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앙투아네트는 신기하게 기척을 숨길 줄 압니다. 그래서 부끄럽게도 방을 빠져나간 것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노마는 걱정하는 듯 보이기도, 은근히 뿌듯해 보이기도 했다.
“아니 그럼, 오늘도 애가 방을 나가면 어쩝니까? 어제는 제 방에 와서 다행이지.”
나는 노마의 허벅지에 자리 잡은 앙투아네트를 쳐다보며 자못 심각한 투로 물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앙투아네트는 순진한 척 눈을 깜빡이다 노마의 다리에 얼굴을 묻었다.
“……앙투아네트가 걱정되시나요.”
노마가 어쩐지 묘한 얼굴을 하고 당연한 것을 물었다.
“그럼요. 이렇게 작아선. 길이라도 잃으면 큰일 아닌가.”
맥포이 본성은 매우 크다. 게다가 앙투아네트는 그 노마 ‘디아시’가 아끼지 않나. 혹시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골치 아팠다.
“그럼―.”
노마가 느릿하게 운을 띄웠다. 그에 맞춰 그의 입매도 슬쩍 올라갔다.
여느 때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노마 디아시는, 실은 생각지 못한 방해꾼의 등장 이후로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롬닥의 가노라는 자의 견제가 어찌나 심한지, 그가 온 후로 아이사를 만나긴커녕 그녀의 뒷모습 보기도 힘들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왔건만 이렇게 허망할 수 없었다.
그래도 만찬 때는 그녀를 만날 수 있겠지, 했지만 상단에 일이 생겨 늦는다던 그녀는 어제 끝내 만찬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때 노마 디아시가 느낀 감정을 서술하자면 과장해서 인생의 두 번째 쓴 맛과 같았다.
아이사 대신 그녀의 수석 보좌관이 직접 유감을 표하며 값진 것들을 보내긴 했다. 하지만 그녀를 보지 못해 넝마가 된 마음은 고작 선물로 달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이렇게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은 사람인 줄 몰랐다. 바쁜 아이사 님을 두고 이런 기분이나 느끼다니.’
좋아한다는 마음을 자각하고, 처음엔 그저 그녀 가까이에 있기만 해도 소원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가까이 있으니 매일 보고 싶고, 얼굴을 마주하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고, 닿고 싶었다. 멋대로 움직이려 드는 손끝을 자제하기 어려웠다.
그녀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도 아무래도 좋다며 맥포이에 온 노마였다.
‘필립 모퍽의 서신.’
그러나 아이사의 약혼자가 그녀에게 서신을 보냈다는 것을 알았을 땐 새삼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엿들으려 한 건 아니지만 그녀의 보좌관이 귓속말로 전하길 분명 필립 모퍽, 그녀의 약혼자에게서 온 서신이었다.
노마는 약혼자가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 하나로 심장께의 통증을 경험했다.
편지를 받은 그녀의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엿들은 걸 가지고 그녀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자신은 아직 그녀에게 그런 것들을 물어볼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노마는 맥포이에 오고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주 무서운 일이라는 사실을 매초마다 깨닫고 있었다.
만찬장에서 그녀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깨진 후, 노마는 시무룩해서 방에 돌아왔다.
헛헛한 기분에 앙투아네트를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앙투아네트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그러다 가주님 침실에서 발견되었다고 들었을 땐 기겁했다. 혹시 아이사 님이 앙투아네트의 제멋대로인 행동에 화가 나시지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그녀는…….
‘앙투아네트는 정말 복덩이인가.’
노마는 앙투아네트가 만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가 활짝 웃으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앙투아네트는 가주님 옆에서 자고 싶은 것 같습니다.”
“제 옆이요?”
노마가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디아시는 앞으로 맥포이에 이틀 밤을 더 머물지 않습니까.”
부드럽게 휜 눈꼬리 아래에 반달로 보이는 금안이 어느 때보다 반짝이는 듯했다.
“그렇죠.”
“남은 이틀 밤. 가주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앙투아네트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노마가 빙긋 웃었다.
“…….”
정말 뜬금없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안 될 건 없었다. 오히려 바로 그래요, 라고 할 뻔해서 어느 때보다 표정 관리에 힘을 써야 했다.
앙투아네트는 몹시 귀여운 생명체였으며, 심지어 나를 잘 따르는 아기 맹수였다. 무엇보다 앙투아네트를 데리고 자면 최근 심해진 악몽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물론 제가 아침에 데리러 가겠습니다. 가주께선 바쁘시니.”
내가 대답이 없자 노마가 걱정할 것 없다는 듯이 덧붙였다. 물론 그 문제야 사용인을 시키면 되기 때문에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가주 된 자가 아기 맹수의 귀여움에 두근두근하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을 뿐.
“앙투아네트는 아무에게나 안기지 않으니까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노마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뭐, 좋습니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선심 쓴 사람처럼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노마가 영광이라고 말하며 매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전부터 느낀 것인데 노마는 뭐든 열렬히 반응하는 편이라 그에겐 뭔가 해 주는 보람이 있었다. 그가 활짝 웃으며 기뻐하는 모습에 뿌듯함이 조금 차올랐다. 나는 조금 상승한 기분을 숨기며 한껏 도도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때 노마가 의미 모를 말을 뱉었다.
“맥포이에 오면 자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뭐를요?”
그 목소리가 제법 가련해, 나는 조금 식겁해서 물었다.
“가주님을요.”
노마가 무슨 당연한 말을 묻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자주 보지 않습니까. 어제는 만찬에서도 보고.”
“결국 못 오셨잖습니까.”
“아……. 갑자기 상단에 일이 생겨 제가 정신이 없었군요.”
어제 막 만찬장으로 향하려는데 가노의 수하들이 큰일 났다며 헐레벌떡 찾아오는 바람에, 나는 그길로 다시 집무실로 돌아가야 했다.
노마는 그러면서 그 외에 몇 번을 뵈려 했지만 엇갈렸는지 만날 수 없었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털어놓았다.
‘가노군.’
노마가 날 찾아왔었다고 한 시간은 모두 가노가 꿰차고 있었다. 그리고 난 노마가 나를 찾아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하여간 나잇값 못 하고 그새 장난을 쳐 놨네.’
“귀한 손님을 모셔 놓고 면목 없습니다. 아무래도 손님맞이할 손이 없군요. 혹시 급하게 제게 할 말이 있다면 제 보좌관에게 말하시면 됩니다.”
“……가주님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내 친절한 배려에 노마가 유독 시간 차를 두고 대답했다.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해서 나는 가만히 그를 기다려 주었다.
‘서로 도운 것으로 퉁치기로 했지만, 어쨌건 그는 내 은인이니까.’
곧 노마가 결연한 표정을 하고 입을 열었다.
“남은 이틀도 이 시간에 저와 차를 마셔 주시겠습니까?”
“어…….”
또다시 생각지 못한 부탁이었다. 나 되게 바쁜 사람인데?
“제가 정말 가주님의 귀한 손님이라면, 제게 그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노마는 가끔 의미심장하게 말을 해서 그 의미를 깨닫는 데 시간이 걸렸다.
“제가 은인이라고 하셨지 않나요.”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노마가 재차 속삭였다. 노마는 그새 서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건……. 비긴 걸로 하자고 했지 않나.”
나는 희대의 나쁜 여자가 된 기분을 느끼며 변명처럼 중얼댔다. 노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금안이 마치 ‘그래서 안 된다고?’ 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 노마 디아시 말이 맞다. 내가 손님 대접을 못 하긴 했지. 이대로 보내면 면이 안 서긴 하겠다.
“알겠습니다.”
노마가 언제 서러웠냐는 듯이 화색을 띠었다.
“대신, 일반적인 티타임처럼 오래는 못 있습니다. 앙투아네트 데려가실 때 아침 식사를 같이하죠. 밀란 공께도 잘 말씀해 주세요.”
“아버지께선 아침 식사를 안 하십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마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람 좋게 눈꼬리를 휘면서 말이다. 너무나 빠른 거절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아버지께선 평소 아침을 거르십니다. 맥포이 공자는 하루를 늦게 시작하니, 가주님과 저. 단둘이 식사하면 되겠네요. 저는 아주 좋습니다.”
노마가 가슴에 살포시 손까지 얹고 말했다.
“뭐……. 그럽시다.”
나는 엉겁결에 대답했다. 뒤늦게 이번에도 제대로 말렸다는 기분이 들었다.
에리카는 흐린 눈으로 가주님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그녀는 제 주인이 본성에서 아침 식사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노마는 몹시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앙투아네트를 쓰다듬었다. 아침 약속을 쟁취한 그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
사물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고, 마침내 협탁에 흐트러진 종이들이 보였다.
“그런데―.”
노마가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예? 또 뭡니까.”
“이……. 초상화들은 뭔가요?”
노마가 여전히 협탁 위를 보며 물었다.
‘망할 에리카.’
협탁엔 에리카가 추려 온 부군 후보들의 초상화와 이력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에리카를 노려봤고 그녀는 어깨나 으쓱하며 뭐 어때요, 하는 표정을 했다.
“아주 어린……. 공자들의 초상화군요.”
노마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의 순수한 감상에 나는 대번에 수치스러워져,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하……, 역시 결혼하지 말까.’
* * *
harbaragi_syk
앙투아네트의 효과는 대단했다.
나 아닌 다른 존재의 체온이나 숨소리, 뭐 이런 게 필요했던 건가. 최근 매일같이 악몽에 시달렸던 나는 오랜만의 숙면에 얼떨떨하기까지 했다. 간만에 머리가 가벼웠다.
“요 녀석. 정말 효과가 있을 줄이야.”
나는 여전히 침대에 파묻힌 채로 손만 움직여 앙투아네트의 엉덩이를 칭찬하듯이 두드렸다.
“진짜 귀엽긴 하네. 어디 안 간 걸 보니 진짜 나랑 있고 싶었구나?”
앙투아네트가 고롱고롱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너 여기서 살면 좋겠다. 네 숨소리가 수면제보다 낫다.”
나는 잠이 덜 깬 사람처럼 중얼중얼, 앙투아네트에게 한동안 말을 걸었다.
약속처럼, 노마가 앙투아네트를 데리러 왔다. 자연스럽게 노마와 아침 식사를 함께 하기 위해 그와 본성을 거닐었다.
그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아 간간이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내 기억으론 디아시의 엄격한 가칙에 식사 중 잡담은 안 될 텐데, 그랬다.
‘이상해.’
며칠 전 팔자에 없는 티타임을 가졌던 것처럼, 잔잔한 아침 식사는 내게 너무 생소했다. 평화롭고 여유로운 분위기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것 빼고는 정말 꿈을 꾸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내겐 비일상적인 아침이라, 어쩐지 몽롱하기까지 했다.
식사를 마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날 때, 따라 일어난 노마가 ‘그럼 오늘도 수고하세요. 아이사 님’ 하고 귀에다 속삭인 것까지.
아주 비현실적이었다.
노마는 저가 먼저 이상한 짓을 해 놓고 뒤늦게 귓바퀴를 붉혔다. 간만에 카탐 때가 생각나는 노마의 행동에 내 안면도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해. 이상해.’
나는 그길로 곧장 집무실을 박차고 들어갔다. 글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따랐다. 커다란 보폭으로 내 자리, 상석에 앉은 후에야 정신이 좀 들었다.
“내가 무슨 여유를 부리고 있담. 폭풍 전야가 아니고서야 내게 여유가 있을 리가.”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자조적인 혼잣말을 내뱉었다.
아이사의 말에 에리카가 미간을 묘하게 구겼다. 가주님의 농담은 재미없다. 심지어 농담이 씨가 될 때가 많았다.
운수 나쁜 날의 서막이 올랐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