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가노?’
서고 구석에 있던 에리카는 흥미진진한 대화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그래도 디아시는 디아시더라. 인간이 아닌 것처럼 아름답다더니, 진짜였어. 어떻게 그렇게 생겼지?”
하녀2가 다시 생각해도 황홀하다는 듯이 말했다.
에리카도 그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 똑같은 얼굴이라도 니콜라스 디아시는 냉한 구석이 있었지만, 항시 방긋 웃고 있는 노마 디아시는 인간 햇살과 같아 파괴력이 남달랐다.
“어머, 넌 의리도 없다! 가노 님은 우리 맥포이 식구잖아!”
하녀1이 하녀2를 가볍게 타박했다.
“야, 그 얼굴에 그 체격인데 그럼. 객관적으로 어쩔 수 없다고. 그리고 가노 님이 어떻게 맥포이 식구야. 가노 님은 제국민도 아니잖아.”
“난 그래도 가노 님의 터질 듯한 근육, 배 위에서 태운 어두운 피부가 좋아. 진정한 남자의 미는 가노 님이라고 생각해. 디아시 경은 보는 것만으로 경건해져서 그분과 손을 잡는 상상만 해도 죄지은 기분이야.”
하녀3이 끼어들었다. 제법 진지하고 엄격한 목소리였다.
‘정말 별 이야기를 다 하는군. 뭐, 당연한가.’
에리카는 뻑뻑한 눈을 감고 점점 격해지는 그들의 수다를 가만히 듣기만 했다.
어제오늘 맥포이는 두 남자의 기 싸움으로 소란스러웠다. 누가 봐도 가주님을 두고 하는 기 싸움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것을 그저 나잇값 못 하는 가노의 질투 행각으로 치부해 버렸다.
하녀3과 같이 가주님이 노마 디아시를 아주 신화나 동화 속에 나오는 인물로 본 결과였다. 하녀3은 적어도 그와 손을 잡는 상상이라도 한 모양인데, 가주님은 이쪽으론 상상력이 너무나 부족했다.
두 남자의 기 싸움도 단순히 가노가 싸움을 거니, 노마가 받아 준다고 생각하시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에리카가 보기엔 아니었다. 노마 디아시는 진심으로 기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며, 진심으로 우리 가주님을 꼬시고 있다.
‘눈치가 빠르시다고 하지만…… 이쪽으론 너무 순진하시다니까.’
가주님은 남들 다 하는 연애나 휴식, 뭐 그런 일상적인 것들을 하면 큰일 날 것처럼 굴곤 했다. 그래서인지 이쪽으로 상상력이 많이 부족했다.
‘가주님을 마음에 둔 두 남자만 고생이지 뭐.’
특히 가노는 옆에서 보아 온 세월과 가주께 들이댄 역사가 있어, 제삼자인 에리카가 보기에도 퍽 안타까웠다.
‘그냥 하던 대로 여러 여자와 가볍게 만나고 다닐 것이지. 어쩌다 우리 가주를 마음에 둬 가지고 팔자에 없는 순정남 행세를 하는지.’
가노가 정확히 언제부터 방탕한 생활을 넣어 두고 아이사 주변을 맴도는지는 정확히 몰랐다. 에리카가 기억하기론 대강 아이사가 성인이 되고 갑작스럽게 약혼을 한 후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노의 방식과 그의 배경으론 가주님을 함락하기 어렵다.’
아이사는 연애 방면으론 아치보다 어리고, 스스로 정한 강박적인 규칙을 고수하는 사람이었다. 불타는 사랑부터 들이댈 게 아니라, 차라리 논리적으로다가 자신을 옆에 뒀을 때 아이사가 얻게 될 이득을 나열하는 편이 그녀의 옆자리를 꿰차기 쉬울 것이다.
가노도 그걸 모르진 않겠지만, 그는 자존심이 센 불같은 성정 탓에 제 감정 하나 숨기기 어려워했다.
그때 하녀1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더 가깝게 들렸다.
“아! 아니다. 맥포이는 해리 폴른 경이지! 어차피 한 명은 디아시 가문, 다른 한 명은 외국인이잖아. 나는 매일 볼 수 있는 해리 폴른 경!”
에리카가 드르륵, 의자 끄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불쾌한 티가 역력한 행동이었다.
“히익!”
“꺄악!”
“헉! 시, 시모어 보좌관님.”
하녀1, 2, 3이 귀신을 본 사람처럼 비명을 내질렀다. 에리카는 그들을 차갑게 노려봤다.
* * *
harbaragi_syk
며칠째 악몽이 계속됐다. 악몽이라는 자각이 들어 깨어나려 했으나 가위에 눌린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식은땀이 잠옷을 흠뻑 적시고 나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헉, 허억.”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천천히 호흡을 가라앉혔다.
‘하……. 요즘 정말 미쳤군.’
물이라도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상체를 들어 올리려 할 때였다.
배 위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가벼웠지만, 존재감 있는 무게가.
“……?”
나는 눈알을 굴려 배 쪽을 힐끔 내려다봤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너무 놀라면 비명도 못 지르는 법이다.
“…….”
나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내 배 위에 둥글게 몸을 말고 있던 것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그대로 내 얼굴을 향해 달려들었다.
“……뭐, 뭐약!”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나는 쿵, 침대에서 굴러떨어졌고 나의 비명에 쾅, 하고 침실 문이 열렸다.
“가주님! 무슨 일이십니까아아!”
동시에 아침 댓바람부터 쩌렁쩌렁한 글렌의 목소리가 침실에 울려 퍼졌다.
감히 맥포이 가주를 기습한 앙투아네트가, 침대 아래로 꼴사납게 고꾸라진 나의 가슴 위에 당당히 발을 디뎠다.
“아니! 역시 저 맹수는……!”
바닥에 널브러진 나를 본 글렌이 매우 분노해서 달려왔다. 앙투아네트가 날 헤치려는 줄 안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새 맥포이 성에 적응했는지 앙투아네트는 험악하게 다가오는 글렌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앙투아네트가 내 가슴팍을 밟고 서서 까슬한 혀로 내 볼을 핥아 올렸다.
나는 천진난만한 아기 맹수를 감싸며 급한 대로 손바닥을 들어 올려 글렌을 막았다. 멈칫한 글렌이 안절부절못하고 내 쪽을 살폈다.
“어떻게 들어왔냐.”
내가 인상을 쓰며 묻자 앙투아네트는 애교로 무마하려는 듯이 내 턱에 고개를 비볐다.
“가주님, 아침부터 이게 무슨…….”
그때 에리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언뜻 봐도 밤을 새운 몰골이었다.
“디아시 경이 데려온 맹수 아닙니까? 어젯밤 그 맹수와 같이 주무시기라도 했습니까?”
“나도 모르겠다. 그 전에 아무나 나 좀 일으켜 줄래?”
하여튼 에리카는 은근히 괘씸했다.
몸을 세운 나는 에리카를 한 번 흘겨본 뒤 앙투아네트를 내려 봤다. 앙투아네트는 그새 내 발등에 앉아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 웃겨서 진짜. 순진한 눈으로 날 보는 모습이 꼭 제 주인 같아서 픽 웃음이 나왔다.
“귀엽긴 한데……. 너 때문에 내 기사들이 벌을 받게 생겼구나.”
아무리 아기 맹수라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침입자가 생기자 글렌은 아까부터 죽상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죽여 주십시오, 가주님!’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어디인가.
나는 몸소 허리를 굽혀 앙투아네트를 안아 올렸다.
“아무나 얘 좀 디아시 경에게 데려다줘라.”
글렌이 앙투아네트를 건네받으려 했다.
앙투아네트가 사나운 맹수가 된 건 그때였다. 글렌이 제게 손을 뻗자 앙투아네트가 하악질을 하며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
겁에 질린 앙투아네트가 내 침의 자락을 물고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하……. 디아시 가문 사람을 불러와라. 아, 그 바인스 경인가 뭔가. 그자가 먹이 담당이라 했으니, 그자 찾아와라.”
“가주님. 오늘 일정이 빠듯합니다. 이만 준비하시는 게―.”
에리카의 재촉에 나는 난감함을 느끼며 앙투아네트를 내려다보았다. 얠 어쩐다.
“……일단 내가 데리고 갈 테니, 바인스 경 찾아다 집무실로 보내라.”
나는 쯧, 혀를 차면서도 앙투아네트에게 다시 손을 뻗었다. 글렌에게 자신을 넘기려 한 일에 배신감이라도 느꼈는지 앙투아네트는 조금 머뭇거렸다.
“내가 잘못했다. 이리 와.”
아치 대하듯 어른 것은 정답이었다.
* * *
harbaragi_syk
“뭘 놓친 거 아니야? 그 음침한 놈이 진짜 사랑 때문에 가문에서 쫓겨나는 걸 감수할까.”
에리카가 들고 온 소식은 내가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면목 없습니다, 가주님. 접촉한 인물의 범위를 조금 더 넓혀 보겠습니다.”
“시간 없으니 서둘러. 까딱 신전 재판으로 가면 우리 식으로 괴롭히기 어렵다.”
“예, 가주님.”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무의식적으로 앙투아네트의 턱을 쓰다듬었다.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게 새로운 맥포이 가주 부군 후보인가?”
나는 얄팍한 종이 뭉치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네. 저번보다 후보가 더 적은 이유는, 아무래도 가주님 또래의 공자들은 다들 결혼한 지 한참이라. 약혼한 자도 제외하다 보니 연령대가 좀…… 낮아진 감이 있습니다.”
“……적어도 성년식은 치른 자들이면 하는데.”
내가 흐린 눈을 하고 중얼거렸다.
“따지자면 곧 치르는 자들입니다.”
에리카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 회의감이 심히 들어 그냥 결혼하지 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 추천은 아무래도―.”
에리카가 꿋꿋하게 얄팍한 종이 뭉치를 넘기며 공자 하나를 추천하려고 할 때 똑똑,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바인스 경이 왔나 보군. 생각보다 늦었어.”
내가 문을 열어도 좋다는 의미로 문을 지키는 기사를 향해 턱짓하며 앙투아네트에게 손을 뻗었다. 문이 열리고, 앙투아네트가 내 허벅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
그리고 문간에는 예상치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나는 뜻밖의 인물을 보다 앙투아네트를 내려다봤다.
‘기사를 보내지 않고 직접 오다니. 너 되게 예쁨받는 애구나.’
앙투아네트가 문간에 선 남자를 발견하고 폴짝 뛰어올랐다. 미련 없이 내 허벅지를 떠나는 앙투아네트의 뒷모습에서 기쁨이 느껴졌다.
문간에 선 남자가 번개처럼 제게 달려온 앙투아네트를 조심히 안아 올렸다.
‘아침부터 뭘 저렇게까지.’
앙투아네트를 데리러 온 사람은 노마 디아시였다.
그는 편안한 차림이었지만 어째 평소보다 더 공들여 꾸민 느낌이었다. 근육 잡힌 몸이 슬쩍 드러나는 그의 차림새는 단정하면서 맵시 있었다.
맥포이에 온 손님답게 자수정 장식을 더한 것도 꽤나 흡족한 부분이었다. 평소보다 이마를 조금 더 드러낸 모습은 은근히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에리카는 저놈이 오늘도 작정을 했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가주님. 좋은 아침입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노마가 발그레한 볼을 하고 나를 향해 아침 미소를 발사했다.
“……네. 좋은 아침이네요.”
악몽과 필립 문제로 잡쳤던 기분이 우습게도 풀리는 것만 같아 나는 인상을 조금 썼다.
에리카가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노마에게 예를 갖추고 뒤로 물러났다. 나는 그에게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앙투아네트가 가주께 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겠나요.”
노마가 가련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네, 뭐. 괜찮습니다.”
“간밤에 가주님을 찾아 침실까지 찾아간 듯합니다. 아무래도 머무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가주님을 더 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앙투아네트가 머무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앙투아네트는 똑똑해서 다 압니다. 그러니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노마의 얼굴은 꽤나 진지했다. 그는 한술 더 떠서 입에 검지를 대고 앙투아네트의 눈치를 보는 척했다.
그 모습이 조금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말았다.
‘나보다 머리 두 개는 큰 남자가 뭐가 귀엽다고……?’
그러고는 곧바로 정색을 했다. 스트레스가 과한 탓이라며 자신을 다독이는데 노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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