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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드 엔딩 후에-42화 (42/139)

42.

필립의 선택이 너무 황당해서 화도 나지 않았다.

나는 ‘그 겁쟁이가 죽기를 선택하다니. 진짜 의왼데?’라는 표정으로 에리카를 돌아봤다. ‘예. 저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하고 에리카가 눈으로 말하는 듯했다.

“디아시 경. 죄송하지만 저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저녁 만찬 때 봅시다.”

마음이 조금 급해진 나머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노마에게 말했다. 짧게 머무는 디아시를 위해 매일같이 성대한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네. 가주님.”

고개를 끄덕인 노마가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느린 대답이 어쩐지 걸렸지만 신속하게 발걸음을 옮긴 후라 미처 그를 돌아볼 새가 없었다.

“가노, 마침 잘 왔군. 따르라.”

나는 가노를 빠르게 지나치며 그에게 턱짓했다. 가노의 정보망은 나보다 우수했다. 게다가 나와 가노 모두 롬닥에 정보망의 뿌리를 두고 있으니, 어쩌면 그가 모퍽 문제로 본성에 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주에게 이름이 불린 가노가 노마를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내가 이겼다는 듯, 결국 너는 외부인이라는 듯, 아주 우쭐한 얼굴이었다.

가노의 도발에도 노마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다만 시무룩한 속내를 숨기며 생각했다.

‘나도 아이사 님 따라 나가고 싶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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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모퍽은 굉장히 억울했다. 으으, 하고 다친 짐승처럼 앓는 신음을 뱉던 필립은 급기야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울음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나한테 왜 이래? 내가 뭘 잘못했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힘들어!’

엉엉엉!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필립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패트라 랑드라이는 무표정하게 그런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표정과 눈빛은 지나치게 서늘했다. 그 얼굴은 마치 발버둥 치는 벌레를 보는 것과 같았다.

잠시간 필립이 울부짖는 모습을 바라보던 패트라가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필립. 오, 내 사랑. 잘 생각해 봐요.”

그녀가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연극 조로 속삭였다. 인기 있는 배우답게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천사와 같았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어차피 하나예요.”

두 손에 얼굴을 묻은 필립이 손가락 사이로 패트라를 더듬더듬 올려다봤다.

그 눈동자엔 공포가 가득했다. 잔인한 복수로 유명한 맥포이에 대한 공포, 명예에 죽고 사는 제 아버지 모퍽 가주에 대한 공포, 추문에 대한 공포였다.

“당신이 그렇게 내게 떠들던 그 ‘맹약’ 말이에요. 사생아가 생기면, 당신은 그 죗값을 최대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고 했던 거.”

패트라가 입꼬리만 끌어 올리며 계속 말했다.

“아아―. 꿈만 같지 않나요? 그 무시무시한 맹약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 지금이라면 아직 성혼식 전이니까, 일이 잘못되어도 가문에서 쫓겨나는 정도로 그칠 거예요.”

필립이 눈물을 쥐어짜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만 보면 대단한 피해자로 보였다.

“자, 내 사랑. 그러니까 이건 오히려 기회예요. 마지막 기회.”

패트라가 우아한 몸짓으로 의자에서 일어섰다. 필립은 여전히 바닥에 엎어진 채로 숨이 넘어갈 것처럼 서럽게 울었다.

“당신은 날 사랑하잖아. 난 당신 아이까지 가졌어. 우리가 함께 한 일이니까 당신은 책임을 져야 해.”

“흐으, 흑, 으으아아아!”

“나를 선택해요. 필립.”

필립은 현실에서 도피하듯이 도리질을 쳤다.

“선택이 어렵나요? 그렇지 않을 텐데. 당신은 어차피 내 손을 잡을 수밖에 없어요. 내 손을 잡지 않으면, 내가 당신 아이를 가졌다고 맥포이 가주에게 직접 밝힐 거니까.”

패트라가 자애롭게 웃으며 바닥에 엎어진 필립의 머리맡에 앉았다.

“내 입을 막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마요, 내 사랑. 당신을 보러 오기 전에 나도 보험 하나쯤은 들어 놨으니까요.”

“흑, 흐읍. 흑, 흑!”

그러면서 패트라는 눈물과 콧물, 땀으로 범벅된 필립의 볼을 쓰다듬었다.

한동안 다정한 손길로 못난 얼굴을 쓸던 패트라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창밖으론 해가 지고 있었다. 패트라는 멍하니 그 풍경을 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이 기회에 그 여자에게서 위자료로 커다란 농장이나 탄광 같은 걸 하나 받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패트라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달콤했다.

“그거 하나면, 모퍽 영지에서 나랑 당신이랑 우리 아가랑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아아, 패트라. 그냥, 그냥. 당신이―.”

모퍽이 눈물을 흘리며 패트라를 올려다보았다.

‘당신만 조용히 있으면 되지 않을까? 배우는 그만두고 몰래 아이를 낳아다가 황도 별장이든 어디든 숨어 살면 되지 않나? 그럼 다 행복하고 평소와 같은 거 아닌가? 왜 이렇게 상황을 어렵게 만드는 거지? 왜 날 힘들게 해? 당신은 착한 여자잖아.’

마주한 패트라의 붉은 눈동자는 더없이 싸늘했다. 당황한 모퍽은 하려던 말을 삼키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 여자랑 꼭 결혼할 필요 있나요? 그녀는 실제로 보름 동안 사라졌어요. 그사이에 소문처럼 광신도들과 무슨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바로 지금이 당신이 맥포이 가주를 상대로 파혼을 선언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요.”

“그건, 그. 하지만 그게 확실치도 않―.”

“제국이 언제는 소문이 확실해서 떠들었나요? 다들 아닌 걸 알면서도 떠들곤 하잖아요.”

“…….”

“사랑하는 필립. 이건 다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정말 이대로 그 여자 옆에서 허수아비 신세로 평생을 살 건가요?”

“하,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요, 우리.”

패트라가 필립의 손을 양손으로 꼬옥 잡아 올리며 속삭였다.

“당신이 이 기회를 놓치고 내 손을 놓으려고 한다면, 나는 진짜로 화가 날지도 몰라요.”

그러곤 필립의 손등에 볼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당신이 날 배신하면 나도 내가 어떻게 나올지…….”

순간 필립의 머릿속이 맥포이, 아버지, 추문에 대한 공포로 가득 찼다.

“당신이 날 버리면 난 끝이니까. 배우 패트라 랑드라이가, 이 제국에서 평민 여자가 사생아를 낳는다? 내 인생은 끝이야.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이대로 끝낼 것 같아?”

중얼거리는 듯한 패트라의 목소리가 서서히 격양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가 빳빳하게 목을 세웠다.

“파혼해, 당장! 날 모퍽 소가주 부인으로 만들어! 아니면 내가 밝히겠어! 그럼 당신은 파혼당할 거고 모퍽 가문에서 제명당하겠지!”

“…….”

“그럼 당신에게 뭐가 남지? 당신에게 딱 하나 남은 가문 이름, 그 명예가 없으면 말이야!”

“…….”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겠지!”

귀신 같은 낯을 한 패트라가 비명처럼 소리를 쳤다. 얼마나 격분해서 소리를 쳤는지 숨까지 헐떡였다.

필립은 완전히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몸을 떨었다. 제가 알던 그녀는, 제게 언제나 좋은 소리만 해 주며 사랑스럽고 달콤하게 굴던 그녀는 없었다.

잠시 후 호흡과 표정을 갈무리한 패트라가 활짝 웃었다.

“자, 그러니까 내 사랑. 부디 나와 함께 이 기회를 잡아요.”

그녀가 이제야 좀 자신이 알던 얼굴을 했지만 필립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우리 둘 다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니까.”

그녀가 언제나처럼 사랑스럽게 웃었다.

“우린, 행복할 거예요.”

그러면서 패트라가 다시 필립의 비쩍 마른 손에 얼굴을 묻었다.

“으흑…….”

필립이 다시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는 어린애처럼 땅바닥을 등으로 쓸며 버둥댔다.

바닥에 주저앉은 패트라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미 밖은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

패트라가 질끈 눈을 감았다.

‘맥포이 가주, 그 여자는 해적과 손을 잡고 술이나 팔잖아. 이미 좋지 않은 소문이 넘쳐 나는 사람이다. 웬 해적 하나와 질 나쁜 소문도 있고.’

여성 가주. 귀족 상단주. 해적과 동업.

그럼에도 아이사 맥포이는 마녀로 몰리지 않았다. 그녀가 광신도 퇴치에 앞장서는 ‘맥포이’ 가주이기 때문이다.

또한 중앙을 제외하고 네 구역을 대귀족이 나누어 다스리는 제국에서, 맥포이 가주는 서부의 왕과 같았다. 맥포이 가주가 스스로 반란 또는 심각한 종교적 죄악을 저지르지 않는 한, 그녀의 입지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괜찮아. 나 같은 사람은 추문 한 번에 인생이 끝나지만, 맥포이 가주에게 이 정도는 잠시 지나가는 폭풍일 뿐이야. 막말로 그녀가 추문 때문에 결혼을 하지 못해도 그녀는 괜찮을 것 아닌가.’

그러니 괜찮을 거야.

끝없는 자기 합리화의 과정 끝에 패트라가 다시 눈을 떴다.

‘신전 재판까지만 가면 된다. 재판만 가면,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어. 그동안 임신만 들키지 않으면 돼.’

패트라는 임신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검게 가라앉았다. 우울하기 짝이 없는 나날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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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모퍽의 발칙한 짓거리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부군이 필요했고, 조카를 후계자로 둔 나에게 그는 여러모로 최고의 부군감이었다.

제국에서, 특히 귀족 사회에서 결혼은 당연했다. 미혼의 귀족 여성은 썩 좋은 취급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내 경우엔 역사서를 뒤져도 찾기 어려운 몇 없는 여성 가주이니, 내 결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았다.

실은 이대로 결혼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제국, 특히 서부에서 맥포이 가주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내가 미혼이라고 내 앞에서 잔소리를 할 사람은 있어도 개소리를 지껄일 인간은 없었다.

물론 내가 미혼으로 남는다면 나와 관련된 새로운 소문이 추가될 것이다.

나야 상관없지만 문제는 그 소문이 내 후계자의 정당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아치에게 괴소문이 따라붙는 일은 원치 않았으므로 나는 적당히 남들이 말하는 정상 범위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대충 제국에서 원하는 가문의 형태를 맞추는 것. 그 결과가 필립 모퍽이었다.

나는 차가운 눈으로 모퍽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내려다봤다.

“그래서 이게 모퍽의 답인가?”

“……예.”

에리카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랑드라이 쪽은.”

“동향을 보면 머리는 랑드라이가 쓴 것이 맞습니다. 최근 돈을 들여서 제국법을 해석하는 자를 찾은 정황도 찾았고, 신전에도 몇 번 들른 걸 보면 그녀가 맞습니다.”

“랑드라이가 갑자기 서두르는 이유가 뭘까.”

나는 의자에 허리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당장 나와 필립의 결혼이 예정된 것도 아닌데. 필립이 헤어지자고 하기라도 했을까? 그래서 그를 협박했나? 그렇다면 뭘로?”

“가장 현실적이긴 하지만 두 사람 관계는 최근까지 굉장히 좋았습니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 돌아오니 갑자기 아쉽기라도 했을까? 잠시나마 신분 상승의 단꿈을 본 거지.”

“……무모하게 일을 벌일 동기가 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혹시 빚이 생겼나 찾아봤지만 행적에 특이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 변화 없나?”

“네. 오히려 최근 유명한 극에 주연으로 발탁되었습니다. 또 간간이 낭독회 같은 귀부인 모임에도 초대된답니다. ……모퍽의 안주인 행세이지요.”

“머리 잘 쓰긴 했어. 메헤라 말씀이 제국법보다 위라, 이 나라 귀족이라면 맥을 못 추리지. 종교가 이렇게 힘이 세서야.”

나는 세차게 혀를 차다 손을 휘저었다.

“아, 됐다. 그냥 쓸어버리지. 랑드라이가 서두른 이유와 모퍽이 그녀의 뜻을 받아들인 이유를 찾아라. 아무래도 갑자기 서두른 게 수상하군.”

“예, 가주님.”

“아, 그리고 둘에 대한 벌은.”

맥포이의 복수는 잔인하고 집요하다.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완전히 부숴 버리는 걸로 하지.”

모퍽의 경우 가문에 대한 소속감과 명예. 랑드라이의 경우엔 언젠가 귀족 신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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