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아이사의 예상대로 디아시 형제는 눈물의 상봉을 하긴 했다.
니콜라스는 가만히 본성에 앉아 노마를 기다리지 못했다. 형 소식에 바그다트에서 뛰쳐나와 본성에 귀환한 그는 기어코 성채 바깥까지 나와 제 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니콜라스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이렇게까지 초조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오필리아 님, 디아시 본성 밖에선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는 ‘그분’과 관련된 일을 제외하고 말이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무심한 니콜라스가 유일하게 다채롭게 반응하는 대상이 바로 오필리아였다. 오직 형 찾는 데만 세월을 쏟는 젊은 가주를 안타깝게 여겼던 디아시 사람들에게 태양의 의인화, 오필리아의 존재는 구세주와 같았다.
그 오필리아가 달래도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는 니콜라스 디아시라니, 모두가 당황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곧 제 가주가 처절하게 형을 찾아 헤맸던 12년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길기도 길었다. 아무리 그 니콜라스 디아시라도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가주를 따라나서 잃어버린 가문의 첫째 공자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덕분에 노마는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상태로 덜컥, 자기보다 나이가 들어 버린 동생과 마주하고 말았다.
“…….”
“…….”
마주한 형제 사이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주변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형제의 재회를 지켜봤다.
노마는 거울을 보는 듯, 자신과 무척이나 닮은 얼굴을 한 남자를 홀린 것처럼 바라보았다. 노마의 시간은 멈춰 그는 여전히 스물둘의 모습이었으나, 또래보다 작은 열세 살 소년이었던 니콜라스는 어느덧 스물다섯의 완연한 남자가 되었다.
니콜라스가 나이를 먹어 봤자 스물두 살에서 멈춘 노마보다 겨우 세 살 많은 정도라, 나이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둘은 형제보다도 쌍둥이처럼 보였다.
얼굴도, 눈동자의 색도, 체격도 무서울 정도로 비슷했다.
“노마.”
먼저 움직인 것은 니콜라스였다.
노마는 제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마저 자신과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른 점이라면 남자는 지나치게 딱딱한 표정에, 노마와 다르게 오래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닮아 흑발을 가졌다는 점뿐이었다. 눈썹 모양이 자신보다 좀 더 날카롭기도 했지만 억지로 다른 그림을 찾는 수준이었다.
‘이 남자가, 니콜라스구나.’
노마는 급작스러운 재회에 조금 당황한 나머지 보자마자 사과를 하려던 계획을 전부 잊고 말았다.
대신 그는 떨리는 눈동자를 굴려 남자의 목덜미를 찾았다.
남자의, 니콜라스의 목엔 어떤 흉터도 없었다. 그날 일이 마치 꿈인 것처럼,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기분이 묘했다. 마치 실체 없는 악몽에 시달린 것만 같았다.
그때 표정이라곤 없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노마는 그가 제 눈과 같은 금안에서 쉴 새 없이 굵은 눈물을 떨구는 것을 망연히 바라봤다. 커다란 눈물이 방울져 땅으로 툭툭 떨어지는 모습에 절로 심장이 조여들었다.
표정 변화 없이 그저 눈물만 줄줄 흘리는 모습은 어떤 것보다 서럽게 느껴져 노마는 아찔함을 느꼈다.
그때 절 보며 서럽게 우는 남자가, 니콜라스가 머뭇거리며 한 걸음씩 다가왔다. 니콜라스가 조심스럽게 양팔을 벌렸다. 그는 미묘하게 떨고 있었다.
니콜라스가 그대로 굳어 있는 노마를 꽉 안았다.
“……노마, 형. 나는.”
노마는 잠시 숨을 멈췄다.
뚝뚝 눈물을 흘리는 니콜라스의 목소리는 의외로 분명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동생의 목소리는 노마에게 생경했다.
“보고 싶었어, 형. 너무, 너무 보고 싶었어…….”
노마의 금안이 잘게 흔들렸다.
“당신 동생은 당신을 한순간도 원망한 적 없다는 겁니다.”
순간, 언젠가 아이사가 했던 말이 노마의 귓가에 스쳤다.
“나는 형이 살아 있을 거라고 믿었어. 형이 죽었을 리가 없다고 매일 생각했어. 그래야 살 수 있었어. 노마, 살아 줘서 정말 고마워.”
“십수 년간 많은 게 변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거든.”
‘내 친히 딱 하나 알려 주지. 영광으로 알아라’ 하는 표정으로 비뚜름하게 웃으며 말하던 아이사의 모습이 수순처럼 떠올랐다.
“많이, 보고 싶었어.”
담백하기만 하던 니콜라스의 목소리가 마침내 갈라졌다.
아…….
‘당신 말씀대로입니다. 제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노마는 아주 깊숙한 곳에서부터 제 심장이 점점 빠르게 박동하는 것을 느꼈다.
두근두근―.
‘나는 살아 있다. 죽을 필요가 없다.’
그녀는 어떻게 그렇게 확신했을까. 당신 말처럼 아는 것이 많은 맥포이 가주라 그런 걸까.
그때 니콜라스가 으스러지도록 형을 껴안은 팔에 천천히 힘을 풀었다. 노마는 그제야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금안 두 쌍이 마주쳤다.
“버텨 줘서, 다시 나를 만나러 와 줘서 고마워. 형.”
니콜라스 디아시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여전히 굵은 눈물방울을 툭툭 흙바닥에 떨군 채였다.
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니콜라스의 웃는 얼굴은 귀했다. 어렸을 적부터 웃음에 각박했던 니콜라스가 유일하게 미소를 보이는 대상은 제 형, 노마였다. 그렇다고 노마 역시 그 얼굴을 자주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만나자마자 사죄는 무슨. 남이에요? 차라리 당장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얌전히 동생 팔에 안기기나 하십쇼.”
아이사가 무심히 던졌던 말은 신기하게도 전부 정답이었다. 노마는 이 역시 정답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니콜라스.”
‘이고, 나의 옛 형제. 네가 아무리 나를 불러도 나는.’
노마의 입매가 반사적으로 올라갔다. 사랑스러운 제 동생 니콜라스를 부를 때 언제나 웃던 버릇이 그대로 나왔다.
“나 역시 네가 무척 보고 싶었다. 정말, 많이 컸구나.”
‘너를 따라가지 않을 거야.’
이날은 니콜라스 디아시가 처음 공식적으로 오열한 날로 디아시 기록에 남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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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시의 젊은 기사, 폰 바인스 경은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첫째 공자님’을 슬쩍 훔쳐봤다.
12년 전, 성기사를 꿈꾸던 여덟 살 폰은 노마 디아시 같은 성기사가 되는 것을 바랐다. 비록 성력이 없어 평기사가 되었지만 디아시 가문의 기사는 명예로운 자리였다.
‘정말 살아 계셨을 줄은, 그것도 봉인되어 계셨을 거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지.’
모든 이들이 미친 사람처럼 노마를 찾는 디아시 가주, 니콜라스 디아시를 안타깝게 여겼다. 노마 디아시가 당연히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폰도 그중 하나였다. 노마는 폰에게 기사의 꿈을 꾸게 한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폰 역시 그가 당연히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아까부터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노마는 12년 전 폰이 아버지를 따라 본성에 출입했을 때 종종 봤던 모습과 똑같았다.
그는 멀쩡히 살아 돌아왔으며 늙기는커녕 오히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저와 동년배처럼 보였다. 기사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피부가 고운 탓에 나이가 가늠이 안 되기도 했다.
‘인생 진짜 모르는 일이구나. 내 우상을, 그 ‘노마 디아시’ 경을 내가 호위하고 있다니. 그것도 혼자!’
노마가 디아시로 돌아온 지도 벌써 일주일.
폰은 전 디아시 기사단장, 켈리 바인스의 아들이자 과거 노마와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그의 호위를 맡게 되었다. 신출내기 기사였지만 혈연과 지연발로 특급 승진을 하게 된 것이다.
‘어쩜, 그대로시냐. 신기해 죽겠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폰은 본분을 잠시 잊고 한참 노마의 옆얼굴을 구경했다.
“폰. 아니, 바인스 경.”
불시에 노마가 자신을 부르기 전까지.
“네, 넵.”
폰은 크게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게 노마는 디아시 본성에 도착한 후 내내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사람처럼 굴었기 때문이다. 그런 노마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게 할 말이 있나?”
노마가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띠고 물었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폰은 각 잡힌 자세로 허리를 굽혀 예를 갖췄다. 노마는 폰의 신임 기사다운 칼같은 각에 시선을 두었다.
“……많이 컸구나.”
긴장한 폰의 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때, 노마가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 말에 폰은 대놓고 허리께를 삐끄덕 하고 말았다.
“……기억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저 폰 바인스, ‘2년 전’ 디아시 가주께 기사 서임을 받았습니다.”
가까스로 표정을 갈무리하고 정자세로 선 폰은 세상 딱딱한 얼굴로 2년 전을 강조했다. 어엿한 한 명의 기사가 되었다, 이거였다.
“알지. 그대가 켈리 바인스 경 망토 자락을 붙잡아서 그의 목 동맥이 눌린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부터 남다르다고 여겼다. 키에 맞지 않는 칼을 잡겠다고 떼를 쓰다 바인스 경에게 혼나 연무장으로 이어지는 복도에 드러누워 반나절 내리 운 것도 기억한다.”
그래 봤자 노마는 당시 스물둘. 어렸던 폰이 제 아버지를 따라 본성을 오가며 오만 사고를 치던 시절을 모두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생각보다 똑똑히 저를 기억하고 있는 노마에 폰이 또다시 움찔했다.
“요만했는데. 꼭 잘 깎은 밤톨 같았어.”
“……!”
그러나 말거나 노마는 제 허벅지 중간쯤을 가리키며 신기하다는 듯이 재차 중얼거렸다.
극성맞게 구는 아버지와 니콜라스를 설득해 겨우겨우 근접 호위를 한 명으로 두는 것으로 타협한 노마는, 제 호위를 맡은 ‘폰 바인스’ 경과 전 기사단장인 켈리의 막내아들 폰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노마의 기억에 폰은…….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때 아직 어렸으니 그대는 기억이 잘 안 날 수도 있겠구나. 그대가 일곱 살 때는―.”
“아이참, 자꾸 놀리지 마십시오! 디아시 경, 저는 이제 어엿한 기사고 지금 임무 수행 중입니다!”
놀리기 아주 좋은 상대였다.
제법 기사답게 표정을 잘 갈무리하던 폰이 결국 발끈했다. 그럴싸한 기사가 되었지만 도발에 약한 건 그대로였다. 변하지 않은 것을 하나 더 발견한 노마는 남몰래 웃었다.
‘생각해 보니, 저분 저러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노마의 옆얼굴이, 광대가 미묘하게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폰은 결국 표정을 왈칵 구기고 말았다. 노마 디아시가 워낙 존경받는 고귀한 성기사로 모두의 뇌리에 박혀 있다 보니 폰의 기억에도 미화가 있었다.
노마는 사람을 은근히 잘 놀렸다. 장난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특히 놀렸을 때 반응이 좋은 사람을 좋아했다.
기억을 잠시만 더듬어 봐도 아버지를 따라 본성에 놀러 갔을 때마다 노마 디아시는 저렇게 우아한 얼굴을 하고 사람을 놀리기 바빴다.
하지만 다들 평판과 외관에 속아 아무도 노마가 저를 놀린다는 사실을 믿어 주지 않았다! 젊은 기사 폰은 대번에 억울해졌다.
“어렸을 때와 똑같구나. 기사가 쉽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 않은데.”
그러거나 말거나 노마는 여전히 우아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니―.”
성질을 죽이는 것에 미숙한 폰은 또 대거리를 하려다 멈칫했다. 방금까지 신나게 사람을 놀렸으면서, 창밖을 보는 눈빛이 너무 아련한 것 아닌가.
그 바람에 ‘아니, 경께서 절 먼저 놀렸지 않습니까!’ 하고 소리치려던 폰은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무슨 말이라도 했다간 저 반짝이는 금안에서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사실 노마가 저런 얼굴을 하고 창밖을 보는 것이 이번만은 아니었다.
‘진짜 밖에 뭐가 있나? 어째서 일주일 내내 창밖만 보면 과부라도 된 듯 처연한 얼굴을 하시는지 도통 모르겠네.’
폰은 혹시 몰라 고개를 조금 빼 노마가 바라보는 방향을 쳐다봤다. 오늘도 평화로운 디아시 본성의 서쪽 탑과 푸른 하늘이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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