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맥포이에 몇 통의 서신이 도착했다.
첫 번째는 키소와 관련된 일이 마무리되었다는 편지였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도망친 키소의 방계까지 깔끔하게 처리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없다.
나는 무감한 얼굴로 그 편지를 바로 태웠다. 이런 것에 무뎌진 지 한참이다. 조금이라도 망설이면 내가 밟힌다.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 모두가.
‘생각보다 빠르네. 방계 처리는 가노에게 맡긴 보람이 있군.’
가노는 넥타로 갔다 맥포이에 귀환하길 원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그는 곧장 도망친 키소 방계를 처리하기 위해 남부로 내려갔다. 넥타로 가는 것도 뭉그적거렸으니 남부까지 들렀다 오라는 명령에 안 봐도 눈을 이글거리며 역정을 냈을 게 훤했다.
드디어 게일과 욕심 많은 키소를 없앴다.
‘이제 다음 단계로 이동할 수 있겠군. 드디어 뭔가 되는 기분이 난다.’
나는 흥, 하고 작게 코웃음을 치며 다음 편지를 들었다.
두 번째는 니콜라스 디아시가 보낸 서신이었다.
나는 그 이름을 확인하고 왼 눈썹을 치켜떴다. 연푸른 서신은 디아시 가주만 보낼 수 있기도 했다.
서신엔 크게 닉스 일에 대한 현황과 노마 디아시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대신관과 디아시 가주가 바그다트에 상주하며 매일 닉스에게 성력을 쏟아부어 그 봉인은 유지되고 있으나 여전히 불완전하다. 새로운 방법을 모색 중이다.
성지에 심어 놓은 정보원을 통해 들어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디아시 쪽 보고엔 거짓이나 빠짐이 없었다.
노마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노마에게 사례하기 위해 디아시에 롬닥 상단을 보낸 것에 대한 인사가 주된 내용이었다. 그리고 노마의 일로 디아시 역시 사례를 하겠다는 내용이 덧붙여져 있었다.
디아시가 맥포이 가주에게 큰 빚을 졌다. 이 은혜는 맥포이가 원하는 방식으로 갚겠다.
“깔깔깔!”
그 대목에서 나는 책상을 쾅쾅 치면서 큰 소리로 웃었다.
“그 니콜라스 디아시에게 이런 편지를 받아 볼 줄이야. 살아 있어서 다행이군!”
에리카가 옆에서 조금 한심하게 보았지만 아무렴.
“어우, 기분 좋아. 흥.”
무뚝뚝하고 음침한 새끼. 남들은 잘생기고 과묵하다지만, 글쎄.
오필리아를 데리고 닉스를 쫓고 있었으면서 그렇게 발뺌해? 이건 나중에 닉스 일이 다 끝나면 갚아 주지.
어쩐지 니콜라스를 볼 때마다 뒤가 구린 듯한 기분이 들었던 이유는 그 자식이 내게 숨기는 게 많은 새끼라 그런 거였다.
숨기는 게 있으니 니콜라스가 나를 경계한 것이겠지만, 다 떠나서 일단 성격상 그는 나와 맞지 않았다. 마치 물과 기름과 같았다.
디아시 자체가 제국법에 엄격한 가문이라 내가 하려는 일에 사사건건 딴지를 건 적도 있었다. 융통성 없이!
또 니콜라스는 내 상스러운 욕설을 들을 때마다 파렴치한 보듯이 날 봤는데, 해적과 일하다 보면 어쩔 수 없다.
내가 공석에서 모두 들으라는 듯이 오필리아를 잡아다 죽여 버리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한 것도 싫었을 것이다.
쫓는 사람이 겹치다 보니 지금까지 유독 그와 자주 마주쳤다. 오필리아가 니콜라스 쪽에 있다는 의심도 다 이 때문이었다.
한 번은 영 의심스러워 니콜라스를 자극해 볼 겸 친히 불러다 이단을 고문하는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있는데, 그와 오필리아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 방법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오필리아와 밤>에서 나 때문에 두 번인가 닉스와 관련된 일을 망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쩐지 돌부처 같은 놈이 그날따라 화를 낸다 했다.
‘……뭐 난들 알았나. 말을 해야 알지. 물론 니콜라스 놈이 하는 말은 내 쪽에서 듣지도 않았겠지만.’
나는 애써 그런 생각을 하며 머쓱함을 지웠다. 어쨌건, 나 역시 생리적으로 니콜라스에게 거부감이 들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래서일까. 그에게 유독 충동적으로 굴 때가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게 다, 그와 나는 <오필리아와 밤>에 나오는 남주인공과 사사건건 그를 방해하는 조연 사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본능적으로 상극인 걸 보면 말이지. 진짜 걔를 보면 막……. 막 짜증 나는데 어떡해?’
이게 설정값이라는 걸까.
많이 유치하지만 니콜라스가 지나가는 게 보이면 융통성 없는 새끼라고 욕설을 퍼붓는 건 기본이요, 대회의 중에 그에게 깐족대는 건 예삿일이었다.
안면에 과일주 부어 버리기부터 시작해서 소소하게는 머리채 쥐어뜯기에, 심하겐 목에 검 들이대기까지. 나는 열심히 니콜라스를 쪼아 댔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으니 맨날 시비나 걸 수밖에.
시비에 보통 무시로 일관하는 니콜라스에게 빡친 내가 결국 과감한 공격을 시전하는 것이 패턴이었다.
특히 일전의 대치 상황에서 목에 검을 들이댔을 땐 니콜라스 놈 반응이 어쩐지 이상했는데, 이제 보니 목에 칼이 들어온 상태에서 제 형이 그렇게 됐던 기억이 생생했던 모양이다.
‘……뭐, 그건 내가 좀 과했지만 난들 알았나. 자기가 먼저 빡치게 했잖아?’
그날은 오필라아의 행방 문제로 나와 니콜라스의 대치가 극에 달한 날이었다.
아무튼 그렇다 보니 두 가주의 사이는 더럽게 나쁠 수밖에 없었다. 에리카가 내게 시비 좀 그만 걸라고 했을 정도니, 사실 그간의 행적이 조금 민망하긴 했다.
……물론 그래도 참을 수 없었다. 니콜라스를 보면 나도 모르게 거슬리다 못해 빡치는데, 맨날 괴롭혀지는 그 자식이라고 안 그럴까.
‘하, 그래도 역시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놈 명치를 칠 게 아니라 아예 중심을 차 버릴 걸 그랬어.’
그런 생각 끝에 다시 편지에 집중했다. 그 외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런데 니콜라스의 서신 아래, 디아시 이름으로 온 서신이 하나 더 있었다. 가주의 서신과 색이 다른 미색의 종이 뭉치는 공문이 아닌 듯했다.
의아한 얼굴로 봉투를 뒤집자 이름이 적혀 있었다.
[노마 디아시.]
‘……글씨체도 예쁘군.’
니콜라스 생각으로 불쾌했던 속이 조금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내용물이 있는 듯 두툼한 봉투를 풀자 나온 것은 잘 말려진 테렛사 한 송이였다. 나는 해괴한 표정으로 빛깔을 잘 간직한 테렛사를 내려다봤다.
서서히 미간이 일그러졌다. 불쾌하거나 기분이 나쁜 건 당연히 아니었다. 그저 노마가 내게 테렛사를 보낸 의도를 단번에 파악하기 어려웠을 뿐이다.
나는 말린 테렛사와 동봉된 편지를 빠르게 펼쳤다. 그 짧은 순간에 왠지 초조함이 일었다.
테렛사가 일주일을 넘게 가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아시나요. 지난번엔 그것도 모르고 그저 아이사 님의 눈동자와 비슷하다며 테렛사를 드렸지요. 부끄럽습니다.
……
일주일을 넘게 산 테렛사를 말린 것입니다. 맥포이 가주의 행운을 바랍니다.
……
아이사 님이 말하신 것처럼 당분간은 니콜라스 옆에 있으려 합니다. 빈 시간을 조금이라도 채워 주고 싶어요.
그러나 곧 우리가 만날 일이 있을 것입니다. 어서 당신을 만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또 하고 싶은 말도요. 그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주된 내용은 이러했다.
나는 한동안 편지를 처음부터 다시 읽고 테렛사를 멍하니 보길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러다 테렛사를 든 채 정지했다.
‘일주일 넘게 갔다고?’
순간 나는 황도로 향하는 길에 내 뜨끈한 손아귀에서 비틀어지기 시작했던 테렛사 세 송이를 떠올리고 헛웃음을 흘렸다.
‘별게 다 되네. 오필리아처럼 행운이 기본 설정인가?’
기분이 붕 뜨다 못해 빠르게 상승했다. 그때 에리카가 분위기에 찬물을 부었다.
“뭐 잘못 드셨나……. 디아시에서 온 서신을 보면서 왜 그런 표정을 하세요? 그만 웃고 빨리 다음 문제 해결하시죠.”
“뭐래. 내가 언제.”
내가 웃었다고? 나는 후다닥 테렛사를 내팽개치곤 정색했다.
“키소 일이 끝났으니, 이제 롬닥과 서부에 신경 쓰실 차례입니다.”
오냐, 기다리던 차례다. 나는 언제 당황했냐는 듯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흠, 에리카. 10년 내내 코빼기도 안 보이던 닉스가 갑자기 왜 나타난 것 같으냐?”
“저희 예상대로 오필리아 역시 닉스를 죽이지 못했고 끽해야 봉인했던 것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 봉인의 효력이 10년이었고요.”
일하자니까 왜 딴소리냐는 얼굴을 하고 에리카가 성실히 대답했다.
“그래, 그것도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닉스는 조각난 채 봉인됐으니 혼자선 못 깨어나. ‘계기’가 있어야 해.”
“조각난 채 봉인이요? 그 정보는 또 어디서……. 아니 그럼, 누가 무슨 의식이라도 치렀다는 겁니까?”
“자네는 역시 눈치가 좋군. 그래. 무려 오필리아가 친히 조각내서 봉인한 것인데, 그거 깨우려고 얼마나 대규모로 의식을 치렀겠어? 광신도 놈들이 이번에 아주 개짓거리를 했다.”
<오필리아와 밤>에서 절정으로 가기 위한 위기 단계이자, 가장 끔찍한 의식.
제국 전역에 동시다발적로 벌어진 크고 작은 집단 죽음이 그 의식의 재물이었다. 과거 닉스가 맥포이를 바쳐 알포의 힘을 얻었던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엄청난 이단 행위네요. 어째서 지금까지 보고가 없었을까요?”
에리카 역시 맥포이의 비극을 떠올리기라도 했는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국 전역에 실종자가 대폭 늘었을 것이다. 각기 다른 곳에서 납치된 사람들을 또다시 섞은 후 곳곳에 모아 두었으니 알아차리기 어려웠겠지.”
“……진작 알려 주시지.”
에리카가 한결 시름을 던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 역시 내 기억을 확실히 못 믿겠어서 키소를 처리하는 동안 확인 좀 했다.”
내 기억인지 뭔지도 모를 소설 속에 나오는 지명을 다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잖니.
총 일곱 곳의 위치를 특정하는 과정은 엄청난 노가다였다. 또한 기억을 더듬어 특정한 위치가 정확히 맞아떨어지면 맞아떨어지는 대로 씁쓸했다.
‘현실이 고작 소설 나부랭이라는 걸 확인 사살받는 기분이라.’
“사람들은 단순해. 제 일이 아닌 것은 쉽게 잊지. 맥포이와 서부는 10년 전을 잊지 못하지만 그들에겐 전부 옛일일 뿐이야. 맥포이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 이단이라는 사실을 다 까먹은 모양이지? 서부가, 맥포이가 이단이라니 조금만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데.”
“저희는 원래 하던 일을 하면 되겠군요.”
“소문은 소문일 뿐. 구구절절 해명할 필요 없지.”
나는 씨익 웃었다.
“소문이 마음처럼 통제되는 경우 봤나?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한다. 광신도 새끼들이 일을 크게 저질러 주었으니 이단은 맥포이의 적이라는 것을 오랜만에 온 제국에 보여 줘야겠다, 에리카.”
할 수 있는 걸 하라. 맥포이의 가훈이었다.
계획이 마음에 드는지 그제야 에리카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본래 닉스를 완전히 봉인하고 제국 곳곳에서 치러진 그 끔찍한 의식의 진상과 주모자를 파헤쳐 모조리 단죄하는 것은 오필리아를 위한 이벤트다. 오필리아는 이 일로 일약 영웅이 되고, 당당히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맥포이를 중심으로 서부는 이단에 대한 복수심을 가지고 똘똘 뭉쳤던 경험이 이미 있다. 이번엔 서부만 당한 게 아니다. 아마도 이번 단죄 이벤트로 제국 전체가 한뜻이 될 것이다.
그 중심엔 오필리아가 아닌 맥포이가 있게 될 것이고.
정보원에 따르면 이 문제에 대해 디아시 쪽의 움직임은 없었다. 꽤나 수상했지만 차라리 잘됐다.
‘오필리아. 네 장대한 영웅 서사의 하이라이트는 서부가, 맥포이가 가져가도록 하지. 하하하!’
“내가 조금 이따 지역, 사람 이름 몇 개를 불러 줄 테니, 기사들을 편성해 보내라. 정화 의식도 해야 하니 대신전에 연락하고.”
“예, 가주님.”
“디아시에 간 롬닥 행렬은 반응이 어떻드나?”
“행렬이 여느 때보다 크고 화려했으니 가주께서 디아시 도움을 받고 탄타로스에서 탈출했다는 말이 곧 돌 겁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렀다. 디아시는 신전과 가까운 가문이니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다.
읽을거리나 정보 따위가 부족한 평민들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맹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이 뭘 보는 건 생각보다 파급력이 있다.
“흐응, 그래. 이걸로 서부와 맥포이는 오히려 전보다 더 낫겠다.”
이게 바로 전화위복 아니겠나. 내 전문 영역이었다. 키소부터 이단 문제까지, 아주 마음에 드는 전개인걸.
가뿐한 마음으로 다음 서신을 집어 드는 동시에 내 미간이 대차게 구겨졌다.
‘이 새끼……. 완전히 잊고 있었네.’
약혼자 필립 모퍽의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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