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데드 엔딩 후에-46화 (46/139)

46.

시작은 서부 신전 소속의 늙은 고위 신관, 이디오였다. 그는 내가 농담을 뱉기 무섭게 맥포이 문을 두드렸다.

아뿔싸, 했을 땐 최악으로 기록될 하루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잠깐의 단꿈에 대가를 치르듯이.

갑작스러운 이디오의 방문에 에리카의 얼굴에도 언뜻 긴장감이 흘렀다.

서부에서 꽤나 존경받는 신관인 이디오는 내겐 그저 보는 것만으로 정신이 사나워지는 늙은이일 뿐이었다. 그는 심지어 괴팍한 내 말투를 버티지 못해 내 앞에서 말을 더듬지 않고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여러모로 답답한 인간이라 되도록 얼굴 들이밀지 말라고 명했던 것이 벌써 수년 전이었다. 그런 그가 기별도 없이 날 알현하겠다고 불쑥 맥포이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사실 이디오가 무슨 일로 날 찾아왔는지 짐작은 됐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에리카 손에 넘기지 않고 몸소 움직였다.

발 빠른 내 걸음걸이에 맞춰 알현실의 거대한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양쪽으로 열렸다. 넓디넓은 홀에 덩그러니 서 있던 늙은이가 흠칫 몸을 떠는 게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무시하고 곧장 홀의 가장 높은 곳, 맥포이 가주의 자리로 직행했다.

마침내 성주의 자리에 앉아 내려다본 이디오는 역시나 특유의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술 더 떠 뚝뚝 떨어지는 땀을 연신 닦아 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쯧, 혀 차는 소리가 절로 났다.

운을 띄우려던 이디오가 다시 한번 푸드덕댔다. 곧 겨우 정신을 차리고 예를 갖춘 뒤에 그가 드디어 본론을 토했다.

“가, 가주님, 모퍽 가문이, 남부 신전에 그…… 파혼 재판을, 요청했습니다.”

저런 인간이 존경받는 고위 신관이라니. 더듬거리는 말투는 물론이요,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는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국엔 중앙의 대신전을 중심으로 주요 도시에 있는 네 개의 신전을 포함해 총 다섯 개의 신전이 존재했다. 보통 신자가 가까운 사원이나 신전에 청한 재판이 합당하다 판단되면, 그 건은 대신전으로 가게 되었다.

남부는 필립이 자고 나란 모퍽 가문의 영지가 있는 땅으로, 그가 태어나 세 번째 이름을 받은 곳 역시 남부의 신전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모퍽 가문과 그나마 인연이 있는 신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신전과 신관에게 그간 내가 퍼부은 돈이 있었다. 신전 입장에서 이름 받은 신자야 거리에 나가면 발에 치이는 수준이다.

신전은 당연히, 물주의 눈치부터 보았다. 그들은 독실한 신자라고 주장하는 모퍽의 재판 요청을 무시하고 내게 달려왔다.

물론 이러려고 그간 돈을 부은 것이 맞았다.

맥포이 가주에 대한 종교적 음해와 고발 등은 보통 지역 신전의 하급 신관 선에서 해결되었다. 맥포이는 신전의 가장 큰 후원자였기 때문이다.

“메헤라를 모시는 자라면 응당 맥포이의 은혜를 아니, 얼토당토않은 모퍽 가문의 요청을 다, 당연히 물렀지만……. 무, 문제는…… 그것이.”

하급 신관 선에서 척척 해결하던 일들에 고위 신관이 직접 나섰다는 건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계속하라.”

“고귀한 맥포이 가주님께…… 송구하여 감히 이 어리석은 자가 입을 못 열겠으나…….”

“줄여 말하라.”

결국 내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네, 넵. 무, 문제는 모퍽가가 그 뒤로 신전 앞에서 보란 듯이 억울하다며 소란을 피웠고, 이를 본 눈이 많습니다. 가, 가주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신전이란 제국민의 억울함을 들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것이…….”

이디오가 또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런 그를 향해 나는 이번엔 왼 눈썹을 치켜떴다.

“그, 그러니 제 말은 제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모퍽 편을 들었다간…….”

신전 재판은 꽤 재미있는 볼거리였다. 특히나 귀족 대 귀족의 재판은, 아주 흥미진진한 유흥거리였다. 그들은 억울한 사연을 들어 주라고 모퍽 편을 드는 게 아니었다.

“신전은 신자들 눈치도 봐야 하는 입장이니, 그대들 입장 봐 달라는 말이 하고 싶나?”

“무, 물론 신전은 어디까지나 맥포이 가주님의 편입니다. 맥포이와 신전의 결속은, 견고하니까요.”

“하!”

나는 코웃음을 참지 않았다. 이디오가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웃기고 있네. 신자들 잃기 싫고, 돈도 계속 받아먹고 싶다 이 말 아닌가.

“……내게 받아 처먹은 돈이 얼만데.”

음산한 나의 목소리에 이디오가 다시 푸드덕 고개를 들었다. 총기를 한참 전에 잃은 그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듯이 흔들렸다.

“이런 일 하나 알아서 처리하지 못해 내 앞에서 우는 소리를 하는 건가? 그것도 그따위 말도 안 되는 파혼 사유를 가지고? 순결이 어쩌고 저째!”

순결 어쩌고에서 분노가 급히 차올라 내 목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가, 가주님. 그런 것이 아니오라―.”

“닥치게.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모퍽은 무시하라. 당장 돈줄 끊기면 나보다 급한 건 자네들이면서 무슨 자신감이지?”

“그…… 그렇다면 어, 언제까지 버티면 되겠습니까? 모퍽이 워낙 강경하게 나와―.”

“이디오.”

더 이상 들어 주지 못할 핑계라 나는 그의 말을 끊어 버렸다. 이디오는 다행히 눈치는 나쁘지 않았다. 그는 합, 입을 다물고 숨을 죽였다.

“제국에서 오래된 귀족의 위세가 두렵긴 하겠다만, 감히 내 앞에서 모퍽 두렵다는 소릴 하다니. 그대 앞에 있는 내가 누구지.”

“매, 맥포이, 가주님이십니다.”

“완전히 미친 줄 알았는데 다행히 아직이군. 내가 됐다 할 때까지. 길게 안 걸리네. 모퍽이 찾아와 무슨 지랄을 하든 무시하라.”

“예, 예! 가주님. 남부엔,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나와 필립의 파혼이 신전 재판으로 가면 아주 재미없을 거야. 잘들 해.”

내가 마지막으로 엄포를 놓을 때였다.

댕강― 소리와 함께 홀 구석에 놓인 청동 방패 장식이 쓰러진 것이. 청동 방패가 잘 세공된 대리석 바닥과 쨍강 맞부딪히며 기다란 울림을 주었다.

나와 이디오를 비롯해 알현실에 있던 모두가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쪽을 돌아봤다.

방패가 있던 자리에서 동그란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 자그마한 머리통은 불행히도 붉은빛이 도는 금발이었다.

“젠장…….”

나는 침음에 가까운 욕지기를 뱉었다. 맥포이 성을 제멋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 중, 붉은 금발은 딱 하나다.

‘아치 맥포이.’

아기 시절부터 까꿍을 좋아하던 아치는 널따란 맥포이 성을 무대로 일명 ‘술래잡기’를 하며 자랐다. 다 큰 척하지만 또래 친구가 없는 아치는 아직도 종종 하급 기사들을 데려다가 술래잡기를 하고 논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상대가 기사들 말고는 마땅히 없어 자주 못 해서 그렇지.

오늘은 도대체 누구와 망할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구석에 숨어 있는 꼴을 보니 아치가 숨을 차례인 듯했다.

‘다 들었나? 저 뒤로는 또 어떻게 들어간 거야. 아니, 그보다 쟤 수업 있지 않나? 오전에 뭐가 있을 텐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을 때 아치가 이쪽을 향해 음산하게 고개를 돌렸다. 되바라진 아치의 눈과 딱 마주친 순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더욱 목을 뻣뻣하게 세웠다.

이디오는 저래 봬도 늙은 너구리였다. 성격이 불같은 고모와 사춘기 조카의 폭풍 전야를 감지한 그는, 슬그머니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춘 후 민첩하게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마음 같아선 나 역시 그대로 이디오 뒤를 따라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고모오오!”

이디오가 눈치껏 퇴장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치가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방금 무슨 소리를 한 거야! 모퍽이, 파혼? 가아암히?”

쥐방울만한 아치는 꽤나 노여워 보였다. 내가 지금 들은 게 가당키나 한가? 필립 모퍽 따위가? 감히?

아치에게서 맥포이가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오만한 분노가 엿보였다.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이라 품위를 지키라고 딴지를 걸기도 뭐했다.

내가 아치에게 모퍽 이야기를 하지 않은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파혼 사유가 저급해 아이 정서에 좋지 못하다는 이유다. 몹쓸 짓을 당했다는 둥, 순결을 잃었다는 둥 하필이면 추문이라 애한테 설명하기 난감한 것들이었다.

둘째, 모퍽 따위에게 ‘맥포이’가 파혼을 당할 위기라는 게 너무나 쪽팔렸다. 하나뿐인 피붙이에게 웬 쭉정이에게 파혼장을 받았다고 털어놓기엔 뻣뻣한 대귀족의 자존심에 생채기가 났다.

이 두 가지로도 충분히 함구해야 할 사항이라, 아치에겐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뒤에 되도록 완만한 단어를 골라 알려 줄 생각이었다. 적어도 이 상황을 역전시켜 맥포이가 모퍽에게 파혼을 날리는 시점에 말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아치 이 녀석이 말을 트고 나서 한 성깔 하는 것도 하는 것인데, 그 말솜씨가 보통 매운 것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잔소리가 대단했다. 특히 제 고모에게.

“넌 몰라도 되는 문제다.”

잔소리 폭격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앞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그러나 ‘넌 몰라도 돼’는 아치가 요즘 가장 질색팔색하는 말이었다. 아치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아치가 악! 포효했다. 상상 이상의 버릇없음에 모두의 눈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또, 또 그런다! 고모는 맨날 그런 식이야! 이번엔 언제 알려 주려 했어?”

저렇게까지? 하는 생각도 잠시였다. 노마와 앙투아네트의 등장으로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 아치와 이 비슷한 문제로 냉전 중이라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치는 펄쩍펄쩍 뛰며 ‘말도 안 돼’로 시작해 ‘맥포이가 이런 수모를’, ‘순결은 또 무슨 소리’,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고 와다다 쏘아붙였다.

그러나 당장 아치에게 답을 해 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이 고모가 탄타로스에서 살아 돌아온 일로 추문이 생겼는데 그게 뭐냐면―.

신전 재판에 넘어가면 보복이 어려워지니 그 전에 모퍽과 그 애인을. 아, 모퍽에게 애인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일렀다. 아치가 조숙한 척해 봤자 고작 열한 살이었다.

“넌 그저 얌전히,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이 고모가 하는 말만 따르면 된다.”

고르고 골랐지만 내겐 이게 최선이었다. 순간 아치의 얼굴에 배신감, 상처 따위가 스쳤다. 아치는 황망히 벌어진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열기를 반복했다.

“……이런 보호자 따위.”

마침내 아치의 앙다문 입술 사이로 원망 가득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필요 없어.”

내가 미처 어떤 반응을 하기도 전에 아치는 예를 갖추지도 않고 그대로 알현실을 벗어났다.

“필요 없어.”

순간 발밑에 길게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것을 애써 못 들은 척했다. 일종의 자기 방어 같은 거였다.

에리카는 도련님의 언행에 적잖이 놀라 반사적으로 제 주인을 돌아봤다가 숨을 죽였다. 그때의 가주님 표정은,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주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딱 두 개만 뽑으라면, 가문과 아치 도련님일 것이다. 가주님께서 제 목숨에 집착하는 이유도 결국엔 가문과 도련님 때문이었다.

스스로 좋은 보호자가 아니라며 자조 섞인 농담을 종종 하시지만 가주님이 아치 도련님에게 퍼부은 헌신과 사랑은 어마어마했다. 그런 가주님께 방금 도련님의 발언은 꽤나 충격적일 것이다.

물론 ‘필요 없다’는 말이 진심이 아니라 원망 섞인 투정이란 것은 가주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가주님의 표정은 어쩔 수 없이 아주 일그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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