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젠장.’
실로 오랜만에 꾸는 악몽이었다.
나는 급하게 협탁에 놓인 물을 들이켰다. 컵을 쥔 손이 덜덜 떨려 턱과 목을 타고 물이 반쯤 흘렀다.
심호흡을 몇 번 한 후에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기억의 굴레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 뒤에 일어난 일들이 차례대로 머릿속을 흔들었다.
징그러운 웃음에 바짝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남자는, 닉스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그대로 고꾸라졌다. 비쩍 마른 그 모습은 아사 직전처럼 보였으니 갑자기 기절한 것이 놀랍진 않았다.
내 기억에 오필리아는 발끝으로 툭툭, 기절한 닉스를 차 보다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네 다리를 고쳐 주다가 기력을 다 쓴 모양인데? 뭐지?”
나는 이쪽을 향해 달려오던 오필리아를 보고 웃던 닉스가 꺼림칙해서 꽤나 단호하게 말했던 것 같다.
“그냥 두고 가자. 아무래도 변태 같아.”
“널 도와준 사람인데. 여기 두고 갔다간 짐승 밥이 될 거야. 게다가 이 사람, 성력이 되게 강해. 가주님께서 거두어 주시지 않을까?”
“뭐라는 거야. 야, 눈빛 봤어? 미친놈이 분명해. 눈이 완전히 돌아선 이상한 헛소리도 했다니까. 두고 가자.”
오필리아는 아주 어린 나이에 혼자 숲에 버려진 과거가 있다.
내 아버지는 어느 날 숲속에 버려진 오필리아를 데려와 오랜 친구의 딸이라고 소개했지만, 맥포이 가주가 고아 소녀의 성력이 강했기 때문에 성에 데려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오필리아는 숲속에 혼자 버려졌던 제 과거가 생각이 나서 비쩍 마른 닉스를 두고 가기 어려웠을지도 몰랐다. 나는 오필리아가 가진 그 슬픔과 외로움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에 실랑이를 길게 이어 가진 않았다.
그 당시 나에게 아버지는 무척이나 현명한 사람이었으니까, 이상한 사람이면 아버지께서 잘 쫓아낼 거란 막연한 믿음도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기절한 닉스를 숲에 버리고 갔더라도 그것은 기어코 오필리아가 사는 맥포이 성문을 두드렸을 것이다.
닉스를 일단 본성에 데려가자고 정했음에도, 나는 이상하게 불안감을 떨칠 수 없어서 오필리아의 옷깃을 잡고 늘어졌던 것 같다.
“진짜 뭔 범죄자같이 웃었어. 이상한 애 같아. 마음에 안 들어. 역시, 지금이라도 두고 가자.”
“아이사, 걱정 마. 혹시 무슨 일이 생겨도 넌 내가 지켜 줄게. 알잖아, 나보다 강한 사람은 없다니까? 딱 봐도 비실한 것이 내 주먹 한 방이면 될 것 같은걸.”
그렇게 말하는 오필리아의 목소리는 퍽 자신감이 넘쳐서, 나는 헛웃음을 치며 ‘그래. 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세니까, 네가 날 지켜 주겠지’ 했다.
“그리고 저 애. 고작 우리 또래처럼 보이는걸. 다, 괜찮을 거야.”
기사에게 업혀 실려 가는 닉스를 퍽 안타깝게 바라보며 오필리아가 그렇게 중얼거렸던 것 같다.
놀랍게도 그 당시, 숲속에서 처음 조우한 닉스는 육안상으로 굉장히 어려 보였다. 그것 역시 사술이었겠지만 당시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술이란 것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으니까.
숲에서 주운 비쩍 마른 변태가 2년 전, 황태녀와 디아시 가문에 그 지랄을 낸 범죄자일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수배령이 내려진 전 고위 신관 닉스는 마흔에 가까운 나이라고 알려져 있기도 했다. 고작 나와 오필리아 또래로 보이는 닉스의 외관은 맥포이 사람들의 경계를 푸는 데도 한몫했다.
닉스가 곧 죽을 것처럼 빈약해 보여서 그랬을까. 성력을 다루는 인재를 아꼈던 아버지는, 내 기대와 다르게 너무나 쉽게 닉스를 거두었다.
이상할 정도로, 쉽게.
맥포이의 아가씨를 성력으로 치료한 인재라며 포상까지 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오필리아를 향해 짓던 그 섬찟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던 나는 놈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그 뒤로도 오필리아를 보는 닉스의 눈이 내가 보기엔 너무나 더럽고 음습해서, 나는 그것이 도저히 우리 또래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을 처음 만나 그것이 맥포이 성으로 들어왔던 날까지 복기한 끝에, 내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졌다. 나는 얼굴에 범벅으로 흐른 식은땀을 거칠게 닦았다.
‘이제 보니 그 숲속에서, 그때도 오필리아를 찾고 있던 거였구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그것은 피할 수 있던 게 아니었나.’
어쩐지 숨쉬기가 어려워 창문을 열어젖혔다. 점점 겨울을 향해 가는 밤바람은 몹시 차가웠다. 찬바람을 맞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의 검은 머리칼이 산발로 굽이쳤다.
“오랜만에 별 개꿈을 다 꿨군.”
나는 낮은 목소리로 허공에 중얼거렸다. 사실 키소보다 급한 일은 오필리아를 잡아다가 하나하나 따져 묻는 거였을 것이다.
내게 갑자기 <오필리아와 밤>에 대한 기억이 생긴 것처럼, 오필리아 역시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탄타로스를 찾아낼 수 없다.
‘넌 어떻게 탄타로스를 찾아냈지. 탄타로스를 알면서 왜 집단 죽음 사건엔 나서지 않았을까. ……왜 다르게 행동하지?’
오필리아를 잡아다가 고문을 하든 회유를 하든 그 애가 아는 것을 모조리 알아내는 것이 현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답지 않게 이제 와서 그 앨 피하고 있다는 건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나는 아직 <오필리아와 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누구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물었다간 미친 사람 취급을 할 게 뻔했다. 좋게 말해 봐야 메헤라의 계시 같은 것을 받았냐고 하겠지.
“…….”
멍하니 창 바깥을 바라보길 한참, 희미하게 날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성채의 실루엣이 푸른빛으로 점점 또렷해졌다. 이른 시간이었으나 벌써 성채 곳곳엔 드문드문 불이 켜졌고 굴뚝을 타고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맥포이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그날, 아치를 안고 본 것과 완전히 달랐다.
한참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가만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잠도 오지 않을 거 같았다.
* * *
harbaragi_syk
“밀란 디아시가 직접 온답니다.”
“뭐라?”
순간 어젯밤 잠을 설쳐서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밀란 디아시가 직접 온답니다.”
에리카가 영혼 없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뭐야, 불확실하다더니. 결국 직접 온다고? 걔넨 명단을 왜 이제야 보낸대?”
거지 같은 디아시의 일솜씨에 반사적으로 성질을 부렸다.
“디아시 쪽에서 갑자기 일정을 조금 앞당기더니 서신이 꼬인 모양입니다.”
“웃기는 놈들. 그러게 왜 갑자기 당겨서는. 나이도 있는 분이 여까진 왜 오시는 거야.”
“밀란 디아시가 장남을 각별히 아낀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노마 디아시가 사라지고 가주직을 5년 버틴 것도 기적이었죠. 그런 걸 생각해 보면, 전 당연히 직접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하지만…….”
“무엇보다 십수 년 실종됐던 사람을 찾아 줬으니 그쪽에서도 이 정도 성의 표시는 해야 한다고 봅니다.”
에리카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밀란 디아시는, 좀 불편한데.”
나는 불편한 티가 팍 나는 얼굴을 하고 중얼거렸다.
“밀란 디아시 편한 사람이 제국에 어디 있겠습니까. 황제도 디아시 공은 어려울걸요?”
“황제야 뭐 나도 불편해하는 좀팽이 아닌가. 아니, 그래도 그렇지 굳이 동쪽 끝에서 서쪽 끝에 오다니. 은퇴하신 분이 말이야. 디아시 공이 직접 오면 남들 눈에 상당히 의미 있어 보이니 좋기야 한데…….”
“요즘의 디아시 공은 은퇴했다고 보긴 어렵죠. 대뜸 가주 대리를 맡더니 올해 대회의까지 직접 참석한다고 하니까요.”
니콜라스 디아시는 닉스를 완전히 제거할 방법을 찾기 전까지 그 봉인을 유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성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바그다트에 완전히 발이 묶인 셈이었다.
그게 은근히 쌤통이라 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명단이 오늘 왔다곤 하나 크게 바뀐 것은 없습니다. 다만, 명단에 새―.”
“그나저나 밀란 디아시라니. 이게 얼마 만이지?”
나는 밀란 디아시가 직접 온다는 사실에 새삼 긴장해 에리카가 하려던 말을 잘라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어디 가서 기 싸움으로 져 본 적이 없는데, 밀란 디아시 공은 딱 마주쳤을 때 압박감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중압감이 있다고 해야 하나. 사람 기운이 그랬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열일곱 살 때 일이렷다. 지금은 그 기세에 맥없이 눌리고 그러진 않으려나?’
내가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명단을 손에 쥔 에리카는 밀란 디아시 아래에 적힌 이름을 몇 초간 바라봤다.
‘뭐, 상관없으려나.’
에리카는 우리 가주께서 안 그래도 바쁜데 밀란 공만 말씀드리면 됐지 굳이 명단을 하나하나 보고할 필요는 없겠거니, 하고 넘겨 버렸다.
다음 날, 제 가주가 멀쩡한 사람에게 삿대질을 하며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냐고 물을 줄도 모르고.
* * *
harbaragi_syk
이튿날 해가 지기 직전, 맥포이에 당도한 손님을 맞기 위해 나는 측근들을 이끌고 친히 내성 문 앞까지 나섰다.
제국에서 롬닥의 행렬만큼 유명한 것이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디아시 기사들의 행렬이었다. 명성이 자자한 디아시의 행렬을 보기 위해 모인 영지민들이 또다시 기다란 행렬을 만들었다. 꽤 장관이었다.
마침내 저 멀리 열을 맞춘 디아시 기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앞서서 달리는 이는 찰랑이는 은발로 보아 밀란 디아시가 확실했다.
은발을 보니 잠시 노마 디아시가 떠올랐지만 맹세코 잠시였다.
‘무서운 인간. 그동안 하나도 안 늙었군.’
은퇴가 무색하게 밀란 디아시는 풍채 또한 그대로였다. 신이 디아시를 빚을 때만 집중했다는 사실이 또다시 증명된 순간이었다.
“맥포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맥포이 가주가 밀란 디아시 공을 뵙습니다.”
말에서 내린 밀란 디아시를 향해 내가 예를 갖추었다. 그는 이 제국에서 마땅히 내가 예를 갖춰야 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동시에 나는 위엄 있는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조그마한 체구가 믿기지 않는 박력 있는 목소리는 가주로서 나의 장점이다.
여기까진 내가 생각해도 괜찮았다. 열일곱 살 때처럼 밀란 공의 기에 맥없이 눌리지 않았다는 것부터가 성공적이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귀신을 본 사람처럼 굳지만 않았다면, 완벽했을 것이다.
“에리카.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내가 본 헛것이 믿기지 않아 그것을 가리키며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뱉어 내지 않았다면, 어느 정도 수습은 가능했을 거다.
“……?”
에리카는 지금껏 들은 가주님의 헛소리 중 단연 최고라고 생각하며 무섭게 얼굴을 굳혔다. 그러나 가주님은 한술 더 떠 ‘저거 노마 디아시 아니야?’라고 했다.
디아시 쪽은 물론 맥포이 쪽까지, 모두가 술렁거렸다.
에리카는 예법에 죽고 사는 디아시의 선대 가주이자, 현 가주 대리의 낯이 삽시간 유감스럽게 굳는 것을 목격하고 아찔함을 느꼈다.
보좌관 10년째. 에리카는 다양한 돌발 상황을 헤쳐 나간 경험이 있다. 그러나 이번엔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미치셨군. 진작 주치의에게 머리를 살피라고 했어야…….’
에리카는 부디 가주께서도 망했음을 느꼈길 바라며, 아이사의 검지 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곳엔 번쩍이는 후광을 두른 천사가 서 있었다. 천사가 방긋 웃었다.
“어우, 씨.”
에리카는 저도 모르게 된소리를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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