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나는 결국 인상을 찌푸렸다. 가노는 개의치 않아 했다. 그는 내가 에리카를 물릴 때 함께 물러가라 해도 ‘잠시만’ 하고 빙글빙글 웃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기어코 내가 집무실을 나설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매우 거슬렸지만 매사 능글맞게 구는 가노에겐 무시가 답이었다. 가노가 은근슬쩍 내게 가까이 들러붙을 때마다 글렌이 알아서 떼어 놓기도 했다.
물론 얼굴에 철판을 깐 가노는 글렌이 역정을 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진지한 척 표정을 굳히며 ‘롬닥 기밀이니 맥포이의 도그만 경은 빠져라’ 하고 말해 글렌의 혈압을 높였다.
‘하여간 싸가지.’
그때 가노가 지치지도 않는지 또다시 치대 왔다.
“가주.”
이놈과 맺은 맹약에 존대를 추가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건드니, 이제는 정말 귀찮게 구는 삼촌 또는 사촌 오라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존재이기도 했다.
“아오, 좀! 꺼져라!”
“싫어.”
결국 참다못한 내가 그의 턱을 팍 밀며 성질을 냈다. 그러나 그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단칼에 거절했다.
나는 그제야 걸음을 잠시 멈춰 그 능구렁이 같은 낯짝을 돌아봤다.
“이제야 돌아봐 주네.”
가노가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봤다. 그가 하루 종일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모퍽과 내가 날치기로 약혼했을 때, 딱 일주일 정도 이랬던 거 같은데.’
그때도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물어보면, 상단 일에 대해 상의할 일이 있다며 조금 이따 말할 테니 신경 끄라고 해서 내버려 뒀다.
귀찮았지만 지금 가노를 억지로 떨어뜨려 봤자 그대로 노마를 찾아가서 행패를 부릴 것 같았다.
‘멍청한 놈. 견제할 대상을 한참 잘못 찾았어. 노마 디아시가 알면 얼마나 어이없어 할까. 그는 누구에게나 순하게 군다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조금 한숨이 나왔다.
“손님 있는 남의 집에서 버티지 말고 그렇게 한가하면 자네도 나가서 정보원이나 더 굴려 봐. 모퍽과 랑드라이의 약점을 찾아오면 상을 내리지.”
“상?”
앞에 말을 듣긴 한 건지, 가노는 ‘상’에만 반응하는 사람처럼 되물었다.
“그래. 그러니 여기서 이렇게 노닥거리지 말고 모퍽과 랑드라이 뒤나 캐 보라.”
“그거라면 여기서도 할 수 있는 일인데.”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선 가노가 건들건들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이 새삼 양아치 같아, 나는 휙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내가 약점을 찾아오면 상은 뭐야?”
가노가 내 뒤에 바짝 붙어 서며 물었다.
“뭐, 모퍽에게 약혼 선물로 준 땅을 돌려받아다 갖든가. 자넨 가지고 싶은 게 많잖아. 그중에 하나 해.”
나는 무난한 것을 중얼거렸다.
“……흐음. 가지고 싶은 게 많기야 하지.”
가노는 어느새 내 옆에 나란히 서 보폭을 맞춰 걸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그가 뚫어져라 내 옆얼굴을 보는 게 느껴져서 나는 정면만 바라봤다. 가노에겐 조금의 먹이도 줘선 안 됐다.
한편 가노가 가주 옆에 나란히 서서 걷기 시작한 순간, 글렌의 혈압이 팍 올랐다. 당장 저 능글맞은 외국인의 목덜미를 잡아채서 창밖에 던지고 싶었지만 호위는 이동 중에 다섯 걸음을 떨어져 걸어야 했다.
기사도 아니요, 제국민도 아닌 가노는 그런 것에 딱히 제약이 없었다. 가주와 개인적인 맹약으로 맥포이에 드나드는 자일 뿐 맥포이 사람도 아니었다.
글렌의 분노는 뒤를 돌지 않아도 느껴졌다. 가노는 툭하면 이랬다. 대놓고 유혹하듯이 행동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가노가 워낙에 장난스러운 사람이고, 그가 본인에게 호감을 품고 다가오는 이들에게도 이런 식의 장난을 치기 때문에 가까스로 허용 범위에 들었다. 그가 장난인 척 분위기를 잡으면, 나는 눈치 없는 척 무시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디까지나 자네가 먼저 찾았을 때 이야기야. 내 생각엔 에리카가 먼저 찾을 것 같군.”
“글쎄, 모르지. 이번 기회에 그대와 나, 누가 정보력이 더 좋은지 비교할 수도 있겠네.”
“아, 그래? 그럼 이러고 있을 시간 없지 않나? 이만 물러가서 명이나 따르게.”
축객령에 가노가 불만스럽게 눈썹을 찡그렸다.
“자꾸 아랫사람 취급인데, 당신이 맹약상 갑이긴 해도 어쨌건 우린 동업자야. 일일이 명령하지 마.”
가노는 아랫사람 취급받는 걸 싫어했다. 특히 제국 귀족에게. 그는 항상 나와 동등한 위치에 서고 싶어 했다.
“그럼 노마 디아시 좀 그만 노려봐라. 그는 맥포이의 귀객이다. 자네가 깡패야?”
아, 깡패가 맞긴 하지. 뱉어 놓고 깨달았다.
가노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는 가슴팍을 풀어 헤치고 반나체로 돌아다니는 들짐승이었다. 지금이야 나이 먹고 귀족처럼 멀끔하게 꾸미고 다녀서 그렇지, 따지자면 그는 바다의 깡패라고 할 수 있었다.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야. 비슷하긴 하지.”
아니나 다를까, 가노도 의아한 투로 받아쳤다.
“어쨌건, 외국인이라고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흐응. 그나저나 모퍽은 어쩔 거야? 그를 치우면 부군 자리는 어쩔 거지?”
제게 불리한 화제가 나오자 가노가 대놓고 화제를 바꿨다. 계속 노마를 노려보겠다는 소리와 같아, 나는 못마땅하게 얼굴을 구겼다.
“……자네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지.”
그리곤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왜 아니야. 그대 부군은 롬닥 상단 안주인이 될 텐데. 내가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내 결혼과 상단 일은 별개야. 롬닥엔 안주인이고 뭐고 없다. 안심하라.”
“그럼 모퍽은 역시 죽이나?”
“모퍽은 더 이상 재활용이 안 돼. 맥포이를 우습게 여긴 벌을 줘야지. 죽이는 건 너무 약하지 않나?”
“하하, 좋은 대답이야.”
내가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가노가 마음에 드는 대답이라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호쾌하게 웃었다.
“그래도, 아직 결혼은 할 생각인가 봐.”
“그렇게 정했으니까. 부군감은, 글쎄. 다시 찾아야지.”
가노와도 알고 지낸 지 어언 10년이라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린 죽이 꽤나 잘 맞았다.
“……근데 내가 자네랑 왜 쓸데없이 이런 걸로 수다를 떨고 있지?”
그래서 그와 이야기하다 보면 불필요하게 말을 많이 할 때가 있었다.
“왜 쓸데없어. 우리 사이에.”
“…….”
가노가 불쑥 치고 들어왔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계속 정면을 주시하며 걸었다. 그러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는 결혼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도 될 텐데.”
그가 답지 않게 촉촉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나는 결국 우뚝, 걸음을 멈췄다. 다시 몸을 돌려 똑바로 가노를 응시했다. 가노의 검은 눈동자엔 어느새 장난기가 전부 사라져 있었다. 심히 부담스러워 나는 남몰래 심호흡을 했다.
“이미 그렇게 정했어. 계획을 바꿀 생각 없다.”
그러곤 가노의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내 인생 계획이란 별거 없었다. 그러나 절대로, 실수가 있어선 안 되었다.
나는 대충 허수아비 부군을 세운 후, 아치를 잘 키워다가 시기적절할 때 가주직을 물려줄 것이다. 와중에 닉스도 처리해야 했다.
그러니 내게 행복이니, 사랑이니, 자유이니 하는 것은 전부 사치였다.
‘내가 그러면 안 되지.’
스스로 피곤하게 살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혼자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견뎌야 하는 무게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은 편했다.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얻는 편안함이라니, 모순이었지만 그랬다.
그래서 적어도 아치는 이런 것 따위 모르고 살았으면 했다. 과보호의 시작이 여기에 있었다.
물론 이대로 아등바등 살다 죽겠다는 건 아니다. 가주직을 아치에게 잘 물려주고 나서, 남은 여생을 남부 휴양 도시 임타에 가서 흥청망청 즐겨도 충분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러니―.
“나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제국 대귀족 가문의 가주다. 한 번 멸문할 뻔한 맥포이의 가주다. 아이사 맥포이는 행복, 사랑, 자유 타령할 정신도 여유도 없다.
가노는 그걸 잘 안다.
‘알면서도 매번 이러는 게 아주 괘씸해. 한동안 잠잠하더니.’
그는 남들 하는 것처럼 나와 불같은 사랑, 뭐 그런 게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내게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
가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무표정하게 그런 그를 바라보다 다시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갔다. 다행히 그는 더 이상 귀찮게 따라붙지 않았다.
글렌은 가주의 뒤를 따랐다. 그는 복도 끝을 지나 모퉁이를 돌 때, 곁눈질로 가노가 있던 자리를 돌아봤다.
가노는 가주의 행렬이 복도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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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 시모어는 오늘도 퇴근을 하지 못했다.
통상 임무에 모퍽과 랑드라이의 뒤를 캐는 것과 가주의 새로운 부군감을 찾는 일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망할. 도대체 뭐지?’
에리카는 서류 더미에 파묻혀 머리를 싸맸다.
제 주인은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게 아닌, 두 사람의 박살을 원했다. 완벽한 복수를 위해선 고도의 전략이 필요했다. 그리고 고도의 전략을 위해선 정보가 필요했다.
“분명 뭐가 있는데.”
에리카는 흐트러진 서류 더미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필립 모퍽은 스스로 파혼서를 보냈다. 모퍽 가문은 유서 깊었다. 그런 가문의 인장을 평민인 랑드라이가 멋대로 찍을 수 없었다. 즉, 파혼은 어쨌건 필립이 선택한 일이다.
그렇다면 필립은 왜 파혼을 선택했을까? 정말 패트라를 사랑해서?
‘그건 아니야. 분명 다른 이유가 있다. 뭔가, 아주 막장인 그런 거.’
필립은 멍청이가 맞았지만 뼛속부터 이기적인 귀족이었다. 사랑에 미쳐 인생을 건 도박을 할 정도로 용감한 자도 아니었다.
계략이 패트라의 머리에서 나왔으므로 그녀가 필립을 협박 또는 설득했다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걸 알아내면 쉽게 뒤집을 수 있는데.’
어떻게 협박했는지 알면 이 싸움은 시시할 정도로 쉬워질 것이다.
‘필립이 도박을 감행할 정도로 두려워하는 것.’
가주님의 생각처럼 필립은 가문에 대한 소속감과 명예를 잃는 일을 곧 죽음으로 여길 것이다. 패트라가 그것들을 쥐고 필립을 협박했다면,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맹약.”
맹약을 어기면 필립은 가문에서 쫓겨날 수도 있으며 크게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에리카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아주 가뿐한 마음으로 패트라가 알 만한 일들 중, 필립이 맹약을 어긴 것이 있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의심한 것이 패트라의 임신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떤 의원이나 산파도 만난 적이 없었다. 모퍽에 붙인 사용인들도 하나같이 고개를 갸웃댈 뿐이었다. 제국에 신고하지 않은 불법 산파까지 모조리 뒤져 봤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이게 아니라고?’
다음 조항. 또 다음 조항.
에리카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패트라 랑드라이의 행적 중에 달라진 점은 하나도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가족 중 유일하게 연락하는 언니에게 돈을 보내는 것도, 정기적으로 다니는 무도회에 꼬박 출석하는 것도, 매주 황도의 야외극장 무대에 오르는 것도. 모두 전과 같았다.
필립 모퍽도 마찬가지였다. 새롭게 사귄 사람, 최근 은밀한 만남을 가진 사람. 뭐 하나 없었다.
조각난 정보들을 아무리 이어 봐도, 두 사람이 갑자기 미쳐서 도박을 한 이유를 특정할 수 없었다.
‘그럼 파혼 요구가 정말 사랑에 미쳐서 벌인 일이라고?’
그렇게 되면 결국 가문의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그러나 힘으로 누르면 괜히 그들에게 동정론이 일거나, 괜히 가주를 둘러싼 질 나쁜 소문에 확신을 심어 줄 수 있었다.
‘이러면 제대로 밟기 어려운데…….’
에리카가 어두운 얼굴로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아, 그래도 나는 가노 님에 한 표!”
새벽 같은 시간에 부지런히 서고를 청소하러 온 하녀들의 수다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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