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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드 엔딩 후에-30화 (30/139)

30.

“……그렇게 심심하십니까? 그래도 밖은 안 되십니다. 가주님께서 당부하셨습니다. 디아시 경 귀환으로 본성도 실제로 소란스럽고요.”

아련한 노마의 표정에 폰은 괜히 죄를 지은 느낌이 들어 은근히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안다. 니콜라스 뜻대로 할 것이다.”

“예. 이왕 이렇게 된 것 푹 쉰다고 생각하―.”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요만…….”

“아, 진짜! 저는 그만 놀리시고요!”

노마에게 그새 말린 폰은 결국 어릴 적 하던 대로 빽 소리치고 말았다. 그는 뒤늦게 ‘우리 아빠한테 다 이를 거야!’ 했던 어린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디아시 기사의 덕목이고 뭐고, 폰은 어릴 적부터 타고난 기질이 여느 디아시 기사들과는 조금 달랐다. 동기 사이에서도 별종이라고 불리는 그는 디아시 기사가 되기 위해 욱하는 성질을 죽이는 법을 가장 많이 수련하기도 했다.

노마가 폰을 기억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흔히 말하는 ‘동부인’과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성깔 있는 꼬마는 노마의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폰은 예부터 동부 귀족의 정석인 ‘켈리 바인스 경’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존재감이 있었다. 동부인치고는 짙은 회갈색 눈동자가 인상 깊기도 했다.

분에 못 이겨 얼굴이 조금 달아오른 폰을 향해 노마가 무해한 표정을 하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분히 약 올리기 위한 표정과 몸짓이었다.

‘하여튼 노마 디아시 경이 점잖다고 하는 사람들은 저분을 잘 모르는 거다. 아무도 안 믿어 주겠지? 억울해!’

폰의 분한 얼굴을 보고 꽤나 만족한 노마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창밖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이렇게 창밖만 바라본 지도 어느덧 일주일째다.

디아시 본성에서 보내는 하루하루는 엄격했다. 니콜라스는 물론 일찍 니콜라스에게 가주 자리를 물려주고 지방 영지로 물러났던 아버지, 밀란 디아시까지 본성으로 돌아와 지나치게 저를 감싸고 돌았기 때문이다.

니콜라스와 밀란은 노마를 다시 잃고 싶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위험이 되는 모든 요소들을 모조리 차단하고자 했다. 가족처럼 여긴 이고의 배신이 그들에게 뼈 아픈 충격과 상처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닉스와 그 잔당을 모조리 처리할 때까지, 나아가 혹시 모를 위험을 모조리 파악하기까지 철저하게 노마를 외부와 차단하고 싶어 했다.

노마가 신체 건강하고 고강하고 어쩌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에게 노마는 죽다 살아난 비련의 형, 아들일 뿐이었다.

노마는 그 극성맞은 걱정과 불안을 모두 이해했다. 자연스럽게 노마의 활동 반경도 최소한이 되었고, 사실상 일주일째 제 방에 갇힌 신세나 다름없었다. 물론 방이라고 표현했지만 그가 지내는 곳은 그 자체로 작은 저택이오, 별궁이었다.

누가 어떤 위험이 될지 모른다는 이유로 노마는 코앞에 있는 정원조차 마음껏 돌아다니지 못했다. 덕분에 그가 디아시 본성에 돌아와 지금껏 마주친 사람은 사용인 한두 명, 기사 몇 명이 전부였다.

부족한 것은 없었으나 답답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노마의 귀환 직후 디아시는 본성의 문을 굳게 닫기까지 했다. 도개교를 올리고 모든 통행을 금지했다.

물론 니콜라스가 닉스의 일로 또다시 바그다트로 향해야 했기 때문에 얼마 안 가 성문을 다시 개방하긴 했지만, 검문은 전례 없이 살벌했으며 통행에 큰 제한이 생겼다.

그 덕에 디아시 본성은 어느 때보다 고요했다. 오늘도 고요해야 맞다.

“…….”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성 전체가 어수선한 것이 아닌가? 노마는 아까부터 미묘하게 수런수런한 바깥에 귀를 기울였다.

디아시 본성은 고아하고 아름답기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그 규모가 황성과 비등한 것으로 더욱 유명했다.

본관에서 별장처럼 조금 떨어져 있는 노마의 거처에서 뭔가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확실히, 평소와는 달랐다.

“바인스 경. 오늘 디아시에 손님이 오나?”

“손님 말이십니까? 아마…… 아, 맥포이의 롬닥일 것입니다.”

그건 또 왜 물으시냐는 얼굴을 하면서도 폰은 기억을 더듬어 성실하게 대답했다. 노마가 혹시나 또다시 저를 놀리는가 싶어 경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맥포이. 롬닥이 말인가.”

노마가 평소보다 조금 느릿하게 대답했다. 아직 ‘노마 디아시’를 잘 모르는 폰은 불행히 그의 그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예, 롬닥이 맞을 것인―.”

휴, 그저 질문이었구나, 하고 그새 경계가 허물어진 폰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얌전히 앉아 있던 노마가 벌떡 일어나 창밖으로 불쑥 몸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헉!”

내민 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노마가 그대로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폰은 제 호위 대상의 돌출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노마 님! 왜?”

한발 늦은 폰이 뒤늦게 창틀을 붙잡고 절규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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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먼 대륙에서 쓴다는 축지법이라도 쓰나!’

폰은 욕지기를 삼키며 죽기 살기로 뛰어 노마를 쫓았다. 디아시 기사 정복은 초가을에 접어드는 날 전력 질주를 하기엔 너무 거추장스러웠다. 땀이 줄줄 흘렀다. 그러나 더워서라기보단 식겁해서 흐르는 식은땀이었으리라.

10년 넘게 잠들어 있었다더니, 말 그대로 시간이 멈춘 채 세월을 보낸 노마 디아시의 신체 능력은 그대로였다.

폰은 니콜라스와 밀란이 노마를 두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에 은연중 노마가 크게 약해졌다 여겼다. 그러나 곧 빠르게 자신의 성급한 판단을 철회했다.

제 우상의 건재함에 기뻐해야 할지, 첫 단독 임무의 실패가 코앞이란 것에 슬퍼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폰이 진심으로 사달이 났다는 생각이 들어 지원을 요청해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랐을 때, 이대로 성을 뛰쳐나갈 기세로 달리던 노마가 갑작스럽게 멈춰 섰다.

상대가 그 유명한 노마 디아시였을 뿐, 폰은 결코 어디 가서 빠지는 기사가 아니었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까스로 노마를 따라잡았다.

“헉, 허억. 경, 갑자기 창으로 뛰어내리시면 어떡합니까!”

‘아니, 진짜 미치셨어요?’라는 말은 다행히 속으로만 했다.

“…….”

노마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롬닥의 행렬이 막 지나간 하얀 대리석 회랑에 서서 점점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이 정도로 답답하셨으면 말씀을 하시지, 호위가 저 하나인데 창밖으로 막 뛰어내리시면―.”

“맥포이 가주께서 직접 오셨나? 아, 직접 오실 리 없겠구나.”

여전히 멀어져 가는 행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노마가 두서없이 중얼댔다.

“맥포이 가주요? 그야, 그쪽도 정신이 없지 않겠습니까.”

“디아시가 맥포이와 거래를 했던가?”

“최근 제국은 롬닥의 발길이 안 닿는 곳을 찾는 게 더 빠릅니다. 하지만 디아시 본성은 롬닥과 거래를 하진 않습니다. 두 가주분들 사이가……. 이게 아니지.”

폰은 기어코 기사가 돼야겠다면 더 이상 말리지는 않으나 언제나 네 입을 조심하라던 아버지 켈리 바인스 경의 엄한 말을 간신히 기억해 냈다.

“아무튼 디아시 경께서 맥포이 가주를 도우셨지 않습니까? 오늘 롬닥의 방문은 맥포이 가주의 답례입니다.”

“……도움.”

“와……, 그나저나 맥포이가 대단하긴 하군요. 저렇게 길고 화려한 행렬은 처음 봅니다.”

웅장하기 짝이 없는 짙은 자색 깃발 여러 대가 일제히 펄럭이는 모습에 폰은 자기도 모르게 기가 질린 소리를 했다. 그러면서 공감을 얻기 위해 반사적으로 노마 쪽을 돌아봤다.

“……?”

폰은 그제야 멀어져 가는 롬닥을 지켜보는 노마의 표정이, 일주일 내내 창밖을 향해 간간이 짓던 표정과 흡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디아시 경. 갑자기 창문으로 뛰쳐나오신 이유가 롬닥에게 용무가 있으셔서 그러신 겁니까?”

조심스레 질문한 폰은 설마 노마가 서부의 마녀라고 불리는 악명 높은 맥포이 가주에게 용무가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건, 아니다. 롬닥을 만나고자 한 것은 아닌데.”

노마가 말끝을 흐렸다. 실은 노마도 얼떨떨했다. 맥포이, 롬닥이 왔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어떤 충동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위험한 요소를 모조리 제거할 때까지 답답하더라도 별관에만 머물라던 니콜라스의 부탁은 그 순간 생각도 나지 않았다.

“글쎄…….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나왔는지.”

노마가 맥없이 중얼거렸다. 시선은 여전히 롬닥을 향한 채였다. 폰은 없는 사람 취급이었다.

마침내 그 행렬 끝이 회랑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사라졌음에도 노마는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짙은 보랏빛의 행렬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의외로 간단하게 답을 알 수 있었다. 너무나 간단해서 맥이 풀릴 정도였다.

‘나는 아이사 맥포이를 보고 싶어 하는구나.’

때마침 어디선가 살랑이는 바람이 불어왔다. 어느새 달아오른 볼에 시원한 바람이 닿자 감각은 더욱 선명했다.

‘갑자기 얼굴을 왜 붉히시지? 진짜 미치신 거 아니야?’

노마가 엄청난 깨달음에 휩싸였을 때, 폰은 초조한 얼굴로 미동 없는 그를 주시했다.

일주일 내내 밀착 호위를 하다 보니 폰 역시 노마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모습을 몇 번 목격한 적이 있었다.

창밖을 보며 아련한 얼굴을 하는 것과는 달랐다. 노마 디아시는 가끔 귀신을 본 사람처럼 허공을 보곤 했다. 아주 잠시였지만 분명했다. 노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폰은 그저 그것이 봉인의 부작용이겠거니 추측만 할 뿐이었다.

노마 옆을 지키나 폰의 주인은 가주인 니콜라스였다. 이런 것 하나하나 니콜라스에게 보고하는 것 역시 폰의 일이었다.

‘보고할 게 늘었잖아. 롬닥 상단과 함께 카탐에 머무르셨다더니 그들과 무슨 일이 있었나? 에이, 설마. 단순히 깨어나신 지 얼마 안 되어 저러시는 거겠지……. 정말 미치신 것은 아니겠지?’

폰의 마음이 급해졌다. 이대로 있다가는 또 노마가 어딘가로 튀어 버릴지도 몰랐다.

“디아시 경, 이제 그만 거처로 돌아가시지요. 아무리 검문을 거쳤다고 한들 롬닥은 외부인입니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전 기사단장까지 할 거라고요!’

폰은 최대한 사람과 마주치는 일을 피하기 위해 별관으로 이어지는 정원을 크게 돌았다. 일을 더 키우는 것은 사양이었다. 노마는 어쩐지 아까부터 상념에 잠긴 듯 느릿느릿 걸었지만, 의외로 잘 따라와 주고 있었다.

그러나 폰의 뒤를 잘 따라오던 노마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선 것은 인공 수로를 따라 이동할 때였다. 폰은 인공 연못과 수로로 꾸며진 정원을 가로지른 것이 패착일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수로를 따라 색색깔의 꽃들과 풀들이 여기저기 울창히 자라나 있었다. 보다 자연스러운 조경을 추구하는 디아시다운 배치였다.

가슴께에 오는 화려한 꽃과 풀 사이에서 가장 아래쪽에 피어 있는 자그마한 보라색 꽃이 노마의 눈에 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방금 막, 보라색만 봐도 얼굴을 붉힐 수 있는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보라색이 세상에서 가장 잘 보였다.

저건 분명 테렛사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성큼 물가로 다리를 뻗었다.

폰은 참방이는 소리가 뒤통수에 닿자 설마 했다. 그가 뒤돌기 무섭게 노마가 수로에 다리 한쪽을 담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악! 디아시 경!”

“이 꽃은 동부에는 잘 없다고 했는데.”

폰이 펄쩍 뛰든 말든 노마는 태연한 얼굴로 소중히 꽃잎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테렛사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동부에선 잘 보이지 않는 꽃인데, 디아시 성에 있다니 신기하네요.”

“방으로 가져가도 되나?”

“그건, 상관은 없지만 테렛사는 보통 하루도 못 갑니다.”

“하루도 못 가는 꽃이라고?”

노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녀에게 처음 줬던 것인데, 그런 꽃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예. 지나치게 약한 꽃이라 테렛사가 일주일을 가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말도 있습니다.”

당혹감을 느끼던 노마가 그 말에 그새 눈을 반짝였다.

일주일을 가면 행운을 준다.

노마는, 아주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이내 노마의 입매가 보기 좋은 호선을 그었다. 폰은 그 미소가 어쩐지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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