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이놈 봐라. 내가 돌아온 지 언젠데 얼굴 한번 안 비치고 편지 하나 달랑 보낸 거지? 돌았나?
‘내가 제 편지는 읽지 않고 태워 버리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나는 필립 모퍽의 편지를 읽지 않는다. 내가 사용인을 통해 통보하는 식으로 모든 의사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나는 필립 모퍽의 의사를 딱히 알 생각이 없었고 그는 그걸 잘 알았다. 때문에 그 또한 남들 보는 눈을 의식해 정기적으로 편지를 보내는 것이 전부였으며, 내가 그걸 읽기는커녕 뜯어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원래 같았으면 그대로 화로행이었는데 이상하게 이건 봐야 할 것 같은 감이 들었다.
사실 감도 필요 없는 것이, 웬일로 필립은 내게 가문 색을 입힌 편지 봉투를 보내왔다. 공문이라 이거다.
아무튼 나는 굉장히 감이 좋은 편이었다. 이걸 읽은 후 굉장히 화가 날 것만 같은 촉이 왔다.
“하!”
망설이지 않고 빠르게 편지를 뜯어 읽은 나는 결국 실소를 터뜨렸다. 매우 분노했을 때 나오는 반응 중 하나라, 서류를 정리하던 에리카가 깜짝 놀라 내 쪽을 쳐다봤다.
“죽일까?”
“가주님?”
“파아아아혼? 이게 미쳐 돌았나.”
“예? 모퍽이 파혼을 하잡니까?”
나는 이를 갈고 다시 편지를 내려다봤다. 물론 다시 본다 한들 무엄하기 짝이 없는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파혼을 하자고 했다고? 목숨이 여러 개가 아니고서야…….’
순간 에리카의 머릿속에서 필립 모퍽의 기본 능력치 중, 용기가 대폭 상승했다.
그럼 안 된다. 애초에 용기가 0인 남자만이 맥포이 가주의 약혼 후보자가 될 수 있었다.
에리카는 이번에 질 나쁜 추문이 돌자 가주의 약혼에 잡음이 생길 수 있다 정도는 예상했다. 여기저기서 수군대니, 그것이 잦아들 때까지 모퍽 측에서 결혼을 미루자고 요청할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모퍽은 이름만 남은 가문이라 경제력이 없어 맥포이에 의존하지만, 아직도 명예와 평판엔 까다로운 척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립이 감히 맥포이 가주에게 파혼을 요구하는 시나리오는 생각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이런 과감한 행동을 하지 못할 겁쟁이라는 점에서, 과거 에리카 자신이 가주님께 필립을 적극 추천했다.
에리카가 슬그머니 눈치를 봤다.
“하! 파혼. 파혼.”
나는 검지로 의자 팔걸이를 딱, 딱 두드리며 음산히 중얼거렸다. 니콜라스 자식에게 뭘 요구할지, 즐거운 고민을 할 타이밍을 필립 모퍽이 다 망쳤다.
어쩐지. 일이 술술 풀리면 아이사 맥포이가 아니지.
“지금 파혼하는 건 안 돼. 필립 모퍽에게 답하라. 네놈과 동거 중인 아름다운 배우와 함께 추문에 휩싸여 그 잘난 가문 이름에 먹칠하고 거기서 제명당하고 싶냐고. 그 새가슴이 추문에 휩싸이면 하루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군.”
모퍽 가문은 오래된 가문인 만큼 명예, 품위 따위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결국 돈 문제로 품위 유지에 문제가 생기자 명예와 품위는 개나 준 나와 약혼했으니 참으로 모순적이었다.
내연 관계를 만들어 놓고 사는 주제에 퍽이나 명예롭기도 했다. 제국 귀족들이 이랬다.
“우리 사이의 깰 수 없는 맹약으로 어디 한번 뒈져 보고 싶냐고 덧붙여라. 다 받아 적었나?”
약혼 서약과 별개로 나와 필립 모퍽은 맹약을 맺은 바 있다. 물론 당연히 대부분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쓰여져 있었다.
이때 중요한 항목 중 하나가 ‘누굴 만나든 자유’라는 부분이었다. 단, 사생아 또는 치정 문제로 분쟁이 일어났을 시 필립은 최대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실은 필립 같은 놈이 누굴 얼마나 만나겠나, 하고 코웃음을 치며 집어넣은 항목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겁쟁이 주제에 나름 이름 있는 귀족 가문의 소가주랍시고 조용하게 할 건 다 했다.
내게 유리한 쪽으로 작성된 맹약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계약은 우리가 약혼 관계일 때를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파혼하면 맹약은 효력이 없어진다. 파혼 요구를 해도 당연히 내 쪽에서 먼저 할 줄 알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신경 쓴 적이 없거늘.
“……잠시만요. 네. 다 받아 적었습니다, 가주님.”
“그래, 되었다. 어디 한번 스스로 정리해 보라고 해. 아무리 머저리라도 이건 할 수 있어야지. 2주 후면 스트레스로 대머리가 되어서 나타나겠군. 아, 아니다. 일주일 안에 정리하고 얼굴 내밀라 해.”
“파혼 요구한 이유가 정확히 뭐랍니까?”
“몰라, 그 머저리 새끼. 알 게 뭐냐?”
“혹시 모르니 대비하셔야죠.”
에리카는 그러면서 내가 바닥에 던져 버린 필립의 편지를 주워 들어 펼쳤다.
곧 에리카가 불쾌한 얼굴을 했다. 알지, 알지. 보자마자 기분 팍 상한다. 상하다 뿐이냐, 저걸 죽여야겠다는 충동이 절로 일어난다.
“……교리를 들먹이다니. 필립 모퍽 그자가 쓴 게 맞을까요? 이 새끼는 간이 개미 오줌만도 못한데, 감히 가주님을 둘러싼 추문을 들먹이며 순결을 걸고넘어질 리는 없지 않습니까.”
망할 제국. 망할 메헤라.
순결은 얼어 죽을, 지금이 어느 시댄데 지랄이야.
설마 구닥다리 제국법이 발목을 걸고넘어질 줄은 몰랐다. 메헤라의 말씀, 메헤라 앞에서 했던 약혼 서약에 어긋난다고?
그따위 것은 그저 형식상 지껄이는 말이 된 지도 몇백 년이 지났다.
“지는 진짜 순결해서 나한테 이걸 보냈겠나? 허술한 제국법과 메헤라의 말씀인지 뭔지를 가지고 허점을 파고든 거지.”
필립의 요지는 이거였다.
나는 메헤라의 신실한 아들이요, 메헤라의 옛 말씀을 따르는 충직한 신자이다. 메헤라께서 말씀하시길, 부부의 연을 맺는 자들은 신뢰가 있어야 하며 오직 서로에게 순결을 바친다. 나는 신실한 신자이므로 약혼 서약을 지키지 못한 너랑은 결혼 못 하겠소!
필립은 내가 알기로 나처럼 성력을 타고나지 않았으며 독실한 신자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지껄인 말은 대단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나 제국법으로 하면 파혼 사유가 된다.
제국은 메헤라를 유일신으로 모시며 종교의 권한이 높았다. 놀랍게도 제국 법전에 명시되어 있기를, 제국법 위에 있는 것이 돋보기로 보아야 겨우 보이는 ‘메헤라의 말씀’이었다.
몇백 년도 전의 논리였지만 아무도 개정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개정은 신성 모독임과 동시에 모두가 저 편할 대로 융통성 있게 메헤라의 말씀을 해석했기 때문이다.
몇백 년 된 교리와 제국법은 지금에선 황가도 지키지 않았다. 아마 제일 먼저 깼을걸? 아무리 뒤져도 이걸 그나마 따르는 이들은 융통성이라곤 없는 디아시 직계 정도일 것이다.
즉,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제국민들 중에선 부부 사이의 신뢰를 순결로 따지는 자가 없다. 누구도 이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 없어서, 평생 이러한 말씀이 존재한다는 걸 모르고 죽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물론 이 교리의 영향으로 ‘추문을 기피하는 사회’이긴 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추문을 기피하는 것이 이러한 옛 교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정서라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
“머리 잘 굴리고 용기와 의지가 있어야 하는 일이니 필립 모퍽에게서 나온 발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가주님 약혼자를 얼마나 고심해서 골랐는데요.”
에리카는 필립 모퍽이 멍청하고 용기가 없다는 것에 확신이 있었다. 교리를 들먹이며 제국법의 허점을 이용해, 맥포이 가주에게 개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차오르는 분노를 누르지 못해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팔짱을 끼고 한동안 허공을 노려보다 마침내 깨달았다.
아, 그 여자
“……연극배우.”
“필립 모퍽의 애인 말이십니까?”
“그래. 그 패트라 랑또라인가 뭔가.”
“패트라 랑드라이입니다, 가주님.”
패트라 랑드라이.
황도에서 꽤나 인기 있는 배우 중 하나이며 나이가 스물둘이랬나. 아무튼 그녀는 여러 사람과 염문을 뿌리다 반년 전, 필립과 황도에 아담한 저택을 사들여 아주 살림을 차렸다고 들었다.
“패트라 랑드라이라면 지금은 평민이지만 과거 귀족 영애였더군요.”
“아무래도 머리는 그쪽 같군.”
“신분 상승 욕구가 대단한 모양이니 그쪽에서 교리와 제국법을 들먹여 부추겼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제법 인기가 좋아 황도 무도회란 무도회는 전부 참석한다는 소문으로 보아 인맥이나 정보력도 필립 모퍽보다 낫겠고요.”
“후……, 그래. 잠시만. 나 좀 진정하자.”
“네. 천천히 심호흡하십쇼.”
에리카는 자주 펄쩍 뛰는 나를 아주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나는 눈을 감고 천천히 생각했다.
‘내가 그동안 일이 많아 이놈을 너무 편하게 내버려 뒀구나.’
감히 애인과 살림을 차리는 등, 필립 모퍽의 발칙한 행보야 사람을 붙여 놓았으니 잘 알고 있었다.
필립을 사랑해 약혼을 한 게 아니니 당연히 애인을 만들어도 상관없다는 조항을 허락했다. 나 역시 그와 딱히 뭘 하고 싶진 않았고, 나중에 몸도 마음도 편해지면 미남자를 모아다가 편하게 여생을 살 계획이었으니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파아아혼? 내게 도는 추문을 기정사실로 만들려 해? 지는 동거 중이면서? 지는 발뺌하면 다라 이건가?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이 기회에 필립의 기를 회생 불가할 정도로 밟아 버리지. 평생 고개를 들지 못하고 찌그러져 살게 말이야. 랑드라이에게는 사람을 새로 붙여라. 그쪽이 진짜 머리인지 확인해야겠다.”
“예. 적당한 사람으로 보내겠습니다.”
“키소 일도 마무리됐겠다, 이 이상 내버려 두면 애 성격이 더 나빠질 테니 아치도 슬슬 부르지. 아치 오기 전에 내 추문도 어느 정도 묻어라. 같잖기는.”
“네, 가주님.”
“하, 다시 생각해도 빡치네. 필립 이 새끼 진짜……. 순결? 지가 순결을 입에 담아? 순결은 옛적에 버린 새끼가 지랄을 하는군. ……진짜 죽여 버릴까?”
“당장 죽이면 추문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차라리 결혼 후에 죽이는 편이 보기 더 좋지 않을까요. 모퍽도 그걸 더 무서워할 것입니다.”
언제나 냉철한 에리카는 자주 흥분하는 내게 딱 맞는 보좌관이었다.
“추문 덮는 데는 추문이지요. 강도는 어느 정도로 원하세요?”
한 번 터진 추문은 정정이 어려웠다. 사람들은 자극적인 것을 사실로 믿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결국엔 또 다른 추문으로 덮는 것이 최선이었다.
“지금 도는 내 추문보다 경악스러워야지. 사교계에 평생 발 못 디딜 정도는 돼야지 않겠나. 요즘 황도에서 가장 인기 좋은 인물을 뽑아다 제일 센 걸로 터뜨려라.”
귀족들의 ‘진짜’ 추문을 최대한 모으는 것은 적이 많은 내겐 필수였다.
정보 조직이 하는 일은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었다. 최대한 많은 정보를 모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이지.
간만에 몹시 화가 난 상태로 에리카가 뽑아 온 기상천외한 스캔들을 검토하고 있을 때였다. 우다다, 하는 발소리와 시끌벅적 요란스러운 소음이 가까워졌다.
나는 왼 눈썹을 치켜떠 에리카를 노려봤고, 에리카는 제 옆의 비서를, 비서는 문 앞을 지키는 기사를 노려봤다. 그러자 기사가 빠릿하게 집무실 문밖을 확인하기 위해 손을 움직이려 했다.
그 순간 집무실 문이 꽝! 소리를 내며 양쪽으로 열렸다.
‘이 새끼들은 가주가 있는 방을 왜 맨날 저렇게 열지? 최근에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조만간 가문 내의 기강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난입한 인물에게 고성을 발사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곧바로 호통을 치지 못했다. 문 너머엔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나와 같은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나를 노려보았다.
내 입이 경악으로 서서히 벌어졌다.
‘쟤가 왜 저기 있어?’
나는 입을 쩍 벌리고 에리카를 째려봤다. 그녀 역시 당황한 듯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나를 돌아봤다. 연녹색 눈동자에서 저도 몰라요, 하는 결백함이 느껴졌다.
내 오빠 아이노의 외동 아들내미.
내 조카.
내 하나뿐인 피붙이.
거기엔 아치 맥포이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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