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매일 말이야.’
툴레의 노부부 집에서 눈을 뜬 후로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생각했다. 하필이면 오늘일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오히려 아주 늦은 감이 있었다. 답지 않게 내가 이 문제를 피했기 때문일 것이다.
침실 가운데에 선 나는 앙투아네트를 카펫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찬찬히 침실을 한번 돌아봤다.
내 시선은 다시 발코니에서 멈췄다. 발코니 창으로 휘영청 밝은 달만 보였다. 그러나 알 수 있었다.
‘저기에 있구나.’
이건 검기나 감각이 예민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오늘이겠구나, 또는 저기다, 하는 어떤 직감이었다.
푹신한 카펫을 밟고 선 앙투아네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발코니 쪽을 경계했다. 나는 발코니를 향해 두 걸음을 더 디뎠다.
“나와.”
내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문 앞과 복도에 사람을 모조리 물린 탓에 침실은 지나치게 고요했으므로, 끼이익― 발코니 창이 열리는 소리가 끔찍하게 컸다. 그 소리가 마치 귓가에 대고 날카로운 무언가를 긁는 것처럼 느껴져 나는 뭔가를 참아 내는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열린 창을 타고 찬바람이 불어와 피부를 두드렸다.
피부에 닿는 바람을 신호 삼아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달이 밝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나부끼는 기다란 머리칼이 눈에 들어왔다. 발코니 창을 장식하는 반투명한 흰 천이 그것과 함께 휘날렸다.
나는 어둑한 밤을 가르는 샛노란 빛에 한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흩날리는 금빛 머리칼을 쫓아 내 시선이 움직였다.
기다란 금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보다 더욱 빛이 나는 아름다운 여자가, 내가 각별히 아끼는 발코니에 서 있는 게 보인다.
‘아아.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야.’
나는 이 밤, 이날을 최악의 날로 이끌 마지막 손님을 맞이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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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필리아와 밤>을 알고 난 후에 오필리아를 찾지 않은 이유는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내 인생이 어딘가에 한낱 소설 속 조연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도 충격적이지만, 문제는 그 내용이었다.
닉스가 손을 높이 든 순간, 검은 손이 아이사의 목을 그대로 베었다.
내 죽음이 적혀 있는 것은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건, 나는 지금 살아 있지 않나.
날 여전히 혼란에 빠뜨린 건 오필리아의 10년이었다. 친절하게 서술된 너의 10년과 너의 생각, 감정 따위가 한순간 내 머릿속을 차지한 게 문제였다.
너의 구구절절한 사연과 기분. 나는 그런 것들 따위 알고 싶지 않았다.
<오필리아와 밤>을 부정하려 해 봤다. 차라리 내가 미친 사람이 되는 게 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나를 비웃듯, 곳곳에 <오필리아와 밤>이 진짜라는 정황만 넘쳐 날 뿐이었다.
내 생명을 유지하는 네 성력이라던가.
닉스를 깨운 잔당들의 범죄가 모조리 들어맞는다던가.
마지못해 <오필리아와 밤>을 받아들였을 때, 나는 무엇보다 참담함을 느껴야 했다.
‘왜냐면, 난 널 정말 죽여 버릴 생각이었거든.’
네가 살아 있다면, 다시 마주한 순간 망설이지 않고 널 내 손으로 죽이기로. 나는 오래전에 그렇게 정했는걸.
네가 어떤 10년을 살았든 말든, 내 알 바인가? 난 네 생사 여부조차 확신할 수 없었는데. 너는 내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그저 죽었거나 도망자가 되길 택했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그러니, 나는 널 만나면 널 죽이기로 했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깜빡였다.
눈앞엔 오필리아가 있었다. 내 악몽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 아이가 오늘은 정말 내 눈앞에 서 있었다.
꿈이 아니라 진짜라는 생각이 들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너를 향한 내 마음은 굉장히 복잡하다. 시간이 지나 너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던 내가 조금씩 이성을 찾기 시작했을 때, 나는 더 힘이 들었다.
맥포이의 지난날이 사무치게 그리워질 때면 널 잡아 죽이고 싶다가도.
살아 있긴 하는지, 왜 우릴 떠났는지 화를 내다가도.
다시 맹렬하게 널 죽이고 싶어서. 스스로도 뭘 하고 싶은 건지 몰라 한동안 정말 미쳐 버릴 뻔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해야 내가 괜찮아질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널 만나면 내가 해야 할 행동은 하나다.
나는, 맥포이 가주이기 때문이다.
또한 마침내 조금씩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을 때, 나는 느리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널 미워하고 원망해 선택했던 모든 일들이 결국 나와 아치를, 맥포이를 살리는 길이었다는 것을.
제국이 널 마녀로 몰도록 내버려 둔 것. 황제의 수배령에 따라 네게 수배령을 내린 것. 복수심에 불타 너와 닉스, 이단을 잡아들이는 일에 목을 맨 것.
전부, 가주로서 탁월한 선택들이었다.
또한 나는 알고 있다. 이 선택들이 가문이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라기보단 순전히 나의 화풀이였다는 걸.
다행히 맥포이 가주의 화풀이는 분노한 서부인들과 후계자를 잃은 황제의 마음을 달래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날 네가 네 발로 떠나지 않았다면 나는 직접 네 목을 베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나는 여전히 맥포이의 가주고, 너는 나의 오랜 두통의 원인이다. 나는 널 너무 오래 미워했다. 너무 긴 시간 네 죽음을 바랐다.
‘그러니 나는 널 죽여야만 해.’
그럼 나도 좀 편해지지 않을까.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지긋지긋해서라도 너와 닉스를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를 향해 걸어오는 아름다운 여자를 가만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느릿하게 상체를 굽혀 드레스 자락을 걷고 종아리에 찬 단도를 뽑아 들었다.
그 여자는 내가 단도를 뽑아 든 걸 보고도 나를 향해 한 발짝 두 발짝 계속 다가왔다.
숨소리는 물론 발자국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두 눈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면 여자가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어떤 기척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침대맡 촛불 두 개에 의지한 방은 제법 어두웠다. 그보다 달빛이 더욱 밝아, 여자의 얼굴은 달을 등지고 발코니에 서 있을 때보다 더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손끝에 잡히는 거리에 여자가 멈춰 섰다.
우린 잠시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당연한 수순처럼 여자에게 달려들어 한 손으로 그 모가지를 낚아챘다. 그러곤 그대로 그녀를 옆에 있던 침대에 몰아넣고 시트 위로 쓰러뜨렸다.
여자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인형처럼 내 손에 이끌렸다. 여자의 배를 깔고 앉아 목을 조르듯이 힘을 주었지만 그녀는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내 악력 따위 검기를 수련한 네겐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지.’
네가 이제는 검기를 다룬다는 사실을 도대체 내가 왜 알고 있는지. 심심하면 <오필리아와 밤>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실소가 비어져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나는 한 손으론 네 목을 조르며 다른 한 손으로 단도를 높이 치켜들었다. 손바닥 아래로 너의 맥박이 팔딱였다.
이 단도를 두근두근 뛰는 네 목에 내리꽂으면 다 끝. 나도 이제 편해질 수 있을 거야. 그렇지?
가느다란 촛불 빛에 네 얼굴이 드러났다. 파란 눈이 날 뚫어져라 올려다보았다. 바다처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푸른 눈은 여전했다.
<오필리아와 밤>의 한 장면처럼 누군가는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다 단도를 놓치기도 했겠지만, 나는 그 눈동자를 무감히 내려 봤다.
내가 아는 건 일곱부터 열다섯 살의 너, 눈앞의 너는 스물다섯.
‘달라졌나.’
글쎄.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고 실은 잘 모르겠어.
눈앞에 있는 건 소녀티를 벗은 아름다운 여자 주인공. 그러나 너는, 내게는 그저 여전히 오필리아였다.
‘나는 널 죽여야 살 수 있어.’
나의 오랜 증오, 나의 오랜 두통. 단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그대로 단도를 힘차게 내리꽂았다.
“…….”
흐느끼는 소리가 불쾌하다.
“네가 왜 울어.”
오필리아를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내가 물었다.
그 애 목덜미 바로 오른쪽으로, 단도가 침대 시트 깊숙이 처박혀 있는 게 보였다. 단도가 시트를 가르면서 그 애의 기다란 머리칼 한 묶음 정도가 두서없이 잘려 나간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다시 오필리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름다운 얼굴이 가련하게도 일그러져 있었다. 이젠 내게 익숙지 않은 아름다움이었다.
“다, 다 아는구나.”
소리 없이 울던 오필리아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아이사. 너, 다, 전부 다 알고 있구나.”
뭔갈 더 말한 것 같았지만 헐떡거리는 탓에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저게 전부였다. 나는 여전히 침묵하며 그런 그 앨 내려다보기만 했다.
<오필리아와 밤>을 몰랐다면 나는 곧장 네 목에 단도를 찔러 넣었을 거다. 너는 내 분노를 차마 피하지 못할 것이고 하얀 시트는 너의 피로 물들었겠지.
‘네 10년, 네 생각과 감정을 알아 버려서 내 마음이 움직이기라도 한 것은 아니야.’
전혀. 오히려 더욱 참담하고 비참해져서, 잊었던 증오마저 살아나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당장에 널 찢어발길 생각만을 했는걸.
그러나 <오필리아와 밤>을 알아 버린 난, 마침내 가장 끔찍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뭘.”
그런 것치고 내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담담했다. 오필리아가 현실을 부정하듯이 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 목숨은 이미 뒈진 지 한참인 걸 말하나?”
오필리아의 성력은 내 숨을 잇게 한다.
“아니면 네 그 대단한 성력으로 이 목숨이 유지되는 거?”
내가 죽으면 내 숨을 유지하던 오필리아의 성력이 그 애에게 돌아간다. 어쩌면 빌려준 셈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마지막 말을 뱉으려다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지금 내가 뱉어 내고자 하는 이 가설은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혔기 때문이다.
‘내가 죽으면 오필리아의 성력은 그 애에게 돌아간다. 반대로 오필리아가 죽으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오필리아가 죽으면 그 애의 성력은 사라진다. 성력은 생명과 수명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즉, 그 애 성력으로 목숨을 연명하는 나 역시―.
“네가 뒈지면 나도 뒈지는 것을 말하나?”
죽는다.
결국 김빠진 웃음이 터졌다.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당처럼 보이는 웃음일 것이다.
안 그래도 커다란 오필리아의 눈이 더욱 크게 뜨였다. 곧 그 시퍼런 눈에서 굵은 눈물이 퐁퐁 쏟아지기 시작했다.
뭇 사람들의 심장을 조이는 장면이었겠지만 그 눈물은 내게 확인 사살에 지나지 않았다. 그 애는 급기야 왼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맞나 보군.”
내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소리 없이 오열하는 그 애의 흐느낌이 더욱 거세졌다.
나는 그 꼴을 서늘하게 바라보다 오필리아의 목과 단도를 쥔 손에 힘을 뺐다. 절로 힘이 빠진 것에 가까웠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울고 싶은 건 이쪽이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살아 숨 쉬는 게 끔찍하게 여겨졌으니.
나는 짧은 회상을 마치고 시트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진 오필리아의 오른팔을 잡아챘다. 그 애의 오른팔은 끈 떨어진 인형처럼 맥없이 들렸다. 힘줄이 끊어진 것처럼 덜렁거리는 팔은, 마치 목각 인형의 팔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내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고, 소리 없이 처울던 오필이아의 전신이 굳었다. 그 애의 동공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거세게 흔들렸다.
“X발.”
이번엔 욕설을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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