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밀란 디아시 뒤에 서 있는 사람은 거꾸로 봐도 카탐에서 헤어졌던 노마 디아시였다.
세상천지에 저 얼굴을 가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짝반짝거리는 사람이 둘일 리는 없었다. 아니, 사실 저 얼굴이 하나 더 있긴 한데 그 밝기와 인상이 다르다.
‘뭐야 이 자식, 진짜야? 진짜 노마 디아시냐?’
머릿속이 물음표와 함께 뱅글뱅글 돌아갔다. 디아시에 꽂아 놓은 정보원에 의하면 노마 디아시는 과보호에 의해 방에서도 못 나올 정도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 사람이 정반대에 있는 맥포이까지 왔다고? 곧 만날 일이 있을 거라는 게 이거였나?
다소 느리게 상황 파악을 마친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뒤늦게 좌중이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에리카가 여전히 삿대질 중인 내 검지를 살며시 접고 팔을 끌어 내렸다.
물론 에리카 역시 노마의 각별한 외관에 잠시 정신을 놓긴 했지만 그녀는 회복이 빠른 편이었다. 에리카는 와중에 ‘가주님, 손님맞이는 망한 것 같습니다’라는 눈빛을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디아시의 노마가 맥포이 가주님을 뵙습니다.”
에리카에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도 안다는 눈빛을 쏘아 보낼 때, 내게 콕 지목당한 노마 디아시가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었다. 여전한 미성에 나는 손끝을 움츠렸다.
‘노마 디아시 맞잖아.’
나는 오늘 노마 디아시를 보게 될 거란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다만, 솔직히 일전에 노마의 편지를 봤을 때 ‘곧 만나게 될 거다’라는 대목에서 그와 재회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은 있다.
“…….”
나도 모르게 왼 눈썹이 서서히 올라갔다. 무언가 못마땅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상과 너무 다르지 않나.
생각보다 빨리 재회하게 된 노마는, 정말 밀란 디아시를 호위하러 온 디아시 기사 중 한 명처럼 굴었다. 예를 갖추는 모습은 어느 소설에나 나올 법한 훌륭한 기사의 모습이었다.
그는 칼같은 각을 자랑하는 인사를 마치고 곧바로 다른 기사들처럼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너무나 기사다운 몸짓과 표정에선 단호함마저 느껴져 나는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다분히 사무적인 그 미소와 태도는 마치 ‘나는 당신 처음 봐요’ 하는 것만 같았다.
내 기억에 노마 디아시는, 물론 그를 길게 본 건 아니지만……. 아무튼 불필요할 정도로 정이 많고 친절한 남자가 아니던가. 쓸데없이 막, 사람 보고 실실 웃지를 않았던가. 멋대로 친밀하게 굴며 남의 이름을 부르질 않았던가.
‘그랬으면서. 그런데 갑자기 생판 남처럼 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지레 움찔했다.
‘우리가 생판 남이긴 하지. 돌았군, 아이사 맥포이.’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밀란 디아시 쪽을 바라봤다.
가주 대리 자격으로 처음 맥포이에 방문한 밀란은 지금껏 본 것 중 가장 유감스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표정은 ‘저 어린 가주가 드디어 정신을 놓은 건가’ 싶은 얼굴이라 나는 잠시 아득함을 느꼈다.
“먼 길을 오시느라 피로하실 테니, 먼저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디아시 공.”
나는 속으로 이불을 뻥뻥 차며 겉으론 최대한 당당하게 말했다.
밀란 공과 그 측근을 위해 준비한 방까지 직접 안내하는 내내 내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밀란 공에게 맥포이 성의 건축 양식과 역사를 읊으면서도 내가 지금 뱉는 말이 맞나 싶었다.
‘그래, 제집 돌아갔고 제 동생이랑 다 풀었다 이거지. 너도 점잔을 떠는 디아시라 이거지.’
디아시 사람들에게 맥포이 성을 자랑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에도 나는 저따위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카탐까지는 잘만 방긋방긋거리고 친한 척했으면서. 아이사 님은 개뿔.’
모르는 사람처럼 구는 노마에 당황스러움을 느낀 다음은, 놀랍게도 섭섭함이었다.
그걸 깨닫자 잠시 혀를 깨물고 싶었지만 섭섭함도 잠시, 곧 빠르게 분노가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팍,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뒤에서 걷는 노마에게 시선이 갔다. 물론 그 시선은 살기등등한 것이었다.
‘저런 괘씸하고 앙큼한 작자를 봤나.’
성질 같아선 당장 멱살을 쥐어다가 ‘당신 나 모르냐. 그새 기억이라도 잃은 거냐’ 하고 묻고 싶었다.
“큼―.”
그럴 때마다 에리카가 귀신같이 눈치채고 헛기침을 해 내 충동을 저지했다. 정말이지 일당백의 보좌관이었다.
한편 에리카는 전전긍긍했다.
‘가주님 왜 저러셔. 전에는 은인이라고 하시더니?’
에리카가 느끼기엔 노마 디아시를 보는 가주님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그저 노마 디아시가 아름다워서 헛소리를 하신 줄 알았더니, 니콜라스 디아시가 싫다고 노마 디아시까지 아주 적으로 아시는 건가? 왜 자꾸 노려보시는 거야.’
디아시 형제는 퍽 닮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한편 밀란은 겨우 제 어깨만치 오는 맥포이 가주 옆을 묵묵히 걸으며 생각했다.
‘맥포이 가주의 기색이 시시각각 변하는 걸 보아 큰일을 겪어 날카로운 듯하구나. 필시 노마를 보고 탄타로스의 일이 생각난 모양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 맥포이의 피를 이어받아 필연적으로 아름다운 것에 약한 이가 한 명 더 있었으니.
바로 맥포이의 어린 후계자 아치 맥포이였다.
* * *
harbaragi_syk
아치는 벌써 고모와 며칠째 냉전 중이다.
‘이번에야말로 고모의 나쁜 습관을 고치고 말겠어.’
열한 살 아치는 무슨 일이 벌어질 때마다 제게 모든 걸 숨기고 혼자 감당하려 드는 고모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소엔 넌 다 컸다며 엄하게 굴면서, 막상 일이 터지면 제 눈과 귀부터 막기 바빴다.
‘고모 말마따나 나도 다 컸다고. 이번 겨울이 지나고 봄이 지나면 나도 열두 살이란 말이야!’
고모 나름의 보호라는 걸 알지만. 다 저를 소중히 여겨 그런다는 걸 알지만. 뭔가 알아도 어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없다는 걸 알지만.
이번 일로 아치는 확실히 깨달은 게 있었다.
이러다간 고모가 정말 죽을 위기일 때, 자신은 두 손 두 발 놓고 강 건너 불구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기분은 정말이지 비참하고 끔찍하다는 사실을.
‘바보 같은 고모!’
그래서 아치는 지금도 소리 없는 전쟁 중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오늘. 가문의 유일한 도련님은 해 질 녘에나 온다는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꽃단장에 시달렸다.
이때 꽃단장은 어린이가 버티기엔 매우 지루하고 힘든 작업이었다. 뽀득뽀득 온몸을 씻김 당한 것부터 시작해 바늘로 일일이 기워야 하는 불편한 연회복까지. 안 그래도 고모와 냉전 중이라 좋지 않은 기분은 쉽게 바닥을 찍었다.
측근을 겹겹이 두르고 나타나서는 절 보자마자 눈썹을 치켜뜨고 잔소리를 시전하는 ‘맥포이 가주’를 마주쳤을 때, 섬세한 어린이의 기분은 더욱 가라앉았다. 결국 더 못 참고 아랫사람들 보는 앞에서 고모와 서로 삿대질을 하며 왁왁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고모는 진짜 바보야! 이번엔 정말 용서 안 해 줄 거야!’
그러나 아치 맥포이는 갓난아기 시절부터 후계자로 키워진 어린이였다. 최근에야 이르게 사춘기를 겪으며 고모와 대판 싸우곤 하지만, 아치는 자리의 책임을 알고 어른들의 사정에 밝을 수밖에 없었다.
고모 바로 옆, 한 발짝 뒤에 서서 귀한 손님인지 뭔지를 기다리던 아치 맥포이는 예절 교사에게 배운 대로 꼿꼿한 자세를 하고 제자리를 지켰다.
‘재미없어. 다리 아파. 고모 미워. 방에 가고 싶어.’
대충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제국 역사 수업에서 배운 ‘디아시 가문’의 특징대로, 티끌 하나 없는 새하얀 후드 자락을 사라락 내리며 등장한 웬 기사님을 보기 전까지 그랬다.
“……!”
아치는 별안간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몸을 굳혔다. 훗날 에리카가 회고하길, 가주님과 도련님 두 분이 동시에 똑같은 모습으로 굳는 걸 보고 피는 못 속인다고 생각했다고.
‘랭터스.’
아치는 속으로 누군가를 불렀다.
한참 시위 중인 아치에게 시모어 부인은 도련님 심심하지 말라고 책을 몇 권 골라 줬다. 고모가 애타게 방문을 두드리며 한 번 나와 보라 할 때, 아치는 방에 틀어박혀 주야장천 책이나 읽고 있었던 것이다.
아치 맥포이는 작년, 열 살을 기점으로 또래보다 이르게 성력이 발견되었다. 외관은 어머니 록시를 꼭 빼닮고 재능은 아버지 아이노를 닮았다며 그의 어린 고모가 퍽 기뻐했다.
그런 이유로 최근 아치의 관심사는 ‘성력’이었다. 자연히 성기사 무용담, 성기사 위인전 10선 같은 것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시모어 부인이 골라 준 책 중,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기사로 뽑히는 ‘랭터스 경’의 일대기를 적은 책은 그야말로 아치의 11년 인생에 커다란 영감을 주는 것이었다.
‘래, 랭터스?’
아치는 하얀 후드를 내리면서 드러난 노마 디아시의 외관을 보자마자 자신이 가장 애정하고 동경하는 성기사 랭터스가 꼭 저렇게 생겼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심지어 랭터스는 ‘랭터스 디아시’가 아닌가?
아치는 동경의 대상과 우연히 마주친 사람의 심정이 되어 넋이 나간 듯이 노마 디아시를 눈으로 좇았다. 이후 저녁 만찬 때도 생선 하나 제대로 썰지 못하고 노마만 오매불망 바라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붉은 육류를 꺼리는 디아시에 맞춘 만찬 속에서, 맥포이 두 명의 시선은 노마 디아시에게 자석이 달린 것처럼 질질 끌려다녔다.
와중에 두 시선은 다른 것이었다. 시선 하나는 분노와 혼란이 넘실댔고, 또 다른 시선엔 설렘과 동경이 가득했다.
보라색 눈동자 두 쌍이 나란히 노마 디아시를 향한 채 흔들리니, 에리카는 슬슬 거슬리기 시작했다.
거슬리는 건 에리카뿐만이 아니었다. 퍽 불안한 맥포이 가주의 시선에 결국 만찬 중에 밀란이 입을 열었다. 식사 중에 잡담하지 않는 디아시의 엄격한 가칙에 어긋나는 것이었지만, 대충 식사가 끝날 무렵이긴 했다.
“맥포이 가주는 너무 걱정 마시오. 디아시 가주와 대신관이 놈의 봉인을 유지하고 있소. 이번에 맥포이를 중심으로 놈의 봉인을 풀었던 주모자들을 샅샅이 잡아들이기도 했으니, 별일이 없다면 봉인이 풀리지 않을 것이오.”
‘제길―.’
나는 ‘부끄럽게도 잠시 그쪽은 신경도 쓰지 못했고, 내가 골몰한 이유는 댁 장남이 날 모르는 척했기 때문입니다’라곤 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급하게 찾아온 늙은이가 할 말은 아니다만, 큰일을 겪은 후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건 무엇보다 중요하니 각별히 신경 쓰시오.”
밀란의 근엄한 훈화가 이어졌다. 나는 몹시 사무적인 웃음을 지으며 나이프를 꽉 쥐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아니, 댁 아들이 사람 신경 쓰이게 하는걸!’
만찬이 끝날 무렵, 잠에 들 시간이 지난 아치 맥포이가 가장 먼저 쫓겨나듯이 물러갔다. 방에 돌아가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을 할 땐 언제고, 이제 와 가기 싫은 티를 팍팍 내며 시모어 부인 손에 끌려갔다.
밀란 디아시 역시 취침 시간이 빨랐다. 그가 만찬을 오래 즐기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디저트를 사양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밀란의 뒤를 따라 대부분의 디아시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의외로 자리에 남은 것은 여전히 날 처음 보는 듯이 구는 노마 디아시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반대편에 곱게 앉은 미남자를 바라봤다. 마침 내 시선을 느낀 그가 나를 향해 살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식기를 완전히 내려놨다.
“맥포이 가주님께 청할 것이 있습니다.”
그가 대뜸, 특유의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잠시 주변을 물려 주시겠습니까.”
내 왼 눈썹이 팍, 신경질적으로 올라갔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