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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드 엔딩 후에-31화 (31/139)

31.

“그……. 혹시 꽃을 다 뽑으실 건 아니시지요?”

디아시 가칙에 모든 생명을 돌아보라고 나와 있지 않나? 폰은 디아시의 촘촘한 가칙을 떠올리며 물었다.

“다는 아니야.”

노마는 ‘몇 송이만’ 하며 방긋 웃었다.

천진난만해 보이기까지 한 미소에 폰은 두 손을 들었다. 그 무해한 표정엔 알 수 없는 패기와 박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폰이 결국 ‘아휴, 진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다. 맘대로 하십쇼. 망이나 봐야지’ 하고 생각한 끝에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그 전에.”

낮게 가라앉은 노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그가 눈 깜빡할 새 폰의 코앞에 다가섰다.

‘헉.’

폰은 순간 상대의 기에 눌려 압박감을 느꼈다.

압박감에 혼미해진 폰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노마가 그의 허리춤에 있던 검을 쑥 빼내더니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이었으며 말 그대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었다.

폰은 곧바로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기사로서 검을 빼앗겼다는 사실에 대한 수치는 느낄 새도 없었다. 그저 반사 작용처럼 노마가 검을 휘두른 자리를 향해 부자연스럽게 눈알을 굴릴 뿐이었다.

“오우.”

그때, 우아한 감탄사가 들렸다. 폰은 자신이 너무 놀라 순간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폰의 눈앞엔 노마의 기행만큼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오늘 다들 왜들 이러시는 거지. 꿈인가?’

노마가 베어 낸 키가 큰 억새풀 뒤로 인공 수로 위를 지나가는 작은 다리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던 사람이 드러났다.

“……딸꾹.”

놀란 나머지 폰은 급기야 딸꾹질을 시작했다. 폰이 조용히 부산을 떠는 와중에도, 막상 검을 휘두른 노마는 담담하기만 했다.

“아니, 히끅! 오필리아, 흐끅! 님?”

놀랍게도 다리 아래에 쭈그려 몸을 숨기고 있던 사람은 디아시 가주님의 연인 오필리아, ‘그분’이었다.

‘오필리아 님이 왜 여기서 나와?’

오필리아는 들킬 줄 알기라도 한 사람처럼 당당히 일어났다. 풀때기를 헤치는 걸음은 나름 우아했지만 그 외관이 특출 나게 아름다워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사실 그녀는 상당히 낑낑거렸다.

“아이고, 죄송해요. 이런 날엔, 여기 숨는 게 습관이라.”

오필리아가 왼손으로 뒤통수를 긁으며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정말이지 멋이라곤 하나 없는 후줄근한 등장이었다.

풀숲에 숨어 있는 게 습관이라고? 폰은 그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완전히 풀숲에서 빠져나온 오필리아가 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두 사람 앞에 섰다.

“디아시 경. 좋은 오전입니다. 가주님 없이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그런데 그거.”

화사한 미소를 띤 오필리아가 인공 수로 구석에 옹기종기 핀 테렛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제가 심은 건데.”

“…….”

노마는 갑작스러운 오필리아의 등장에도 계속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어……. 제가 숨어 있어서 많이 놀라셨나요? 이건, 정말 수상한 것이 아니라 습관이라.”

물론 노마는 풀숲 너머에 오필리아가 숨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제 동생이 대뜸 사랑하는 사람이라 소개한 사람을 이렇게 마주칠 줄은…….

오필리아를 앞에 둔 노마는 복잡한 마음을 느꼈다. 수순처럼 ‘형,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하고 서운할 정도로 환하게 웃던 니콜라스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본성에 도착하고 니콜라스는 노마에게 자신의 10년, 길다면 긴 시간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마치 제국 역사를 연표대로 설명하는 듯 객관적이기 짝이 없던 아이사의 이야기와 다르게 매우 사적인 이야기였다.

니콜라스는 노마에게 숨김이 없었다. 처음 오필리아를 발견하고 노마를 찾기 위해 그녀를 이용하려 했다는 이야기, 그런 그녀와 광신도들의 뒤를 쫓다가 한 번은 그녀가 제 목숨을 구했다는 일까지. 니콜라스는 차분히 그간 벌어진 일들을 늘어놓았다.

그녀 덕에 아버지와의 오래된 골을 풀 수 있었으며, 노마에 대한 자신의 죄책감을 덜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노마는 10년 동안 온 대륙을 떠돌며 쌓은 니콜라스와 오필리아의 유대가 얼마나 단단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노마. 나는 형이 사라진 이후로 잠을 잘 수가 없었어.”

노마는 그 말에 잠시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내용은 심각하기 그지없었지만 어조는 내내 담담했다.

“눈을 감으면 형이 작은 점으로 흩어지는 게 선명해져서 잠을 자지 못했어. 내가 인질이 아니었다면, 이고를 믿지 않았다면. 형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고 매일 후회를 했어.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어. 그때는, 지금 생각해 보면 힘이 들었던 것 같아.”

“……니콜라스.”

“그런데 신기하게 오필리아가 옆에 있으면 잠들 수 있었어. 형이 내가 아주 어렸을 때, 형이 서부의 끝에는 마녀가 산다는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잖아. 나는 처음엔 오필리아가 정말 마녀라도 되는 줄 알았어.”

언뜻 농담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니콜라스는 누구보다 진지했다. 또한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몹시도 행복하고 편해 보였다.

무서운 옛날이야기를 해 주어도 언제나 뚱한 얼굴로 저를 멀뚱히 바라보던 아이가 그걸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머니가 니콜라스를 낳다가 목숨을 잃자, 아버지는 특히나 그녀를 많이 닮은 아이를 보기 힘들어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니콜라스는 아주 어릴 적부터 스스로를 저주처럼 여기곤 했다.

외로움이 많은 아이.

죄책감에 짓눌린 아이.

부끄럽게도 노마는 그 자리를 채워 주지 못했다. 오히려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기고 사라져 버린 격이었다.

노마는 담담히 과거 일을 말하는 니콜라스를 보고 오필리아에게 순수하게 고마움을 느꼈다. 니콜라스가 이어 말했다.

“오필리아는 말은 안 해도 동생을 많이 보고 싶어 해.”

니콜라스가 말하는 ‘오필리아의 동생’이 아이사 맥포이라는 것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10년 전, 맥포이가 그렇게 되고 난 후에 맥포이와 황가는 오필리아에게 수배령을 내렸어.”

닉스가 신분을 숨기고 맥포이에 머물렀을 때 그와 유독 친분이 있었다고 알려졌으며, 그날 이후 홀연히 사라진 외지인.

오필리아를 향한 의혹엔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닉스에게 아끼는 후계자를 잃은 황제는 직접 오필리아의 수배령을 내렸다.

그리고 얼마 후, 침묵하던 맥포이 역시 수배령을 내렸다.

“맥포이 가주가 오필리아를 적으로 간주한 것은 가문을 두고 보았을 때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다는 사실을 알아. 그 여자는 가문을 위해서라도 오필리아의 죽음을 선택하겠지.”

“…….”

“맥포이에겐 당연한 선택이겠지만…… 내겐 아니야. 오필리아는 황실에 잡히든, 맥포이에 잡히든 죽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니콜라스는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데 오필리아가 내게 그랬어. 꼭 살아야 한다고. 자긴 죽을 수 없대. 그래서 내가 오필리아를 숨겼어, 형.”

가만히 니콜라스의 이야기를 듣던 노마는 잠시 고민했다. 맥포이 가주는 오필리아를 잡아다 피의 복수를 하겠다는 각오로 그 긴 세월 동안 그녀를 찾았을까.

노마 생각은 달랐다. 카탐의 축제 거리에서 여관으로 이동하는 마차 안에서 아이사가 했던 말은 분명, 제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제 눈앞에 있는 금발에 청안을 가진 여자, 오필리아에게 하는 소리에 가까웠을 것이다.

맥포이 가주는 그날 벌어진 참상의 원흉을 외지인 오필리아와 지명 수배자 닉스라고 규정했다.

영지민이 한순간 대량으로 학살된 끔찍한 사건이었다. 닉스가 오필리아에게 이끌려 맥포이로 흘러들어 왔다곤 하나, 외지인인 그를 성에 들여 준 것은 결국 맥포이였다. 가족, 친구, 이웃. 너무 많은 것을 잃은 서부의 분노는 상상을 초월했다.

맥포이는 영지를 지켜야 할 의무를 지키지 못했다. 그날의 책임을 콕 집어 어린 소녀에게 지운 것은 결국, 가문의 이름과 직계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외지인이었던 오필리아 하나로 꼬리를 잘라 연명했다고 볼 수 있었다. 맥포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맥포이는 지난 10년, 그 두 명을 찾는답시고 수많은 이단을 잡아들이고 벌했다. 동시에 이 모든 것은 서부의 참상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라고 선포했다.

아픔을 기억하는 서부는 맥포이 가문의 극단적인 행보를 지지했다. 맥포이를 중심으로 한 서부의 단단한 결속은 같은 상처와 복수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아이사 님은 단순히 죽이기 위해 오필리아를 찾아 헤맨 것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 밀란 역시 니콜라스를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어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뿌리 깊게 박힌 애정은 사라질 수 없었기에 혼란스러워했다.

맥포이가 오필리아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것은, 조금 더 복잡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오필리아 님.”

그때 폰이 뒤늦게나마 오필리아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노마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순서며 형식이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폰, 아니지 바인스 경. 하하, 여기서 보네요. 민망하네.”

그럼에도 오필리아는 활짝 웃으며 받아 주었다.

“그런데 정말 어째서 여기 계십니까? 숨으실 필요는―.”

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연히 수배자 신분인 오필리아는 외부인을 보면 습관적으로 몸을 숨기곤 했다.

“아무래도 객이 롬닥이라 그런지 저도 모르게 숨었지 뭐예요. 이게 잘 고쳐지지 않으려나 봐요.”

오필리아가 볼을 긁으며 부러 유쾌한 투로 너스레를 떨었다. 농담조였지만 노마는 오필리아가 롬닥, 맥포이를 온 힘을 다해 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한 오필리아가 다시 노마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 테렛사를 잔뜩 뽑으시려 했군요. 그게 비실해 보여도, 제가 손수 심고 꽃을 피운 것이랍니다.”

‘헉, 들꽃인 줄 알고 노마 님께 뽑아도 된다 한 건데!’

폰은 두 사람 사이 끼어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치를 봤다.

“미안합니다, 오필리아. 주인 없는 꽃이라 여겼습니다. 테렛사를 보니 저도 모르게 손이 갔습니다.”

예상치 못한 오필리아의 등장에 경황이 없던 노마가 그녀에게 퍽 미안한 얼굴을 하고 사과했다.

“어머? 노마 님, 테렛사를 좋아시나요? 테렛사를 좋아하는 사람은 흔치 않은데……. 아니면 깨어난 지 얼마나 되셨다고 벌써 꽃을 줄 상대라도 생기신 건가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낭랑한 목소리로 묻는 그녀의 표정엔 어쩐지 즐거움이 한가득이었다.

“…….”

우연인지 노린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날카로운 질문에 노마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테렛사. 꽃을 줄 상대. 아이사 맥포이!

귓가에 점점 열이 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정말 가주님과 닮은 점이 많으시네요. 니콜라스도 놀리면 반응이 비슷한데. 입은 꾹 다물고 귀만 빨개지는 거 말이에요.”

오필리아는 웃겨 죽겠다는 듯이 배를 부여잡고 말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고요한 디아시에 어울리지 않게 경박한 편이었다.

“……더, 훨씬 좋아 보이십니다. 경.”

“감사합니다.”

뜬금없는 말에 노마는 분명 첫 만남을 염두하고 한 인사치레겠거니 생각하고 대답했다.

“그래요. 어쩌면, 어쩌면 이걸 말한 것일 수도 있겠어요.”

그녀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다 곧 화색을 띠었다.

“제가 디아시 경을 놀렸으니 용서를 구해야겠네요. 가장 오래 가는 테렛사를 찾는 방법을 알려 드리죠. 제가 그 방면으론 이 세상에서 제일이랍니다. 테렛사가 일주일을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시나요?”

“행운이 찾아온다는 것 말입니까?”

“잘 아시네요. 제가 특별히 말리는 법까지 알려 드릴게요!”

오필리아는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노마는 그 순간 어쩐지 카탐에서 만났던 스탕 부인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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