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저 희멀건 한 놈이 어디서 개수작인가?’
맥포이 가주 뒤에서 석상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던 글렌 도그만 경은 남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눈에 살벌한 안광이 흘렀다. 검을 바친 분을 잃은 경험이 있는 글렌에게 아이사는 너무나 소중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물리다니? 누구를? 저도요?’
마찬가지로 노마의 뒤편에서 대기하던 폰 역시 남몰래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의 눈 밑이 당혹으로 씰룩거렸다. 노마가 그에게 아무런 언질을 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돌발 행동이었다.
‘단둘이 나눌 이야기가 있으신가? 아무리 그러셔도 그렇지, 디아시와 친분도 없는 맥포이 한가운데서 호위를 무르시면!’
폰은 힐끔, 건너편에 앉은 맥포이 가주를 훔쳐봤다.
맥포이 가주는 폰이 상상했던 모습과 달랐다. 정확히는 소문과 달랐다. 그녀를 둘러싼 무성한 이야기들과 다르게 그녀는 평범한 귀족 아가씨처럼 보였다.
물론 대귀족, 한 가문의 가주라는 신분에 걸맞게 압도적인 박력과 위엄이 있긴 했다. 다소 날카로운 인상이 박력을 더했다.
다만 그 키가 웬만한 남자보다 크고 덩치는 용병과 같다는 소문은 모두 헛소문이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작았다.
‘소문과는 다르게 딱히 위험해 보이진 않단 말이지. 그래도…….’
왼 눈썹이 매섭게 올라간 것으로 보아 맥포이 가주의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다행히 맥포이 가주는 측근과 기사를 물릴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쪽도 계속 임무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맥포이 가주는 폰의 기대와 다르게 행동했다. 매우 경계하는 표정을 하고선, 그녀는 자신의 보좌관과 기사단장을 향해 나가라는 듯이 턱짓을 했다.
폰도 익히 들은 적 있는 서부의 전설적인 기사, 글렌 도그만 경이 짧게 반발했지만 맥포이 가주는 신경질적인 손짓 한 번으로 그를 정리했다.
글렌 도그만 경이 물러가기 시작하자 남은 맥포이 사람들이 눈치를 보며 따라 나가기 시작했다.
‘진심인가? 망했다.’
폰은 다급하게 노마를 바라봤다. 곧바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 차분한 미소를 띤 노마는 언제부터인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폰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조금 찌푸리고 말았다. 노마의 금안이 누가 봐도 ‘맞네. 너도 나가게’라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도 나갑니까, 디아시 경? 하지만 디아시 공께서―.”
“나가게.”
폰의 호위 대상은 낭랑한 목소리로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다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맥포이 가주가 내내 곱지 못한 시선으로 노마를 경계하고 있다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뭐가 좋다고 미소까지 지으시는 거야? 기 싸움인가?’
폰은 노마를 설득해 보고 싶었으나 이미 쫓겨난 맥포이 기사들이 문밖에서 너도 나오라며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바람에 더 버티지 못했다. 맥포이 기사들이 막무가내라는 것은 제국에서 유명했다.
하는 수 없이 폰은 부러 천천히 걸어 나가며 속으로 열심히 노마를 불렀다. 그러나 노마는 더 이상 이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마침내 문밖에 발을 디딜 때 폰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제 호위 대상을 돌아봤다. 닫히는 문틈으로 맥포이 가주의 뒤통수와 노마의 얼굴이 보였다.
폰은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제대로 본 게 맞나 싶어 눈을 깜빡이는데 탁, 코앞에서 그대로 문이 닫혔다.
‘뭐야. 저렇게 웃으신다고?’
노마에게 항시 장착된 예의 그 미소와는 완전히 달랐다. 폰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그는 놀란 나머지 한참 동안 멍청히 닫힌 문을 바라봤다.
‘……설마 진짜 맥포이 가주를 보러 오신 건가?’
그제야 노마가 밀란을 따라 굳이 여기까지 온 것이, 아이사 맥포이를 보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폰의 머리에 스쳤다.
복도로 쫓겨난 맥포이와 디아시는 대치하듯이 마주 보고 각자 대열을 맞추었다. 글렌 도그만 경 표정만 보면 전시 상태라, 숨 막히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 * *
harbaragi_syk
노마와 단둘이 남게 된 나는 앞에 앉은 그를 대놓고 탐색했다. 내내 사람 좋은 미소나 적당히 띠고 있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굴더니 갑자기 청할 게 있다고? 하! 왜 왔나 했더니 맥포이 가주를 인맥으로 이용할 마음이 있나 보군?’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나빴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선을 그은 건 내 쪽이 먼저긴 했다. 나 역시 생명의 은인에게 편지만 달랑 남기고 사라진 꼴이니 노마가 어색하게 구는 것에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 노마의 이러한 태도에 기분이 나쁠 이유가 없다.
그와 내가 무슨 사이라고. 우리가 전우애면 몰라도 특별히 우정을 나눈 것도 아니지.
……그래도.
나름 함께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툴레의 여관에 묵었던 때보다 선을 긋는 노마의 모습은 내게 꽤나 충격적이었다. 훅훅 다가왔던 때와 차이가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이제 보니 거리감을 잘만 지키는 인간이었던 건가.
그래서 처음 노마가 청이 있다며 주변을 물려 달라고 했을 때, 바로 반발심이 일었다. 흥, 내가 왜?
그러나 곧 무슨 말을 지껄이나 한번 보자는 마음이 반발심을 이겼다.
글렌을 시작으로 노마를 호위하던 디아시 기사들까지 나가기 시작했다. 의외로 디아시 기사들이 더 당황스러워하는 꼴에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상식적으로 내가 위험하지 노마 디아시가 위험하겠냐. 나는 일반인이고 저놈은 검기에 성력까지 쓰는 성기사인데.’
노마는 기타 등등이 만찬장을 모조리 빠져나갈 때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다. 살포시 눈을 내리깔고 있는 모습이 퍽 다소곳해 보이기까지 했다. 반쯤 내린 시선 덕에 더더욱 그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저 자그마한 머리통으로 뭔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
그런 생각을 하는데 노마가 불시에 입을 열었다.
“드디어 둘만 남았네요.”
노마는 나긋한 음성으로 말하곤 살며시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반짝이는 금안이 나를 담았다.
이것도 충분히 기습이라 나는 크게 움찔했다.
“아이사 님.”
순간 타이밍 좋게 탁, 하고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둘만 남은 만찬장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노마가 화려한 미소를 지었다. 만개하듯, 화사한 웃음은 몇 번 본 적 있는 그것이었다. 간만에 보는 그 화사한 얼굴에 소름이 돋아 나는 결국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뭐 하는 놈이야.’
내가 곧장 쏘아붙이려는 걸 알고 이런 걸까. 날 선 말이 목구멍에서 막혀 버렸다.
“아이사 님.”
내가 대답이 없자 노마가 다시 한번 소곤거리듯이 남의 이름을 불러 댔다. 귀가 간질거렸다. 귓바퀴부터 얕은 소름이 시작됐다. 기습 공격에 나는 이를 악물어 정신을 차렸다.
“뭡니까? 적당히 알은척하려던 거 아니었습니까.”
어금니를 씹으며 말한 탓에 절로 위협적인 목소리가 나갔다. 내가 경계심을 잔뜩 품고 으르렁거리자 노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놀라셨나요.”
그것도 잠시, 노마는 다시 웃음을 띠고 말을 이었다.
“공석에선 예법을 지키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뭐요?”
성질대로 윽박을 지른 후에 나는 멈칫했다. ……그래. 내가 분명 그랬지. 공석에선 존칭하고 예법대로 하자고.
그렇다. 만일 노마가 갑자기 나타나 내 측근들이 보는 앞에서 ‘아이사 님’이라고 나불거렸다면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귀족 사회에서 친분의 표현이기도 했고, 그중에서도 나는 특히나 이름에 박하게 굴기로 유명했다. 내 위엄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굉장히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그래요. 이게 맞지.”
이 거리감이 맞았다. 섭섭하고 화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섭섭한데. 화가 나는데?
“측근과 손님 앞이라 반가워도 꾹 참았습니다.”
내가 혼란에 빠진 틈에 노마가 반쯤 눈을 내리깔고 다시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수줍어 보이는 건 착각일 것이다.
“제가 잘했나요?”
그러면서 다시 반짝,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이 아닌가. 금안이 나를 향해 번쩍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부러 저러는 게 분명했다.
‘그래. 이 앙큼한……. 깜빡 속았다.’
어쩐지 정신이 혼미했다. 스멀거리며 올라오던 섭섭함과 분노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대신 카탐에서 이따금 느꼈던 들뜸 현상이 시작됐다.
“잘, 하셨습니다. 네.”
제길……. 나는 방방 뜨는 기분을 느끼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어쩐지 민망해 시선을 피한 것은 덤이었다.
내 대답에 노마는 기쁜 듯이 웃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동안 바쁘셨다고 들었습니다. 편지를 자주 보내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뭘……. 또 참으세요.”
분명 술은 세 잔 정도 마셨는데, 들뜨는 기분에 취하기라도 했는지 헛소리가 시작되었다.
“제가 당신께 그러는 것을 귀찮아하실지도 몰라서요.”
“고작 편지인데. 별걱정을 하십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퍽 아련하게 들려 나는 그를 위로한답시고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그럼.”
“네?”
“제가 참지 않아도 됩니까?”
아, 편지.
순간 무슨 소리인가 했다.
“네. 그 정도야.”
흔쾌히 허락이 떨어지자 노마가 뭐가 좋은지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에 나는 술을 들이켰다. 언제 나빴냐는 듯 기분이 빠르게 나아졌다. 흥흥. 속으로 콧노래를 조금 부르기까지 했다.
기분이다.
“그래서요.”
어쩐지 들뜬 나는 술잔을 테이블에 탁 내려놓고는 운을 띄웠다. 노마가 눈을 깜빡였다.
“사람 물려 달라는 게 청은 아닐 거 아닙니까? 들어나 봅시다.”
나는 그러면서 검지를 들어 올리며 제법 엄격하게 덧붙였다.
“참고로, 미리 말하는데 난 내게 이득이 없으면 아치 부탁이라도 안 들어주니 섭섭히 생각 마세요.”
그 말에 노마가 하하, 하고 웃었다. 전에도 생각한 것이지만 그는 참 이상한 지점에서 웃는 사람이었다.
“맥포이 성에는 고양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참으로 뜬금없었다.
“쥐잡이로 몇 마리 있을 겁니다만 그건 어느 성에 가나 비슷하지 않나요? 갑자기 고양이는 왜요?”
“그렇다면 고양잇과의 맹수도 괜찮습니까?”
……맹수? 고양이가 있다고 고양잇과 맹수가 괜찮을 리가 있나.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노마를 경계했다. 생각해 보니 그는 은근히 장난기가 있었다. 노마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여전히 산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사 님도 보신 적이 있습니다. 카탐에서.”
노마는 진심이었다.
맹수라니. 나는 살면서 맹수를 본 적이 없는데?
* * *
harbaragi_syk
까악―.
바다 갈매기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곧 배가 정박할 것이다. 육지는 일주일 만이었다. 붉은 머리칼이 바닷바람에 넘어가며 뭇 여인네들의 환호를 받는 잘생긴 얼굴이 시원하게 드러났다.
가노는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 항구와 성채를 말없이 노려봤다. 딱히 저 마을에 유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지금 기분이 매우 더러웠다. 그뿐이다.
가노의 손에 들린 종이 쪼가리가 형편없이 구겨졌다. 그는 곧이어 시퍼런 바다로 구겨진 종이를 던져 버렸다.
맥포이 가주의 명에 따라 남부의 키소를 정리하고 또다시 여차저차 상단 일을 해결하느라 귀환이 터무니없이 늦어졌다.
키소를 빠르게 정리한 것까진 좋았다. 묘한 초조함과 불안감은 상단에 문제가 생겨 다시 배에 올랐을 때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방금, 정보원이 보낸 전서구가 도착했다.
전서구가 가져온 서신에는 갑자기 바뀐 디아시 사절단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바뀐 건 하나였다. 밀란 디아시 이름 아래에 ‘노마 디아시’가 추가된 것.
탄타로스에서 아이사와 살아남은 남자. 보름간 아이사와 붙어 다닌 남자. ……그가 갑자기 맥포이에 온다고?
불행히도 가노는 감이 매우 좋았다. 망할 디아시는 가주에게 흑심이 있는 게 분명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