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기별 없이 맥포이에 들이닥친 가노는 자신을 막아서는 기사들을 밀치고 나아갔다. 무섭게 굳은 가노의 얼굴을 보고 대부분이 멈칫대며 뒷걸음질을 치기도 했다.
그들 사이에서 서열 정리는 옛적에 끝났다. 맥포이에서 무력으로 가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소싯적 도그만 경뿐이다. 해리 폴른 경 역시 가노에 비기는 정도였다.
그 말인즉 가노가 제 성질 못 이기고 깽판을 치기 시작하면 말리기 어렵다는 소리다.
“대장, 대장! 진정하십시오. 이러면 가주께서 싫어하실―.”
쩔쩔매며 뒤를 따라오던 가노의 부관이 그의 손에 낙엽처럼 떨어져 나가는 기사들을 치우며 소리쳤다.
그러나 가노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내성에 들어선 순간, 성 안을 돌아다니는 디아시 기사들을 발견하고 눈앞이 시뻘게져 뵈는 것이 없었다.
한껏 초조해진 그가 가주를 찾아 세 칸씩 계단을 오를 때였다. 야수처럼 계단을 뛰어오르던 가노는 웬 검은 짐승 새끼를 품에 안고 내려오던 맥포이 도련님과 마주쳤다.
가노는 도련님에게 안긴 처음 보는 짐승을 보고 한 번, 도련님 뒤를 따르는 사용인들에 디아시 기사가 섞여 있는 것을 보고 두 번 눈살을 찌푸렸다.
들뜬 얼굴로 신나게 계단을 내려오던 아치 역시 뒤늦게 가노를 발견하고 엑, 하고 표정을 구겼다.
‘저 인간이 또 왜 여기 있어.’
아치는 매사에 거칠게 말하고 행동하는 가노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가노를 고모의 말투를 버린 놈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아치는 가노가 맥포이 성에 올 때마다 하녀들이 그를 보고 환호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가노 스스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에게 능글맞게 구는 것도 아주 재수 없는 부분이었다.
엄격하고 꽉 막힌 어른들, 예를 들어 시모어 부인과 글렌 도그만 경의 손에 큰 귀족 도련님이 보기에 가노는 품행이 단정치 못했다.
한 마디로 그는 영 조신하지 못했다. 가문의 작은 주인으로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가노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맥포이 안에서 모두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고 평생을 살아온 어린이는 귀신같이 알 수 있었다.
‘저 인간은 우리 고모에게 관심이 있지, 나를 예뻐하진 않아.’
그리고 그건 아치 사전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도련님. 오랜만이네.”
아치는 가노가 사람 좋은 척 서글서글한 낯으로 인사를 건네도 저게 다 가식이란 걸 알고 있었다.
또 가노는 항상 그랬듯이 이번에도 자신에게 예를 차리지 않았다. 어린 주인이라는 타이틀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아치는 가노의 불량스러운 태도가 항상 불만이었다.
아치가 반사적으로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지만 고모인 아이사를 꼭 닮은 습관이었다.
아치가 가노를 경계하니 그가 안고 있던 앙투아네트 역시 잔뜩 날을 세우고 가노를 향해 아르르,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본성에 웬 짐승을 들였지?”
자신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앙투아네트를 보고 가노가 같잖다는 듯이 물었다.
“도련님께 제대로 예를 차리시오, 가노.”
가노의 싹수없는 언행에 결국 참다못한 시모어 부인이 엄한 얼굴을 하고 한 발 걸어 나왔다. 그때 아치가 척, 시모어 부인을 막아서며 제법 위엄 있게 말했다.
“짐승이라니. 앙투아네트요.”
“하―!”
가노가 악당처럼 비웃었다.
“흐응. 뭐, 가주께서 도련님 외롭지 말라고 들인 건가?”
그러면서 은근히 아치를 놀려 댔다. 평소 같았으면 이쯤에서 아치가 가노 보고 무례하다며 성을 냈을 테지만.
“아니. 디아시 경이 키우는 아기 표범이요.”
오늘은 달랐다. 아치는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자랑스럽게 앙투아네트를 들어 올렸다.
“……디아시가 데려왔다?”
“그래. 방금 막 고모와 함께 노마 디아시 경과 ‘티타임’을 가졌지.”
“…….”
“티. 타. 임.”
이번엔 아치가 악당처럼 씨익 웃었다.
아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식을 떨던 가노가 입꼬리를 떨어뜨렸다. 가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그대로 아치를 지나쳤다.
“저 무례한!”
시모어 부인이 다시 발끈하자 아치가 재차 그녀에게 진정하라는 듯이 손짓했다.
“흥. 괜찮다, 시모어 부인. 오늘은 내가 이겼다.”
아치는 그러면서 가노의 걸음걸이에 완전히 여유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실실 웃었다.
“그나저나 고모는 어차피 곧 모퍽 소가주와 결혼하는데 무슨 자신감이람. 모퍽은 허수아비라 이건가?”
“도련님.”
시모어 부인이 단정치 못한 아치의 발언을 짧게 나무랐다. 그러곤 얼마 전 가주님이 내린 명령을 떠올렸다.
“모퍽 소가주가 파혼을 요구한 것은, 아치의 귀에 절대 들어가지 않게 주의하라.”
시모어 부인은 조금 한숨이 나왔다. 그녀는 이참에 가주님이 그 쭉정이와 아주 파혼을 하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대로 파혼을 했다간 멍청한 놈들이 맥포이 가주가 추문을 사실로 인정한 것이라며 재미있어 할 게 뻔했다.
시모어 부인이 심각한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아치는 가노에게 한 방 먹였다는 사실에 마냥 기분이 좋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치는 가노의 평소 품행이 어떻든 딱히 관심이 없었다. 고모에게 관심 있는 주제에, 제게 점수 딸 생각을 안 하는 것이 아주 괘씸할 뿐이었다.
아치는 대귀족답게 꼰대였고 눈치 빠른 어린이라 고모에게 본인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흥흥. 감히 이 아치 님을 예뻐하지 않다니 쌤통이다.’
아치는 가노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베, 혀를 내밀었다. 그러곤 만족스러운 얼굴로 앙투아네트를 내려다봤다.
“앙투아네트, 내 방을 보여 주마. 맥포이 성에서 내 방이 제일 멋지단다.”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한 아치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총총 제 방으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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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렌에게 저지당한 가노를 보고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떠 보았지만 현실이 맞았다. 짧게 한숨을 쉰 후, 가노에게 부끄럽게 하지 말고 예를 갖추라는 눈빛을 보내 봤다.
그러나 가노는 내 눈빛을 무시하고 양아치처럼 옷깃을 거칠게 털고는 자길 막아선 글렌을 노려봤다. 물론 글렌은 지지 않고 그보다 더 험악한 얼굴을 하긴 했다.
‘이번엔 또 왜 저러나. 하필 손님이 있는데.’
가노는 한 번씩 수틀리면 꼭 저렇게 제 성질을 못 죽이곤 했다.
슬쩍 옆을 보니 노마가 눈을 땡그랗게 뜨고 이 자리에 난입한 가노를 쳐다보고 있었다. 디아시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놀랐을 것이다.
“용서하세요, 디아시 경. 저자는 롬닥 상단 사람인데 외국인이라 제국 예법에 서툽니다. 그……, 참고로 존대도 어려워하고요.”
나는 노마에게 변명처럼 앞으로 있을 가노의 무례한 언행에 대비해 밑밥을 깔았다. 나를 향해 눈을 몇 번 깜빡인 노마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가노를 쳐다봤다.
그 표정은 해괴했다. 항시 장착되어 있던 햇살 같은 미소는 없었다. 노마는 그저 가노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맨날 미소를 띠고 있는 사람이다 보니 노마의 무표정은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노마도 역시 귀족은 귀족이라 기분이 상했겠다 싶어, 나는 다시 한번 가노를 살벌하게 노려봤다.
그러나 가노는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팽 고개를 돌려 버리더니 이번엔 노마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걸 보자 순간 끔찍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설마 지금 노마 디아시 때문에 이러는 건가.’
……미쳤나?
‘저 새끼가 드디어 날 망신시키려고 작정을 했군. 지금 여기에 디아시 눈이 몇 갠데!’
“……상단 일에 문제라도 생겼나?”
나는 수습하기 위해 물었다. 수습할 기회를 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내가 본성 오는 게 이상한 일인가? 롬닥 사람이면 맥포이 사람이지.”
그러나 가노가 수습을 거부했다.
그 순간 나는 얼굴 근육이 점점 딱딱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이 타이밍에 여기서 이러는 건 최악의 행동 중 하나였다.
“그래서.”
마지막이었다.
“왜 왔다고?”
“…….”
그렇게 말하는 내 표정은 굉장했을 것이다. 드디어 정신을 차린 모양인지 가노가 잠시간 침묵했다.
‘그놈의 선.’
가노는 욕지기를 삼켰다. 가주, 당신 보러 왔다는 말이 가노의 입 안에 맴돌았다.
맥포이 가주에겐 선이 존재했다. 그녀는 특히 선을 급하게 넘는 자를 싫어했다. 그런 자는 가차 없이 내쳐진다.
그렇기 때문에 선을 지키는 일은 가노가 그간 가장 공들인 것 중 하나였다.
“……롬닥 기밀이오.”
가노는 가까스로 성질을 죽이고 맥포이 가주가 원하는 대답을 해냈다.
지금 그는 평소보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안 그래도 눈앞이 시뻘건데, 응접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마자 본 광경이 볼이 붉은 그녀와 그 옆에 착 달라붙어 앉은 노마 디아시였다.
가노가 분함을 겨우겨우 삼켰다. 그리고 그녀 가까이 붙어 앉은 노마 디아시를 노려봤다.
때마침 두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무표정을 고수하던 노마가 마침내 특유의 햇살 같은 미소를 발사했다. 갑작스러운 미소에 노마를 노려보던 가노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눈꼬리를 화려하게 접은 노마가 가노를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가노의 두꺼운 눈썹이 꿈틀거렸다.
‘역시 여우 새끼군.’
퍽 따사롭고 아름답게 꾸며 낸 얼굴이었지만 가노는 금안에 실린 혈기와 생각을 쉽게 읽어 낼 수 있었다. 가노의 얼굴이 와작 일그러졌다.
노마는 가노가 들이닥친 이후 조용히 앉아 상황을 파악했다. 그녀를 보는 저 붉은 머리 남자의 눈이 너무나 노골적이라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마치 저더러 알아채라는 듯이 행동하기도 했다.
‘어리석게도 경쟁자가 있을 거란 생각을 못 했구나. 아이사 님은 멋있고 귀여우시니 당연한 것인데.’
자신의 안일함을 반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사 님의 태도를 보면.’
빠르게 상황 파악을 완료한 노마는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가노가 눈치와 감이 좋듯이, 검기와 성력을 다루는 노마 역시 예민했다. 아이사가 제 얼굴을 몹시도 마음에 들어 하고, 동시에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내 가노와 눈이 마주쳤다. 노마는 상쾌하게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더 예쁘군.’
그는 본인이 각별하게 아름답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평생을 모든 사람이 극찬해 주니, 본인도 눈이 있으면 알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것을 무기로 쓸 생각은 지금껏 해 본 적이 없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만나고 노마는 부모님, 특히 어머니에게 큰 감사를 느꼈다.
한편 두 남자의 기 싸움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가노가 드디어 아무나 붙잡고 저 혼자 분노하고 시비를 거는 것에 심기가 불편할 뿐이었다.
노마 외관에 단점이 있다면 지나치게 아름답고 성스러워 그가 한낱 인간과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다는 것에 있었다.
‘멍청한 놈. 말이 되냐? 노마 디아시를 나랑 엮을 생각을 하다니.’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가노가 박찬 문틈으로 에리카의 비서가 빠르게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신속한 움직임에 내 시선은 곧 시답지 않은 기 싸움을 하는 남자들에게서 에리카의 비서로 옮겨 갔다.
비서의 귓속말에 에리카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그걸 본 내 미간도 같이 찌푸려졌다.
역시나, 에리카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날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에리카가 내게 다가왔다.
“가주님, 잠시 귀를.”
에리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필립 모퍽으로부터 서신이 왔습니다.”
“서신? 직접 안 오고?”
내 미간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그렇다. 약속한 일주일이 지나고, 필립의 대답은 서신이었다.
필립은 배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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