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숨긴 건 아닙니다. 보좌관의 사적인 일은 아실 필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에리카가 조금 고민하다 덧붙였다. 나는 미간을 더 좁히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보시다시피 해리 폴른은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러니 계속 모른 척해 주십시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에리카가 더 물어볼 게 남았냐는 표정으로 흘끗 나를 쳐다봤다.
그 모습이 어쩐지 꼴도 보기 싫었다. 괘씸했다.
“……만찬장에서 보지.”
결국 먼저 움직인 것은 나였다. 나는 그대로 도망치듯이 두 사람을 지나쳤다.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벗어나는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우습게도 혼자 남겨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 빼고 다들 살판났군.’
어린애도 아니고 에리카를 아주 뺏긴 기분까지 들어, 지레 놀라 중간에 우뚝 멈춰 서기도 했다.
‘아치도 에리카도. 맥포이 전체가 나 없이도 잘만 살겠어.’
하루 종일 짜증스런 일만 생기자 감정이 다소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달았다. 심지어 정신을 차려 보니 글렌이 기다리고 있는 정원 입구가 아니라 뒷문으로 빠져나와 버린 게 아닌가.
그 사실을 깨닫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안 그래도 치렁치렁한 차림새 때문에 걷는 것도 불편해서 다시 정원 입구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이사?”
그때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나는 뭔가를 훔쳐보다 걸린 사람처럼 팔짝 뛰었다.
놀람도 잠시, 나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려 내 이름을 부른 놈을 노려봤다. 내 이름을 저렇게 마구 불러 대는 인간은, 하나였다.
“당신 성이라지만 왜 혼자야. 도그만 경은.”
경계심 어린 나의 태도에도 가노는 걱정스럽게 물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는 자기는 맨날 혼자 다니면서 우스웠다.
“뭐야. 자네 아직 집에 안 갔나?”
뜻밖의 상황의 연속이라, 평소보다 더 날 선 말투가 나갔다. 그러자 그가 섭섭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은 내가 갔으면 좋았나 봐.”
“아무래도 상관없네.”
나는 여태 벌렁거리는 가슴을 무시하고 무심하게 말했다. 네가 가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에 가노도 미간을 조금 구겼다.
“마침 그댈 보러 가는 길이었는데.”
“용무는.”
가노가 한숨을 내쉬듯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랑드라이가 생각보다 철저하더군. 정보원 굴리는 걸론 아무것도 찾아낸 게 없어서 내가 직접 황도에 가 볼 생각이야.”
그러고 보니 그는 어딘가 떠나는 사람처럼 후드 달린 로브를 두르고 있었다.
“자네가 직접 황도까지 가다니, 모퍽에게 약혼 선물로 준 땅이 퍽 가지고 싶나 봐.”
내가 모른 척 딴소리를 하자 가노가 이번엔 픽, 하고 웃었다.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그런 나와 정원을 느긋하게 번갈아 보다 입을 열었다.
“에리카와 해리가 만나는 걸 몰랐나?”
“뭐야? 자네는 알았어?”
“두 사람 모두 당신 사람이지 내 사람은 아니잖아. 정기적으로 뒤를 캐다 보니 알 수밖에. 둘은 오래되기도 했거든. 난 당신이 몰랐다는 게 의왼데?”
가주 측근 뒤를 캐는 게 자랑이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훑었다.
그때 가노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이쪽엔 확실히 재능이 없는 것 같아. 애초에 관심도 없고, 무엇보다 너무 둔해.”
“뭐야?”
“연애 감정이나 사랑 쪽으로 말이야.”
“하! 그런 거에 재능도 필요하나?”
나는 가노의 소년 소녀 같은 발언을 악당처럼 비웃었다. 그러곤 따분하다는 듯이 덧붙였다.
“그쪽으로 재능이 존재한다고 한들 원하지도 않아. 내겐 필요 없으니까.”
“그래. 그대가 그런 재능이 필요 없다면야 없어도 돼. 내 생각엔 그건 한쪽만 있어도 어떻게 되거든.”
가노가 그렇게 말하곤 시원스럽게 웃었다. 쓸데없이 긍정적이었다. 또 분하게도 확실히 잘 모르는 분야이긴 해서 나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뭐라는 거야……. 자네와 이런 농담 치고 있을 시간 없네.”
어느새 가노의 뒤로 해가 붉게 타오르며 성채 너머의 능선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곧 연회가 시작된다.
“디아시를 위한 만찬 연회에 가나?”
가노가 새삼 화려한 나의 차림새를 보더니 물었다.
“그래.”
“재미없겠군.”
“일이니까 재미는 아무래도 상관없지.”
“일만 하면 되나. 사람이 쉬기도 하고 즐기기도 해야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자꾸만 말장난을 하는 가노에, 나는 결국 버럭 성을 냈다.
“그대는 가만 보면 기쁨, 즐거움, 쾌락 이런 걸 아주 두려워하는 거 같아.”
“오늘따라 왜 날 낱낱이 분석하려 들지?”
나는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재빠르게 부정했다.
“그리고 죄다 틀렸다. 두려워한 적 없어. 그것들 역시 내게 필요 없을 뿐이지.”
“필요 없다라.”
가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순식간에 좁아 든 거리감에 나도 모르게 물러설 듯 발끝을 주춤거렸다.
“하지만 당신은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어.”
그건, 나도 인정한다. 특히 오늘같이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 뭐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는 날엔 아무리 나라도 머리를 식혀야지. 그래서 지금 어울리지 않게 산책이라도 하고 있는 거 아닌가.
‘그 산책도 망한 것 같지만.’
나는 직전에 본 에리카와 해리의 접촉, 날 시험하려 드는 눈앞의 가노를 보며 생각했다. 그러다 가노와 눈이 마주였다.
“…….”
새삼 그의 검은 눈동자가 살벌하게 느껴졌다. 영락없는 포식자처럼 보여 괜히 흠칫했다.
“그대는 매사 너무 복잡하게 생각해.”
가노가 말했다. 노을빛에 타는 그의 붉은 머리칼 끝은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보였다.
“필요 없다라……. 그런데.”
“…….”
“또 아나? 해 보지 않아서, 몰라서 그런 걸 수도 있잖아.”
정론인 듯, 궤변이었다. 동시에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순진한 어린아이도 아니고 뻔한 개수작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의 표정이 너무 진지하고, 절박하며, 분해 보여서 나는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가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한번 시험해 보는 건 어때.”
뭐, 하는 순간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동시에 익숙한 그의 체향이 훅 풍겨 왔다. 배를 타고, 음지의 일을 도맡는 그에게선 언제나 약품의 싸한 향이 났다. 가끔은 피비린내가 지워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면, 그의 짙은 눈썹이나 깊이 있는 눈동자 따위가 어느 때보다 가까웠다. 그가 한 걸음 다가서면서 내 눈높이에 맞춰 상체를 숙여 온 탓이었다.
“당신에게 정말 그런 게 필요 없는지 확인해 보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그의 입술이 코앞에서 움직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이게 뭐지, 하는 찰나 그의 숨이 얼굴에 닿고 눈앞에 있던 그의 입술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가노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꺾였다.
쿵쿵쿵―.
미지의 영역에 대한 불안감이 빠르게 차올랐다. 내가 만들어 놓은 선을 넘어선 안 된다는 강박감은 그보다 더욱 빨랐다. 심장이 불안하게 널뛰기 시작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가노 말이 맞았다. 어쩐지 두려웠다.
입술이 닿기 직전,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돌렸다. 허억, 숨을 들이켠 후에야 내가 이제껏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가노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
“…….”
“……이건, 아니야. 정신, 정신 좀 차리지. 자네까지 왜 이래.”
나는 여전히 한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횡설수설했다. 갑자기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가노가 왜 이렇게 갈급하게 구는지 모르겠고, 그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듯이 노골적으로 감정을 퍼붓는 그가 무서울 지경이었다.
필립이고, 이디오고, 아치고, 에리카고, 가노고…… 오늘 다들 나한테 왜 이러는지. 억울하기까지 했다.
‘벗어나고 싶다. 이 자리를.’
서서히 팔다리의 통제력이 돌아왔다.
‘지금 당장.’
곧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을 치며 그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그때까지 가노는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다.
“내 생각엔, 자네야말로…….”
나는 그를 쳐다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말을 더듬지 않기 위해 기를 썼다.
“자네야말로 머리를 식혀야겠군. 이만 돌아가. 더 늦으면 오늘 안에 못 떠나지 않나?”
그대로 멈춘 가노의 표정을 살필 생각도 못 하고 나는 그대로 뒤를 돌았다.
치렁치렁한 드레스 자락을 꽉 쥔 채 또다시 도망치듯 걸었다. 정신없이 걷던 나는 정원을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야 걸음을 멈추었다.
아무 기둥이나 부여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오랜만에 도망자의 기분을 느꼈다. 대번에 서러움이 몰려왔다.
‘아침에 어울리지 않게 식사나 하며 노닥거렸기 때문일지도.’
그 뒤로 이어진 운수 나쁨을 생각하면, 그랬다.
성질대로 머리를 헤집으려 했지만 손가락 사이에 걸리는 주렁주렁한 보석들 때문에 그마저도 불발되었다. 정말이지 꿈같은 하루였으며, 꿈이라면 악몽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돼. 뭔 놈의 아침 식사냐. 뭔 놈의 기분 전환이고 산책이냐.’
놀랍게도 이제 겨우 해가 지고 있었고 운수 나쁜 날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디아시를 위한 마지막 만찬에서 나는 한 가문의 수장답지 않게 저조한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맥포이 가주가 몸이 좋지 않아 보이니 만찬은 이만하면 되었소.”
결국 밀란 디아시가 맥포이 가주의 안색이 좋지 못하다며 중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 아주 창피한 일이었다. 가주 일도 제대로 못 해냈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크게 들었다. 동시에 머리를 관통하는 것만 같은 두통을 느꼈다.
‘나에겐 아직 앙투아네트가 있다. 앙투아네트를 안고 자면 괜찮아질 거야.’
단단히 굳은 얼굴로 노마에게 앙투아네트를 건네받은 나는 곧장 침실로 직행했다.
앙투아네트를 안겨 주던 노마가 꽤나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뭐라 했던 것 같은데,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자괴감과 두통 때문에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 내 머릿속엔 앙투아네트와 침대로 가득했다.
벌컥, 침실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침대로 뛰어들 생각이었다.
“…….”
그러나 나를 반긴 것은 묘한 기시감이었다.
정확히는 익숙하면서 동시에 이질적인 느낌. 여기에 있으면 안 되며, 있을 수 없는 그런 것.
‘오늘 아주 날이군.’
나는 직감적으로 기시감의 정체를 눈치챘다.
발걸음을 멈추고 도그만 경을 슬쩍 돌아보니 그가 왜 그러시냐는 표정으로 나와 침실 안을 번갈아 보았다. 기시감은 나만 느낀 듯했다.
내 품에서 앙투아네트가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앙투아네트의 시선이 침실 안쪽, 널따란 발코니를 향했다.
“…….”
“왜 그러십니까, 가주님.”
문 앞에 어색하게 멈춰 선 내게 도그만 경이 물었다. 나는 발코니에 시선을 고정한 채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글렌.”
오랜만에 이름이 불리자 글렌은 긴장했다.
“예. 가주님.”
“오늘은 내가 아주 예민하다. 문 앞을 지키지 말고 복도 멀리, 그래. 이 층에 아무도 못 오게 해라. 내가 부를 때까진 절대로 누구도 침실 가까이 오지 마. 환복도 스스로 하지.”
그러곤 글렌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침실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탁―.
마침내 커다란 침실 문이 닫혔다. 침실의 적막은 고요했고, 문이 닫히는 소리는 어느 때보다 크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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