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나는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버릇없는 자식. 아이노를 빼다 박아선.”
제법 심드렁한 목소리를 내는 데 성공한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최대한 멀쩡한 척, 아무런 타격이 없는 척 곧은 자세로 걷기 위해 온 신경을 발걸음에 집중했다.
평소와 같이 당찬 걸음걸이로 집무실로 직행했다. 그대로 책상에 앉아 영지와 상단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기계적으로 두 손과 두 눈을 움직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머릿속에 아치의 울음 섞인 음성이 재생돼, 몇 번이고 깃펜을 놓아야 했다.
“고모 따위 필요 없어!”
이렇게까진 말하지 않았지만 그게 그거 아닌가. 다시 깃펜을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다, 나도 모르게 풀썩 책상에 엎드렸다.
‘기껏 살아 돌아온 고모한테, 뭐?’
내가 탄타로스에서 죽었어도 잘만 돌아갈 맥포이의 미래를 알아서 그럴까. 세상 속상해 기분이 끝없이 가라앉았다.
“가주님. 만찬 전까지라도 잠시 쉬시는 게 어떠십니까.”
그때 에리카의 목소리가 극단적인 나의 상념을 잘랐다. 여느 때처럼 건조한 음성이었지만 걱정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안다. 아무래도 죽음에서 돌아온 후, 내 정신력이 약해진 것만 같다.
‘버텨. 버티자. 평소처럼 하는 거야.’
속으로 짧게 되뇐 후, 나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아니, 됐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기계적으로 두 손과 두 눈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직 눈앞의 글자에 집중하려 애를 썼다.
‘나는 아이사 맥포이다. 맥포이 가주다. 나는 가주야. 내 할 일을 하는 거야.’
에리카는 괜찮은 척하는 제 주인에게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했다. 오늘 밤 만찬을 쉬시라고 권할 수도 없었다.
오늘은 디아시가 맥포이에 머무는 마지막 밤이었다. 마지막 만찬에 가주 대신 자리를 지키기엔, 후계자가 너무 어렸다. 게다가 멀쩡히 가주가 성에 있는데 아주 빠지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집무실엔 깃펜 사각거리는 소리,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얼마 안 가 만찬에 참석할 준비를 하기 위해 하녀들이 연회복 여러 벌과 보석함 여러 개를 집무실까지 줄줄이 이고 들어왔다.
“……오늘은 보라색 드레스가 낫겠다.”
나는 그것들을 무심히 훑어보다 답지 않게 보라색을 찾았다. 오늘의 내겐 가문의 기운, 뭐 그런 것이라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질릴 대로 질렸다며 보라색 옷이나 장신구를 질색하는 가주의 취향에 맞춰, 보라색 드레스를 모조리 폐기한 하녀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지금 당장 필요한 연회복을 뚝딱 만들 수는 없었다.
사소한 일조차 마음처럼 안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하녀들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잠시간 눈을 감았다.
머리가 빗겨지고 이어 한 가닥씩 잡아 땋는 손길은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웠다. 힘을 주어 땋아 올린 머리 위로 보석의 무게가 느껴지고, 차례대로 귓불과 어깨, 가슴에도 무게가 얹어졌다.
“다 되었습니다. 가주님.”
나는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짙은 남색 드레스를 입은 채 하얗고 투명한 보석을 주렁주렁 단 여자가 보였다. 공들인 만찬에 맞춰 내 차림새에도 한껏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평소보다 창백하고 날카로워 보이는 낯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거울을 오래 보진 않았다.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 있다면 손이 잘 맞는 하녀들 덕에 만찬까지 제법 시간이 남았다는 부분이었다.
“에리카는.”
“집무가 남았다고, 만찬장에서 뵙겠다 했습니다. 가주님.”
에리카의 비서가 대답했다.
“그럼 나는 조금 걷지.”
아까부터 답답함을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얌전히 앉아 있지 못했다.
단시간에 우울한 감성과 비관적인 생각에 찌든 나는 어울리지 않게 성을 쏘다녔고, 때마침 만찬장과 이어지는 회랑을 지나다 오랫동안 발길을 끊었던 정원을 발견했다.
“…….”
나는 충동적으로 정원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귀족의 정원이란, 정원 내 미로의 규모와 그 화단이 높다랗고 두터울수록 그 성의 재력을 나타내기도 했다. 나는 맥포이의 거대한 정원 입구에 서서 아득해 보이기까지 한 미로 안을 잠시간 바라봤다. 과연 돈 많은 맥포이의 정원은 훌륭했다.
‘누구 성인지 돈 참 많다.’
나는 뒤를 돌아 글렌에게 말했다.
“잠시 여기서 대기하라. 혼자 걷고 싶군.”
글렌은 걱정 어린 표정을 하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된다고 하기엔 제 주인은 오늘 너무 되는 일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맥포이 성은 외지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는 곳이며 경비가 삼엄했다. 특히 기사들이 돌아가며 경비를 서니, 잠시 혼자 정원을 걷는 정도라면 괜찮다는 판단이 있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정원에 발을 디뎠다.
‘오랜만이네.’
높다란 화단으로 시야가 꽉 막힌 정원을 걸으며 생각했다. 충동적으로 정원을 찾은 것치곤 건조한 감상이었다. 두툼한 화단을 벽 삼아 미로 흉내를 낸 정원은, 미로 정원이라 해 봤자 정말 미로는 아니었다.
해가 곧 지는 시간, 정원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머리를 차분하게 식히기 좋았다. 그러나 정신 건강을 위해선 이쯤에서 슬슬 뒤를 돌아 입구로 돌아갔어야 했다.
‘아치 멍청한 놈. 술래잡기를 하려면 여기서 해야지. 왜 알현실까지 와서 숨냐는 거야.’
불행히 나는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직진을 했고, 입구로부터 꽤 깊숙이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을 땐.
“하아……, 흣.”
화단 너머에서 낯 뜨거운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퍼뜩 걸음을 멈추고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흐으……!”
이런 미친.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그 소리는 누가 들어도 풍기 문란이었다. 이 뻥 뚫린 정원에서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차라리 누군지 잘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소의 활력을 되찾고 싶었고, 경험상 이럴 때 혈압을 높이는 건 효과가 꽤 좋았다.
현장을 적발하기 위해 나름대로 잽싸게 다리를 움직였다. 웬만한 기사들의 키를 훌쩍 넘는 화단을 꺾자마자 호되게 호통을 치려 했다.
“뭣들……!”
그러나 그대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인물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시뻘건 얼굴을 한 해리 폴른 경의 눈동자가 가련하게 흔들렸다. 호수처럼 푸른 눈동자에 수치심, 충격, 망연자실 따위로 파문이 일었다.
“…….”
해리 폴른 경은 누군가에게 덮쳐지고 있었다. 더 정확히는 누군가에게 멱살을 휘어 잡힌 채 입술을 도둑맞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눈꼬리에 달린 눈물방울이 툭 떨어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화룡점정이었다.
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해리의 별명이 맥포이 최고 미남이라는 타이틀과 더불어 ‘걸어 다니는 조각상’인 이유는 그가 도무지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를 안 지도 20년이던가. 한때는 저 인간 웃는 걸 보고 죽을 수 있을까 생각을 해 본 적도 있다. 그래서 저런 표정을 볼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과장 보태자면 난 해리 폴른이 눈 하나 깜짝하는 것도 못 봤단 말이다!
얼굴을 붉히고 눈물을 흘리는 해리 폴른이라니.
수치스러워하는 해리 폴른이라니.
‘꿈인가?’
게다가 입술을 빼앗기고 있는 장면치곤, 해리는 상대를 밀어 낼 생각도 못 하고 있는 듯했다.
무엇보다 그는 검기를 다루는 실력자인데 다가오는 내 기척을 빤히 알면서도 상대방을 못 밀쳐 냈다. 해리는 오히려 상대방에게 감히 손도 못 대는 사람처럼 손끝만 달싹거렸다.
그렇다면 해리를 덮치고 있는 저 여자는 누군가.
익숙한 밝은 갈색 머리는 나와 비슷하게 잘 땋아 올린 단정한 모양새였다. 그리고 저 노란 드레스 자락은 분명 아까도 봤던 것이었으며―.
“……에리카.”
열정적으로 해리에게 키스를 퍼붓던 여자가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여자의 얼굴이 천천히 나를 향했다. 감질나는 그 동작에 맞춰 내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디오 다음은 아치, 아치 다음은 에리카였던 것이다.
나는 꿈을 꾸는 사람처럼 중얼댔다.
“시모어 보좌관, 폴른 경. 둘이 왜…….”
친밀함을 넘어 끈적한 육체 교감을 나누고 있는가? 그런 건 교제하는 사람들이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어쩐지 뒷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에리카는 해리가 ‘안 됩니다, 에리카, 에리카!’ 하고 점잔을 떨 때 정원 안에 들어온 인물이 기껏해야 순찰을 도는 하급 기사라고 생각했다. 여느 때처럼 방해꾼의 입을 단속하면 된다고 생각한 그녀는 흥분한 참이라 순간 제 이름을 부른 이가 가주님이란 것도 몰랐다.
“쯧―.”
에리카는 곤란하게 됐다고 생각하며 약하게 혀를 찼다.
‘쟤 지금 혀 찬 거 맞지?’
나는 순간 열네 살 때 처음 무도회에 갔던 날, 내 언니 시프가 애들 돌보기를 자처하며 보호자로 따라왔던 일을 떠올렸다.
어느 순간부터 보호자 시프는 보이지 않았다. 무도회라는 것이 끔찍하게 지루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와 오필리아는 회장을 이탈했는데, 으슥한 정원 구석에서 격렬하게 누군가와 입을 맞추고 있는 시프를 목격했을 때의 충격이란.
혈육의 농도 짙은 애정 행각과 마주한 것은 절대로 재밌는 종류가 아니었다.
‘오히려 굉장히 불쾌했지.’
고개를 오른쪽, 왼쪽으로 격렬하게 움직이던 시프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딱 지금 에리카처럼 귀찮게 됐다는 듯이 혀를 찼었다.
나는 우습게도 그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게 그 에리카가? 심지어 금욕의 대명사 해리 폴른이랑?
“……설마 둘이―.”
“못 본 걸로 하시죠. 비밀 연애입니다.”
에리카가 충격으로 비틀대는 해리를 능숙하게 지탱하며 내 말을 잘랐다. 그러면서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어쩐지 그녀의 앞머리가 조금 축축해 보인다는 착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에리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해리가 양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바들바들 떨었다. 그는 부끄러움이 과해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해리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나대로 충격에 빠졌다. 에리카 입에서 ‘연애’가 나오다니. 머릿속에서 격렬한 인지 부조화가 시작되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에리카가 조금 뜸을 들였고 불행히 내 기억력과 관찰력은 비상했다. 이쪽으론 상상도 못 해서 그렇지.
해리가 언제부터 아치를 호위했더라. 에리카가 언제부터 아치 방을 들락날락했더라. 단순히 시모어 부인 보러 가는 줄 알았더니.
……두 사람의 연애는, 최소 5년.
“아니. 아무 말도 하지 말게.”
나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다른 손으론 손사래를 쳤다.
‘그럼 이제껏 에리카와 나눴던 진솔한 대화는 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냥 내게 맞춰 준 거였단 말인가?’
“멍청한 남정네들 따위 관심 없다며.”
나는 에리카를 향해 중얼거렸다. 제법 원망 섞인 목소리였다.
“그야, 이런 애인이 있는데 멍청하고 못생긴 놈들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해리가 두 번째로 크게 휘청거렸다.
“바빠서 가문 잇기는 틀린 것 같다며.”
“주인보다 빨리 갈 순 없죠.”
에리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 대답에 나는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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