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데드 엔딩 후에-34화 (34/139)

34.

“도련님!”

한발 늦게 아치를 쫓아온 글렌 도그만 경이 쇳소리를 냈다. 퍽 숨이 차 보였다.

아치 뒤에 와글대는 사용인들과 기사들은, 가문의 하나뿐인 후계자 아치 도련님에게 감히 털끝도 손댈 생각을 못 하고 쩔쩔 매기만 했다.

벅차 보이는 글렌을 보고 안타까움을 느낀 것도 잠시였다.

‘클수록 오빠가 아니라 새언니를 닮네.’

저 나이 때 성장은 기가 막혔다. 그새 키가 조금 자란 듯한 아치에, 나는 와중에 소소한 놀라움을 느꼈다.

내 새언니 록시는 붉은 금발을 가진 부드러운 인상의 미녀였다. 록시를 꼭 닮은 아치는 나랑 생판 다르게 생겼다. 오직 눈동자만 나와 같은 보라색이라 겨우 가족으로 보일 정도였다.

‘아니 그보다…… 쟤 진짜 여기 왜 있어.’

그러나 곧 내 통제에서 벗어난 상황에 빠르게 분노가 차올랐다. 동시에 가슴이 벌렁벌렁했는데, 아치 귀에는 나와 관련된 안 좋은 말들이 되도록 들어가지 않게 나름 신경을 쓰고 있었단 말이다.

나는 급한 대로 재빠르게 에리카를 보면서 검지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댔다. 눈치 좋은 에리카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아니, 아치! 너 이 녀석! 네가 여기 지금 왜 있어!”

쫄리는 마음에 호통은 평소보다 더 사납게 나갔다. 그 순간 나와 같은 아치의 보라색 눈동자가 맥없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나는 아차, 싶었다. 그제야 나는 근 3개월 만에 본 아이에게 화부터 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치가 최근 말을 잘 안 듣긴 했지만, 뻔히 상황이 좋지 못한 걸 알면서 내 통제에서 벗어나 여기까지 달려온 걸 보면 둘 중 하나였다.

고모가 죽을 뻔했다는 걸 알아서. 아니면 별장에 갇힌 지 드디어 3개월째가 되자 참지 못해서.

‘어쩌면 둘 다.’

저 망연한 표정을 보니 둘 다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등에 땀이 확 났다.

나는 딱히 좋은 보호자가 되지는 못했다. 물론 시모어 부인이 주 양육자이지만, 이런 내가 보호자라 그런지 애 성격이 갈수록 장난이 아니기도 했다.

어쨌건 이 순간에 아이를 보고 호통부터 쳐선 안 된다는 건 그런 나라도 알 수 있었다.

뒤늦게 아치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데, 아치가 더 빨랐다.

“시모어 부인! 저 성격 나쁜 망할 마귀할멈은 누구인가!”

눈에 띄게 부들거리던 아치가 결국 빽! 소리를 질렀다. 감히 고모한테 삿대질을 하면서 말이다.

“나는 저런 사람 모르네! 누군데 내 이름을 부르나!”

그러곤 뒤를 돌더니 우다다 달려가 버리는 게 아닌가.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옆에 있던 기사의 망토를 뜯어다가 얼굴까지 가린 아치는 순식간에 뛰쳐나가 버렸다.

“고모는! 진짜! 바보야! 와앙!”

울음 섞인 절규 비슷한 것이 복도에 메아리쳤다.

“아치! 너, 너어! 내 이 녀석을 정마아알!”

이 멍청이가! 아랫사람 보는 데서 울지 말라고 그리 말했는데!

뒤돌아 사라지는 아치를 향해 나 역시 지지 않고 삿대질을 하며 노성을 질렀다. 멀어지는 메아리에 뒷목을 부여잡는데, 아치가 사라진 문간으로 누군가 턱! 발을 디뎠다.

아치 뒤에 빗겨 서 있던 시모어 부인이었다.

‘이런 젠장.’

아치가 왔다는 건 시모어 부인 역시 함께 왔다는 의미였다.

나는 황급히 뒷목을 붙잡던 손을 내리며 부인을 바라봤다. 시모어 부인은 매우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화가 나면 웃는다.

나는 조금 긴장해서 시모어 부인 뒤에 서 있는 해리 폴른 경을 찾았다.

“폴른 경, 자네 이게 무슨 일인가! 내가 아치를 별장에 잘 두고 부르기 전까지 오지 말랬는데!”

“가주님. 시간이 없으니 폴른 경은 제가 질책하겠습니다. 가주께선 시모어 부인부터 만나시죠.”

그때 갑자기 에리카가 벌떡 일어나 끼어들었다. 시간이 왜 없지? 그래, 추문도 덮고 모퍽도 조지려면 일이 많긴 한데…….

내가 잠깐 당황해 어버버거리는 사이, 내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에리카가 훌쩍 집무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쟨 또 왜 저래?

“잠시 다들 물러가 있게.”

에리카가 굳이 나서는 게 수상했지만 시모어 부인의 우아하고 낮은 목소리 때문에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에리카의 별명은 귀축이다. 그러나 원조 귀축은 내가 알기론 그녀 어머니이자 내 유모였던 시모어 부인이다. 맥포이 제일가는 카리스마는 기사단장 글렌 도그만 경의 것도 아니요, 그녀의 것이었다. 내 기억엔 아버지도 시모어 부인에게는 졸았던 기억이 있다.

그녀는 망아지가 따로 없던 내 형제 아이노와 시프를 손쉽게 제압했다. 나 역시 그녀의 박력 넘치는 얼굴과 마주하면 최대한 얌전한 어린이인 척하곤 했다.

물론 내가 사고를 칠 때면 항상 옆에 있던 오필리아도 그녀 앞에선 얌전한 어린이였다.

모두가 합, 입을 다물고 시모어 부인이 하라는 대로 일사불란하게 가주 집무실을 벗어났다. 곧 끼이익, 하고 방문이 닫혔다.

“아이사 님.”

둘만 있을 땐 시모어 부인은 날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시모어 부인의 음성이었다.

“대체, 지난 3개월 정도의 시간을 제가 어떻게.”

그녀가 침음을 흘리며 한 발 한 발 나를 향해 다가왔다. 꾹꾹 누른 목소리에 약간 겁이 나, 나도 모르게 조금 뒷걸음을 쳤다.

“내 설명할게. 일단은 그래, 살았지 않나. 그게 상황이―.”

나는 허겁지겁 스스로를 변호하려 했다. 그러나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시모어 부인이 나를 꽉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살아 계셔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주님. 저는, 아이사 님이 잘못되시면…….”

“…….”

살아 있어서 고맙다라.

‘다행이다’가 아닌 ‘고맙다’는 카탐 근처까지 달려온 글렌에게 처음, 그다음엔 에리카에게 들은 바 있다. 그 이후로는 처음 듣는 듯했다.

서부는, 맥포이는 누군가를 잃는 걸 두려워한다. 부인이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살아 주어 고맙다. 순간 무언가 벅차오른 탓에 나는 흠칫 어깨를 떨다 이내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한참 그러고 있는데 나를 안은 채로 시모어 부인이 입을 열었다.

“도련님도 다 아십니다. 많이 놀라셨고 많이 우셨습니다. 이 정도면 어린 분이 많이 참으신 겁니다.”

“……응.”

아치는 열한 살이었다. 고작 열네 살 많은 보호자는 부족한 게 너무 많았다.

“도련님 속이 많이 상하셨으니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물론 저도, 굉장히 화났으니 각오하세요.”

“……응.”

나는 시모어 부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시모어 부인은 유모이면서 안아 주는 것엔 박한 사람이었다. 나도 포옹에 익숙하지 않으니 아무래도 좋았는데, 참 신기하게 그녀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꼭 필요할 때면 귀신같이 나타나 안아 주곤 했다.

‘하여튼 귀신이라니까.’

그녀가 내 등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이제야 좀 살아 있는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이 기분이지.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그러다 어떤 생각 끝에 멈칫한 나는 고개를 들어 시모어 부인의 얼굴을 마주 봤다.

“아니 그런데 아치가 다 알다니. 뭘? 설마 얘가 추문도 아나?”

“추문이라니, 그건 또 무슨 일이죠?”

시모어 부인의 표정이 삽시간 서늘하게 굳었다.

아뿔싸.

이건 몰랐던 모양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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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퍽 소가주, 필립 모퍽의 애인인 패트라 랑드라이는 황도에서 꽤나 유명한 배우다.

패트라는 본래 동부와 북부의 경계에 있는 한미한 영지의 귀족 아가씨였다. 그러나 멍청한 아버지가 가문의 재산을 말아먹는 바람에 약혼은 파투가 났었다. 약혼 서약에 명시된 지참금을 준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힘없는 귀족 가문 여자에게 파혼은 치명적이었다. 더 이상 어느 귀족 가문도 그녀를 원하지 않았다. 곧 힘 있는 대귀족의 네 번째 부인 자리 같은 것이나 어린 그녀에게 들이밀어졌다.

두 살 위의 언니가 먼저 마흔 살 차이 나는 노인과 결혼했다. 언니는 매일같이 눈물을 흘리다 저택을 떠났다.

그다음은 패트라였다. 나이 차이만 쉰 살. 패트라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산송장과 다름없는 늙은이와의 결혼을 종용했다.

‘몸만 오랬다고? 당연하겠지. 팔려 가는 건데.’

패트라는 행동력이 있었다. 그날 바로 집을 나온 그녀는 황도로 시집간 친구의 도움으로 취직을 했다. 오페라 가수들의 의상을 수선하는 삯바느질이 그녀의 첫 일이었다.

그나마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길바닥을 전전하거나 음지의 사창가로 흘러들어 가지 않은 것만으로 그녀는 만족했다.

그러다 화려한 외모, 귀족 출신,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패트라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패트라는 빠르게 황도에서 꽤나 인기 있는 배우가 되었다.

그녀는 특히 가면무도회처럼 비밀스럽고 퇴폐적인 무도회에 초대된다. 과거 귀족이었다곤 하나 귀부인이 여는 티파티 같은 곳에선 당연히 환영받지 못했다.

직업을 가진 여자는, 심지어 노래를 부르고 연기를 하는 패트라 같은 여성은 황도의 인기는 선도할 수는 있으나 결국엔 취급이 좋지 않았다. 풍성한 갈색 머리칼, 매혹적인 붉은 눈동자. 아름답고 재능 있는 패트라는 인기가 좋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귀족들은 그녀를 그저 아름다우며 재치 있는, 비위를 잘 맞추는 인형으로 여길 뿐이었다. 귀부인들은 그녀의 스타일, 말투, 매너, 재능에 환호했지만 결국엔 선을 그었다. 귀족 나리들은 그저 그녀와 가면무도회에서 만나 하루를 보내고 싶어 할 뿐이다.

이제는 모퍽 소가주의 애인이 되었지만 일부일처가 법인 제국에선 애인은 애인일 뿐이다. 모두가 전처럼 부담 없는 상대라는 듯이 쉽게 다가오기 바빴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그저 오늘 하루 자신과 놀아 보고 싶어서 달려드는 놈들로 주변이 어수선했다. 다 음흉한 뱀 같은 것들이다.

패트라는 가면 속에 숨어 그 징그러운 것들을 향해 둥근 눈썹을 찌푸리고 부채를 들어 올려 입을 가린 채 욕설을 뱉었다.

멍청하고 뻔뻔한 귀족 놈들. 그들은 잘난 척, 고귀한 척하지만 실은 가장 천박하고 자존심이나 부리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필립 모퍽은 귀했다. 멍청하고 우유부단하고, 저 같은 평민 계집에게 쩔쩔매는 귀족은 찾기 어려웠다. 평민인 애인 하나 두고 뭐든 가져다 바칠 것처럼 구는 귀족 나리는 정말로 드물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꼼짝없이 거리에 나앉을 거야. 하지만, 상대가 맥포인데.’

패트라는 부채 뒤에 숨어 고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녀는 지금 인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맥포이 가주를 상대로 모험을 할 것인가.

‘그렇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지금 삶을 유지하기는커녕, 드디어 밑바닥을 찍게 될 거야.’

애인의 약혼녀가 납치됐고 곧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여자를 납치한 광신도 집단은 마을을 습격해 질 나쁜 범죄를 저지르기로 유명했다. 모두가 맥포이 가주가 나쁜 짓을 당하고 죽었을 거라 했다.

그리고 며칠 후, 패트라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끔찍한 불행은 역설적이게도 그녀에겐 엄청난 기회가 되었다.

필립 모퍽, 그 우유부단한 남자라면 아이를 가진 저를 버리거나 죽이진 못할 것이다. 필립만 마음을 굳게 먹으면 모퍽 가문은 남들 눈을 의식해 저를 다시 귀족 신분으로 회복시켜 주고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패트라는 자신의 불행이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했다. 맥포이 가주의 인생이 참 기구하다 싶었지만, 그게 운명이라고 여기고 필립에게 이 소식을 기쁜 마음으로 알리려 했다.

그랬는데.

맥포이 가주가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필립은 술에 취하면 제게 맥포이 가주와 맺은 깰 수 없는 맹약을 줄줄 읊고는 했다.

사생아가 생긴 것을 들키면 모퍽은 빈털터리가 된다. 어쩌면 정말로 목숨으로 갚아야 할지도 모른다.

나라고 멀쩡할 수 있을까? 배 속의 아이는? 내 일자리는?

임신을 한 그녀는, 다시 귀족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본 그녀는, 평정을 잃고 극단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필립을 반협박해 맥포이 가주에게 파혼 요구서를 보내게 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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