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디아시 경. 폰 바인스입니다.”
“바인스 경. 들어와라.”
폰이 방 안에 들어서자 노마가 읽고 있던 책을 탁, 덮었다.
‘오늘도 책을 읽고 계시네. 대체 매일같이 뭘 읽고 계시는 거야?’
폰은 기사로서 우수한 동체 시력을 자랑했다. 노마가 신속하게 책을 옆으로 치웠지만 폰은 보았다.
‘―랑이란 무엇인가.’
앞에 두 글자 정도 못 봤지만 분명히 제목이 저랬다. 폰은 속으로 흠칫했다.
랑이란 무엇인가? 랑?
설마, 사랑?
‘낭만 소설이라도 보시나……?’
폰은 그렇게 무료하신가, 하고 생각하며 노마 쪽으로 바구니를 내밀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바구니에서 폴짝 뭔가 튀어나왔다. 노마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었다.
“건강해졌구나.”
“손으로 직접 만지시면 또 재채기를 하십니다, 디아시 경.”
노마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양 제게 달려든 검은 고양이를 안아 주었다.
카탐에서 만난 고양이였다. 어미를 찾아 주지 못하고 고양이가 영 노마에게서 떨어지기 싫어해, 결국 디아시까지 데려오게 되었다.
잠시 의도치 않게 생이별을 하게 된 사연은 노마가 이유 없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인데, 의원이 아무래도 고양이 털 때문인 듯싶다는 청천병력 같은 소리를 한 게 한몫했다.
의원은 고양이님 꼬리에 부상이 있고, 장거리 여행 중 상태가 더욱 안 좋아진 듯하다며 고양이를 데려가 버렸다. 그렇게 디아시에 도착한 둘은 생이별을 했다.
마침내 꼬리 골절 치료가 끝나 폰이 직접 모셔 왔으니, 노마는 고양이와 거의 두 달 만에 만나게 되었다.
오랜만임에도 고양이는 노마를 기억하는 듯이 친밀하게 굴었다. 두 달 만에 본 것치고는 영 자라질 않아 걱정하던 노마는 제 무릎을 파고드는 아기 고양이를 보고 가슴 찡함을 느꼈다.
“영리하구나.”
노마의 목소리에 뿌듯함이 실렸다.
“디아시 경. 그런데 고양이님 말입니다. 아, 고양이님은 이름이 있습니까?”
“떨어져 있는 동안 지었다. 앙투아네트.”
“……아, 예. 멋진 이름입니다.”
폰은 예상치 못한 거창한 이름에 ‘너무 사람 이름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어쨌든, 전문 의원 말론 고―. 아니, 앙투아네트 님이 아무래도 고양이가 아닌 것 같다고 합니다.”
“고양이가 아니라니. 이렇게 조그맣기만 한데?”
앙투아네트를 들어 올린 노마가 그를 요리조리 살피며 물었다.
“그게……. 실은 제 의견을 물으셔도 고양이는 아닌 것 같은 것이, 앙투아네트 님 이빨 보신 적 없으십니까?”
앙투아네트는 노마에게 이를 드러낸 적이 없다. 극호감의 표시였다. 앙투아네트는 노마 외 모두를 경계하며 하악질을 했는데 그때 드러나는 송곳니와 발톱은 누가 보아도 맹수의 그것이었다.
노마에게 앙투아네트를 넘겨받은 의원과 사용인들은 기함했지만, 극성맞은 아버지와 동생이 싸고돈 탓에 외부와 차단된 노마는 그 소란을 몰랐다.
“의원이 주변에 정말 어미가 없었냐고 물어봤습니다. 성인 남성보다 큰, 표범 같은 맹수요.”
노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앙투아네트를 내려다봤다. 아가, 그게 정말이니? 하는 눈빛이었지만 앙투아네트는 순진무구한 얼굴을 하다 노마 품에 파고들 뿐이었다.
“앙투아네트가 흑표란 말인가? 카탐을 떠나기 전에 몇 번이고 어미를 찾아 주려 했다. 어미 고양이를 찾긴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렇게 큰 동물은 보지 못했는데…….”
“카탐 근처에 초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국 한가운데, 그것도 카탐처럼 큰 도시에 흑표처럼 커다란 맹수가 발견된 경우는 역사서에도 없는 일이랍니다. 그래서 의원도 긴가민가한 모양입니다. 돌연변이인지 잘 크지도 않고요.”
“…….”
“아무튼 의원 말로는 그렇답니다. 조만간 직접 찾아뵙겠다는데 그, 정말 키우실 겁니까? 조그마해도 맹수입니다. 디아시 경께선 고, 앙투아네트 님 털에 기침도 하시고.”
“어미도 없고 두 달째 크지 않는 걸로 보아 앙투아네트를 야생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무리다.”
폰은 노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맹수라지만 제 눈에도 앙투아네트 님은 너무 조그마했다. 정말 더 이상 크지 않는 돌연변이라면 야생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앙투아네트가 나를 잘 따르고 나 역시 앙투아네트가 무척 귀여우니, 재채기가 대수일까.”
노마는 그러면서 앙투아네트와 눈을 마주쳤다. 앙투아네트는 새까만 털에 짙은 푸른 눈을 가졌는데, 신기하게 햇빛에 닿으면 푸른 눈이 언뜻 보라색으로 보일 때가 있었다.
이를 본 노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닮았다.’
속으로 키득키득 웃던 노마는 곧 빠르게 풀이 죽었다. 앙투아네트가 처음 제 품에 안긴 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날은 여러모로 노마에게 충격적인 하루였다. 앙투아네트를 데리고 여관에 돌아왔지만 편지만 남기고 사라진 그녀.
그리고 그 아침에 충격적인 말을 들었던 것이 차례대로 기억났다. 제 감정을 자각한 것에 들떠, 앙투아네트를 보기 전까지 그 중요한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날 아침 분명 소중한 약혼자가 있다고 하셨지.’
노마는 그녀 입으로 ‘소중한 약혼자’가 있다고 하는 말을 들은 바 있다. 당시 왜 그렇게 가슴이 철렁거렸는지 그때의 노마는 알 수 없었다.
“…….”
폰은 아기 맹수를 안은 채로 갑자기 처연한 얼굴을 하는 미남자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또 왜 저러시지, 하고 눈치를 보는데 순간 노마가 결연한 얼굴을 했다. 폰은 벌써 불안했다.
현재 노마의 머릿속은 아이사 한정으로 꽃으로 가득했다. 그야말로 꽃밭이었다. 그녀에 관한 일이라면 이성보단 감성이 그를 지배했으며, 도덕적 사고방식은 통하지 않고 초특급 긍정 회로만이 돌아갔다.
약혼자? 부군도 아니고 알 게 뭐람. 소중한? 다른 의미의 소중함일 수도 있지.
노마가 진짜 미쳤다면 처음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에 취해 은은히 돌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언젠가 아이사가 그에게 지독한 옛 제국법과 가칙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라고 했던 것도 크게 한몫을 했다.
“이번에 롬닥에 대한 답례와 내 일에 대한 감사로 아버지께서 직접 맥포이에 가신다고 들었다.”
노마가 상쾌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일주일 후에 출발하는 그것 말입니까? 예. 한 달 후에 황도에서 대회의가 열리니, 디아시 공께서 직접 맥포이에 들렀다가 그길로 바로 대회의에 참석하실 겁니다. 가주께선 당분간 닉스의 봉인에만 집중하셔야 하니까요.”
한 달 후, 연말에 열리는 대회의가 있다. 귀족 회의 중 단연 가장 중요한 회의였다. 굵직한 예산을 확정하는 등 영지의 이익을 좌지우지하는 큰 규모의 회의인 만큼 유력한 대귀족은 빠짐없이 참석했다.
제국 모든 대귀족이 황도로 모이니, 건국제 다음으로 화려한 황도의 사교 시즌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흠……. 다음 주까진 못 참을 것 같은데. 앞당길 수 있으려나?”
노마가 앙투아네트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못 참다니, 뭘? 절제미의 대명사인 노마 디아시 경이 맞나. 폰의 동공이 흔들렸다.
“바인스 경. 아버지를 뵈어야겠다.”
아기 표범을 조심스럽게 안고 둥개둥개하면서 노마가 퍽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쓸데없게도 누구든 홀릴 수 있는 그런 음성이라 폰은 결국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노마는 앙투아네트도 건강해졌겠다, 아이사 님을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만만했다. 그러다 결국 앙투아네트의 털 때문에 에취, 하고 재채기를 했다.
* * *
harbaragi_syk
똑똑.
“아치. 아치야, 고모 한 번 보재도. 아치?”
오늘도 식당에 내려오지 않는 아치 때문에 나는 방문 앞에서 애타게 아치를 불렀다.
“아가. 고모가 미안하다니까. 그렇다고 고모랑 밥도 안 먹니.”
다시 똑똑.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인내심이 있는 편은 아니라 순간 또 욱, 하고 말았다.
“아, 진짜! 야!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고모 안 볼 거야? 아주 안 보고 살 거야? 앙? 그럴 거야? 누가 방구석에 처박혀서 밥 먹으래? 아, 됐어! 나도 됐다, 이 녀석아!”
곧 끼이익 소리가 나며 문이 한 뼘 열렸다. 겨우 한 뼘 열린 문 사이로 한심하단 표정을 한 시모어 부인 얼굴이 보였다.
시모어 부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오늘은 그냥 가시라 했다. 날 보는 눈빛에서 ‘애가 둘이군’ 하는 타박이 역력했다. 그 눈빛에 나는 움찔했다.
한 뼘 사이로 보이는 아치의 완고한 뒷모습을 보니 오늘도 후퇴할 수밖에 없어 보였다. 결국 얌전히 내 방에 돌아와 성질대로 쿠션을 아무 데나 팍 던져 버렸다.
“누굴 닮아서 저렇게 잘 삐지고 고집이 센지.”
그리곤 침대에 몸을 던졌다. 시모어 부인이 각오하라고 한 것처럼 과연 아치의 분노는 대단했다.
“이러다 고모가 진짜 죽어도 나는 1년 후에나 알겠어! 나 멍청이 만드니까 좋아? 난 바보가 아니야. 겁쟁이가 아니란 말이야! 열한 살이면 다 컸다고 구박하더니 왜 이럴 때만 애 취급이야?”
“…….”
“왜 말을 안 해 줘!”
“그게 아니라―.”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고모는! 정말! 바보야! 성격 나빠!”
꼬맹이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라 놀란 것도 잠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거야, 네가 쓸데없이 걱정을 할까 봐. 일이 진짜 잘못될까 봐. 다 너를 지키려고.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는걸.
“…….”
그러나 막상 아치 앞에선 입이 안 떨어졌다. 결국엔 변명이었다.
어쩐지 굉장히 피곤했다. 나는 몸을 둥글게 말고 이불 속에 파고들었고, 곧 빠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간만에 시모어 부인에게 대차게 깨져서 그런가. 혹은 생각보다 아치와 냉전이 길어져서 그런가.
나는 아주 오랜만에, 옛날 꿈을 꿨다.
옛날.
내 25년 인생에서 옛날이라고 하면 오필리아가 빠질 수 없었다. 글을 읽고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오필리아와 언제나 함께였기 때문이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순간부턴 모조리 그 애와 함께였다.
‘아오, 쟨 또 왜 나와. 짜증 나게.’
꿈속, 마차 안에서 나와 오필리아가 대화하는 것이 보였다.
나와 오필리아는 열다섯 정도로 보였다. 물론 나는 그 애의 열다섯 살 얼굴까지밖에 몰랐다.
나는 어쩐지 저 날도 대단히 화가 나 오필리아에게 한탄을 하는 중이었고 그 애는 뭐가 재밌는지 깔깔 웃고 있었다. 어쩐지 제삼자가 되어 내 지난날을 감상하던 나는, 곧 저 날이 어떤 날인지 깨달았다.
‘안 돼.’
그렇게 생각한 동시에 마차가 뒤집어졌다.
저 날, 나와 오필리아는 말로만 듣던 마차 사고를 당했다. 운이 나쁘게 나는 마차 밖으로 굴러떨어졌고 오필리아는 사색이 되어서 나를 찾기 위해 비교적 낮은 절벽을 직접 내려가기 시작했다. 쓸모없는 기사들은 우왕좌왕했다.
‘안 돼. 오필리아, 이 멍청아! 가지 마!’
꿈속의 오필리아를 향해 나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당연히 닿을 리 없었다.
낮은 절벽에 튕기듯이 굴러떨어진 나는 다리가 완전히 부러져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다. 운 나쁘게 머리까지 부딪혀 서서히 정신을 잃어 갔다.
그때 뜬금없이 숲속에서 어떤 사람이 튀어나와 쓰러져 있는 내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안 돼. 꺼져. 우리에게 다가오지 마!’
나는 쓰러진 내게 다가가는 비쩍 마른 남자를 향해 비명을 질렀다.
그 남자가 정신을 잃어 가는 내게 말을 걸었다. 듣지 않아도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안다.
“너 혼자야? 이상하네. 분명 이 근처가 맞는데.”
무슨 생각인지 남자는 내 다리를 고치기 시작했다. 오필리아만큼 환한 성력이었다. 그러나 그 성력은 어쩐지 기분이 나빴다.
“아이사!”
능력 좋은 오필리아는 빠르게 나를 찾았다.
그때 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오필리아를 보고 주우우욱 기분 나쁘게 벌어지는 남자의 입매를 보았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헉―.”
그 순간 나는 허우적거리며 꿈에서 깨어났다. 악몽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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