널 사랑하긴 하나 봐. 나한테 이렇게 엿을 먹이는 걸 보니.
“날 아주 멍청이로 만드니까 기분이 좋던가?”
그 망할 소설 따위 기억하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그 소설에 대한 기억이 없다면 나는 그대로 죽었으려나. 또다시 미친 사람처럼 웃음이 터졌다.
“널 죽이면 나도 죽는다니. 잘나가는 희극도 이보다 우습진 않을 거야.”
어떻게 아는 거야, 미안해, 아이사. 오필리아는 계속 그렇게 중얼댔다. 내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말들이었다. 몰려오는 피로감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짜증 나. 마음처럼 되는 게 하나도 없어.’
감성팔이는 여기까지였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무력, 허탈, 허무감을 느끼며 자기 연민에 빠져 있을 새가 없다.
네가 눈물을 멈추고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줄 시간은 더더욱 없다. 나는, 맥포이 가주는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입을 열었다.
“처울기만 하려고 온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
다시 눈을 떠 눈물에 푹 잠긴 그 애의 푸른 눈동자를 바로 마주했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숨김없이 대답해야 할 거야.”
나는 오필리아를 바닥에 꿇렸다. 그러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팔다리를 꼬고 오만한 얼굴로 그런 오필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울면 바로 눈가가 빨갛게 짓무르고 퉁퉁 붓는 게 어릴 적과 같았다. 시위라도 하는 것 같아 짜증이 치밀었다.
“네 성력.”
내가 불시에 입을 열자 오필리아가 움찔 몸을 떨었다.
“내가 탄타로스에서 사용했는데.”
성력은 흔적이 남으니 오필리아 역시 이 사실을 대강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애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 뒤론 쓰려 해도 마음처럼 안 되더군. 어떻게 된 거지?”
“간단하게 말하자면, 봉인해 놓은 거라, 그래.”
와중에 중간중간, 오열의 여파로 히끅거리는 게 꼴 보기 싫었다.
“봉인?”
“내 흔적을 찾아 닉스의 수하들이 들러붙을, 것 같아서. 그땐 아무도 모르게 봉인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 했어.”
“그럼 난 어떻게 쓴 건데?”
“네가……. 네가 나를 부르면, 부르는 게 조건이야.”
오필리아의 목소리가 답지 않게 줄어들었다.
“그때는, 어렸을 땐 위험해지면 네가 날 부르곤 했으니까. 그래서…… 술식을 그렇게 걸어 놨어. 그땐 정신이 없어서 내가 한 짓은, 생각도 못 했어. 습관적으로―.”
오필리아는 변명처럼 더듬거리곤 고개를 푹 숙였다. 어딘가 허술한 조건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했다. 그간 쟤를 죽이고 싶을 때마다 불러 댔는데, 무슨 차이인가 싶었다.
“그럼, 어쨌건 내가 네 성력을 다룬 게 아니라 네 성력이 자의로 움직였다는 말인가?”
“그런 셈이야.”
‘어쩐지……. 멋대로 움직이더라.’
또다시 잠시간 침묵이 흘렀고, 정적을 깬 건 이번에도 나였다.
“그래서 넌.”
오필리아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뭘 어디까지, 어떻게 알고 있지?”
내 말에 오필리아가 헛숨을 들이켰다. 파란 홍채가 부서질 듯이 흔들렸다. 꼭 무슨 죄를 지은 사람 같았다.
“탄타로스를 어떻게 알았어. 그곳을 뒤지면서 그 미친 광신도 놈들이 제국민을 납치해 제물 의식을 행한 사실을 알아냈을 텐데 왜 나서지 않았지?”
“나는…….”
“내가 어디까지 아는지 시험하기라도 한 건가?”
“시험이라니, 그런 게 아니야. 나는 그저, 확실한 게 하나도 없어서. 또 내가 망쳐 버릴까 봐, 나는 그저 네가 뭐든 행동할 때까지 기다린 거야.”
오필리아가 다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두서없이 부정했다.
“내가 하는 말을, 전부 믿진 못할 거야. 미친 소리 같다는 걸 나도 알지만…….”
조금 망설이던 오필리아가 운을 띄웠다.
“나는 탄타로스에 납치당한 네가……. 죽은, 뒤의 세상을 봤어.”
“……뭐?”
“아니, 살았다고 해야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 확신을 못 하겠어. 내가 단순히 미래를 본 건지, 정말 내가 그렇게 2년을 산 건지 나도 잘 모르겠어.”
얘 정말 미쳤나? 내가 저를 미친 사람처럼 쳐다보자 오필리아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못 믿을 거라 했잖아. 하지만, 진짜야.”
<오필리아와 밤>에서 내 죽음 후, 오필리아와 니콜라스가 닉스를 죽이고 광신도 무리를 정리하는 데까지 약 1년의 시간이 걸린다. 그로부터 다시 반년이 지나고 두 사람이 결혼하면서 오필리아의 이야기는 꽉 막힌 해피 엔딩을 맞는다.
그럼 내 눈앞의 오필리아는 엔딩 이후 고작 6개월을 더 안다는 건가? 엔딩까지 아는 거면 몰라도 어딘가 이상했다.
“<오필리아와 밤>을 아나?”
“오필리아? 나?”
정말 모른다는 반응이었다.
“결혼은? 원래대로면 디아시 가주와 네가 결혼하는 것도 모르나?”
“원래대로라니.”
오필리아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이사 너야말로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오필리아는 매우 혼란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미래를 봐? 시간을 돌려? 무슨 미친 소리란 말인가.
‘아닌가. 네가 주인공인 소설을 읽은 내 쪽이 더 미친 소리일까.’
“아이사. 혹시 너도 메헤라를 만났어?”
그때 오필리아가 또다시 미친 소리를 지껄였다. 입을 열면 열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에 내 미간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나와 아는 게 다르다. 정보의 출처가 완전히 달라.’
난 책 내용을 알고, 눈앞의 이 애는 미래를 안다.
미궁 속, 이거 하나만 확실했다. 둘 다 지금 상황에서 별 쓸모가 없다는 거다.
<오필리아와 밤>의 내용이고, 오필리아가 살았거나 혹은 봤다는 미래고, 내가 살아남으면서 완전히 쓸모없는 정보가 되어 버렸다.
‘결국 얘도 뭐가 뭔지 제대로 모르고,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정보도 없다는 거네.’
그렇다면 더 물을 것도 없었다. 이 지긋지긋한 면을 더 볼 이유가 없었다.
“아이사. 말해 줘. 너는 뭘 알고 있어? 내가 어떻게 해야 할―.”
나는 내 다리를 붙잡고 절박하게 물어 오는 오필리아를 매몰차게 쳐 냈다. 잠시 우리 사이에 오필리아가 콧물을 삼키는 소리만 오갔다.
그만 꺼지라고 축객령을 내리려 했는데 이번엔 오필리아가 빨랐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봉인을 유지하는 정도가 고작이지만. 어떻게든 네게 피해가 없게 할게. 이번엔, 반드시 그럴게.”
오필리아가 당연한 소릴 지껄였다. 그리고 오필리아는 여기까지 하고 꺼졌어야 했다.
“넌 닉스와 상관없는 삶을 살았으면 했어.”
그 애가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머리꼭지가 빠르게 타들어 갔다.
“그러니까 넌,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 말을 끝으로 내 정수리가 타오른 끝에 달랑 한 줄 남아 있던 신경 줄이 뚝 끊겼다.
오필리아가 10년 동안 온 대륙을 구르며 바랐던 것은, 내가 그날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실패했을뿐더러,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다. 그날을 잊는 게 가능할 리가.
내 입꼬리가 제멋대로 비틀렸다. 혀에 분노가 실렸다.
“야, 내가 그날에서 벗어나길 바라?”
“넌 놈과 상관없는 사람이야. 네 인생을 살―.”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이기적인 건지!”
악에 받친 내 목소리에 오필리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너는 그게 될 거라고 생각하나? 머릿속이 동화책에 나오는 주인공이 따로 없군. 야―.”
나는 제법 길바닥 양아치 같은 표정을 구사할 줄 알았다.
“네 눈앞에 나는, 더 이상 네가 모셔야 하는 맥포이 아가씨가 아니야.”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지배한 생각은 하나였다.
감히 내 인생을 기만한 네게 가장 큰 상처를 남겨 주고 싶다. 네가 영원히, 온전한 해피 엔딩을 맞이하지 못할 정도론 큰, 그런 상처를 말이야.
그리고 <오필리아와 밤>을 아는 나는 네게 가장 큰 상처를 남기는 방법을 알고 있다.
오필리아에게 아이사 맥포이는 처음 생긴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때마침 이 구절이 뇌리에 번뜩였다.
태어나 맥포이와 닿기 전까지 오필리아는 혼자였다. 오필리아에게 가족, 집이 가지는 의미는 크다.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악랄한 미소를 지으며, 네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말을 골랐다.
“다시는 맥포이에 발을 디디지 마.”
“…….”
“가족 놀이는 끝났어. 아주 옛날에, 그날 말이야.”
“…….”
“이제 꺼져. 가서 네 말처럼 평생 닉스나 봉인하면서 살아 봐, 어디.”
혼자만 시간이 멈춘 듯, 오필리아는 미동도 없었다.
“난 오래 살아야겠으니.”
곧 오필리아의 눈에서 다시 굵은 눈물방울이 퐁퐁 비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미동 없이 눈물이 고이다 떨어지길 반복하는 장면은 마치 조각상이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기이했다.
그리고 나는 쐐기를 박기 위해 다시 입술을 비틀었다.
“네가 대단히 착각을 한 모양인데.”
적절하게 비웃음을 흘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네가 닉스를 죽이면, 내가 고맙다고 하면서 네가 다시 맥포이 땅을 밟게 뒀을까.”
그럴 리가. 그렇게 간단할 리가.
“닉스를 완전히 봉인하거나 죽이면,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나는 나른하게 고개를 저으며 그 깜찍한 발상을 비웃었다.
“난!”
그러다 벌떡 일어나 오필리아의 멱살을 잡아챘다. 오필리아가 달빛이 비치는 곳까지 쉬이 밀렸다. 달빛에 하얗게 질린 얼굴이 드러났다. 월광이 나와 그 애 사이를 흉흉히 갈라놓은 것처럼 보였다.
“난 그렇게 못 해!”
나는 악귀에 들린 사람처럼 오필리아의 얼굴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이마에 순식간에 핏대가 솟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네가 닉스를 부활시키려는 그 수하들과 죽기 살기로 싸웠든, 그 과정에서 수도 없이 죽을 뻔했든 내 알 바가 아니야! 그런다고 내 가족이 살아 돌아오나? 영지민들이 살아 돌아오나? 아치는 고아가 아니게 되나?”
거칠게 숨을 몰아쉰 나는 분에 못 이겨 집어 던지듯이 오필리아의 멱살을 놓았다.
“지랄하지 마. 십수 년이 걸리든, 닉스만 죽이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해결을 하려면 좀 빨리 처하던가.
“네가 생각해도 너무 늦지 않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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