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그래서 오전 티타임을 하신다고요?”
가주님이? 티타임은 무슨 식사 시간도 잘 안 지키시면서?
에리카가 드물게 표정을 드러냈다. 희한하다는 표정에 나는 드물게 눈을 피했다.
“아, 성에 맹수를 들였다는데 그럼. 아무리 새끼라도 성 주인으로서 확인은 해야지.”
노마의 청은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카탐에서 거리를 돌아다닐 때 고양이를 보시지 않았냐. 아이사 님이 눈길을 준 아이라 신경이 쓰였다.
나는 여기서 처음 움찔했다. 북새통에 혼자 돌아다니는 검은 새끼 고양이를 본 기억이 있긴 했다. 그런데 걜 데리고 디아시로 갔다고?
도통 제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어미가 없어 데려왔더니 고양이가 아니라 새끼 맹수였다. 아기 맹수가 이상하게 더 이상 크지도 않고 자신과 떨어지면 불안해해서 결국 여기까지 데려왔다.
이때 노마 표정이 퍽 아련해 두 번째로 움찔했다.
출입 신고를 하려고 했지만 아가가 무서웠는지 숨어 버려서 못했다. 아기 맹수와 함께 머물 수 있게 허락해 달라.
“아. 아가 이름은 앙투아네트입니다.”
뻔뻔한데 너무 산뜻하게 말하니 오히려 내 쪽에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럼 어제 기사들을 시켜서 확인하고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즉시 쫓아낸 후, 디아시에 책임을 물으셨어야지요. 무슨 다음 날 아침에 확인을 하십니까?”
에리카는 이게 무슨 거지 같은 일 처리냐는 얼굴이었다.
누가 그걸 모르나. 나도 지금 믿기지가 않는다. 그때는, 노마가 처연한 얼굴을 하며 자신과 떨어지지 못하는 아기 맹수의 사연을 말하는데 그렇게 구슬픈 이야기가 없었다.
노마 디아시를 마주하고 있다 보면 가끔 머리보다 행동이 앞설 때가 있다.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자네가 노마 디아시 말하는 걸 못 봐서 그렇다.”
나는 꽤나 괴로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노마에게 전패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허하고 있었다고. 혹시 성력으로 최면 같은 것도 걸 수 있나? 들은 적 없는데.’
아이사가 패착 요인을 고민할 때, 에리카는 가주님이 노마 디아시에게 말도 안 되게 무른 걸 알아차리곤 남몰래 쯧, 혀를 찼다. 아름다움에 유독 약한 맥포이의 유구한 역사가 머릿속에 촤라락 스칠 때는 대놓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주님은 아직도 모르시는군. 당신이 특히나 희고 고운 인간들, 그중에서도 눈이든 머리든 금색이 하나라도 있으면 저도 모르게 눈길을 주신다는 걸.’
세간에는 보통 맥포이 가주가 싫어하는 게 널리 알려져 있다. 대귀족 가문의 가주 신분이니, 그 비위를 맞추기 위해 거슬리는 걸 하나하나 피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체로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제 주인에게도 분명히 호가 존재했다.
맥포이는 아름다운 걸 좋아한다. 아름다운 것, 개중 특히 아름다운 사람에게 무지무지 약했다. 희고 고운, 금처럼 반짝이는 걸 좋아하는 것은 맥포이의 뼈에 새겨진 유구한 취향이었다.
이것은 선대 가주 시절부터 맥포이를 모신 사람이라면 쉽게 눈치챌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선대 가주, 그러니까 아이사의 아버지가 가주였을 적에 도그만 경이 길에서 주워 온 해리 폴른은 그냥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다. 폴른 경 역시 금발의 미남으로, 그 외양은 맥포이 가문 사람들의 경계를 한껏 낮추는 데 한몫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는 이유는 단순했다. 맥포이는 아름다운 걸 좋아하지만, 눈이 매우! 높아서 티가 잘 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에리카는 잠시 흠칫했다. 가주님이 제 친오빠, 친언니보다 아꼈던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애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연쇄적으로 떠오르는 기억 탓에 순식간에 기분이 저조해지곤 했다.
“……그나저나 오전 티타임 시간대라면, 보통 그 시간에는 아치 도련님을 보시지 않습니까.”
에리카는 상념을 뒤로하고 한 가지를 더 지적했다. 귀축이라는 별명답게 훌륭한 표정 관리였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아이사는 제국 귀족들이 대부분 티타임을 즐기는 시간에 아치 도련님을 만난다. 보호자로서 나름 의무를 다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최근에야 도련님이 가주님을 만나 주질 않지만 말이다.
“아치가 오늘은 뭐 날 들여보내 주겠나? 아니면 지가 나오겠나? 어제도 쓴소리 한마디 했다고 토라져서는, 쯧. 하여간 성질 더러운 건 아이노를 빼다 박았다.”
에리카는 아치 도련님이 보고 자란 것은 가주님이니 가주님 성질을 닮은 것이 아닐까, 하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에리카의 기억으론 아이노보다 그의 나이 차이 나는 막냇동생 아이사의 성깔이 본성에서 더 유명하기도 했다.
“오늘은 부르면 나오실 것 같은데요?”
에리카가 불순한 생각을 끝으로 무심하게 던졌다.
“오늘?”
“도련님께 노마 디아시와 티타임을 가진다고 전하면, 아마 나오실 겁니다. 제 한 달치 봉급을 걸죠.”
맥포이에서 가장 많은 봉급을 받는 사람 중 하나인 에리카는 많이 버는 만큼 돈을 좋아했다. 그런 그녀가 봉급을 걸다니.
확신이 있다는 거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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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일주일간 이어졌던 시위가 허무하게 끝났다.
티타임에 맞춰 응접실에 들어선 나는 평소보다 윤이 나는 조카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자진해서 새벽부터 광을 낸 것이 분명한 아기 공작새를 보자 기가 찼다.
“도련님이 노마 디아시가 마음에 든 모양입니다. 거의 한눈에 반한 것 같던데요. 모르셨습니까?”
동시에 아침에 집무실에서 에리카가 한 말이 떠올랐다. 어제는 나도 정신이 없어서 미처 아치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애가 저런 눈을 하고 노마 디아시를 보고 있을 줄이야.’
대화도 안 해 봤으면서 무슨. 얼굴만 밝히는 꼬맹이 같으니라고. 하여간 아이노를 빼다 박았어.
‘아직 어리구나!’
물론 나는 내가 아치를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볼 때 내 뒤에서 에리카가 얼굴만 밝히는 맥포이, 하며 속으로 혀를 차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상석에 앉아 내 앞에 마주 앉은 아치와 노마를 번갈아 봤다. 웃기게도 두 사람은 서로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디아시 경. 다시 한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비적거리며 예를 갖추는 모습이 간만에 아이 같고 귀엽기도 해서 헛웃음이 조금 나왔다.
“맥포이 공자,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그러면서 아치의 손을 잡은 노마가 친근함을 드러내려는 듯이 자신의 성력을 흘렸다. 성력을 가진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교감, 뭐 그런 거였다.
노마를 닮은 따사로운 금빛이 훅, 끼치자 아치가 동그랗게 눈을 뜨더니 곧 배시시 웃었다. 맥포이에선 성력을 다루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운 탓에 사소한 것도 신기한 모양이다.
아치가 신이 나서 웃자 노마가 귀엽다는 듯이 따라 웃었다. 내 눈에도 노마가 열한 살 난 아치를 몹시 귀여워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아마 니콜라스 디아시가 저 나이 정도일 때 생이별을 했으니 더 정이 가는 듯했다.
랭터스 경. 디아시. 성력. 성기사!
아치는 내가 잘 모르는 이야기를 재잘재잘 떠들었다. 잔뜩 들뜬 볼에는 홍조가 가득하고 노마를 바라보는 자색 눈동자는 세상 총기가 어려 반짝반짝했다.
노마에겐 어린이를 돌봐 본 경험에서 나오는 노련미가 있었다. 나와 다르게 아치와 끊김 없이 대화가 됐다.
아치의 유모 시모어 부인마저 능숙하게 아치와 대화하는 노마의 모습을 보고 크게 감탄했다.
‘키워 주고 먹여 준 고모 보고는 한 번도 저렇게 좋아 죽겠다는 얼굴을 한 적이 없거늘.’
나는 묘하게 섭섭함을 느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두 사람 쪽을 바라보는데, 마침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린 노마와 눈이 마주쳤다.
마주친 순간, 노마가 반달로 눈을 접어 웃었다.
“…….”
때마침 오전의 따스한 채광이 웃고 있는 노마를 비추었다. 과연 이 세상은 햇빛까지 그의 편이었다.
이내 그의 시선이 나를 떠나 다시 아치에게 돌아갔다. 나는 시선이 묶인 사람처럼 한동안 꼼짝하지 못했다.
‘……오늘도 예쁘군.’
그저 인상을 쓴 채 멍청한 감상만 흘릴 뿐이었다. 하여간 햇빛을 받으면 공격력이 더 대단했다. 노마의 은발과 금안은 자연광을 받으면 자체 발광하는 효과가 있었다.
목이 타는 기분에 나는 괜히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리고 아까부터 말이지.
“…….”
‘어색하다. 이상해.’
오전의 햇빛. 즐겁게 이야기하는 소리. 기분 좋은 웃음소리.
이 평화로운 풍경이 너무나 어색했다. 내겐 너무 생소하다고 할 수 있었다.
‘오전을 이렇게 여유롭게, 누군가의 수다 소리를 들으면서 차를 마신 것이 언제가 마지막이지?’
찾으려면 10년은 더 거슬러야 할 것이다.
‘이렇게 평범해도 되나. 내가 이렇게 편하게 있어도 되나?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것도 있고, 확인해 볼 것도 있고.’
무엇보다.
‘내가 편하면 안 되지 않나? 왜 차를 마시자고 해서는―.’
나는 갑자기 초조한 기분이 들어 괜히 노마를 탓했다.
어제 만찬 때, 그리고 지금. 못 본 지 두 달 조금 넘은 사이 노마는 확실히 괜찮아진 것 같았다. 적어도 카탐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주 허공을 보거나 멍 때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초조한데. 노마 디아시는 그래 보이진 않는군.’
편안한 분위기가 노마에게 어색하지 않았다. 노마 자체가 여유인 것처럼 보였다.
‘……잠시만 더 있을까.’
그런 노마를 보고 있자니 잠시만 이렇게 있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아주 조금만, 더.
그때 아치가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기해요. 맥포이엔, 성력을 다루는 사람이 거의 없거든요. 본성엔 저밖에 없을 거예요!”
나는 아치가 별생각 없이 뱉은 말에 흠칫했다. 성력을 다루는 인재를 아낀 것은 선대 가주인 아버지의 뜻이지 나의 방침이 아니었다. 특히나 ‘성력’ 때문에 10년 전 그 난리가 났던 걸 생각하면 치가 떨릴 뿐이었다.
맥포이는 그날 이후로 신에게 저주받았다는 소문을 피하기 위해 신전에 많은 투자를 하긴 했다. 돈이 생기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맥포이 이름으로 신전에 어마어마하게 기부를 한 것이었으니.
그러나 신관과 성기사를 직접 양성하진 않았다. 더 정확히는 외부인을 꺼려 했다.
‘망할.’
저 아래에 처박아 둔 옛 기억이 스멀스멀 물밑에서 기어 나오려 했다. 찻잔을 쥔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가주님.”
그걸론 모자라 입술을 깨물기 직전, 노마가 나를 불렀다.
“지금쯤이면 앙투아네트의 식사가 끝났을 겁니다.”
그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나를 향해 말했다.
눈을 몇 번 깜빡인 나는 앙투아네트를 기억해 냈다. 아, 맞다. 맹수를 확인해 보기로 했지.
나는 약하게 고개를 휘저어 내 발밑에 덕지덕지 들러붙은 옛 기억을 떨쳐 냈다. 곧이어 내가 고개를 까딱하자 노마가 그의 호위 기사에게 손짓했다.
곧 하급 기사가 아기 맹수를 데려오기 위해 사라졌다.
‘그나저나 나 맥포이 가주인데. 아기 맹수가 아무리 예민하다 해도 그렇지, 밥시간까지 기다려 주다니. 미쳤구만. 내 시간은 금인데.’
잠깐. 밥……. 밥?
“……그런데 맹수이면 먹이는 어떻게 한 겁니까?”
내가 의문스러운 얼굴을 하고 물었다. 그러자 노마가 방긋 웃었다.
‘전에도 대답하기 어려우면 저랬던 것 같은데.’
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노마가 결국 입을 열었다.
“굉장히, 귀엽습니다.”
먹이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퍽 사랑스럽다는 듯한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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