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데드 엔딩 후에-28화 (28/139)

28.

‘납치당한 맥포이 가주가 광신도 집단에게 몹쓸 짓을 당했고, 죽기 직전에 이단이 되기를 약속해 살아남았다. 그리고 맥포이 가주는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알포를 믿는 이단에게 바치기로 했다.’

자극적인 이야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입맛대로 마침내 위와 같은 소문이 완성됐다.

귀족들은 어느 정도 눈치는 보면서 떠드니 차라리 나았다. 평민들의 상상력은 정말이지 놀라웠으며, 불행히도 맥포이는 그들 사이에 떠도는 저급한 일간지를 하나씩 단속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미처 막아 볼 새도 없이 기정사실이 되어 버린 소문은 다시 온 대륙으로 퍼져 나갔다. 퍼질수록 약간의 변형이 있었지만 큰 줄기는 같았다.

몹쓸 짓을 당한 여가주. 이단에 돈을 바쳐 살아남은 맥포이 가주. 맥포이 가주가 이번에야말로 얼마 남지 않았던 명예까지 전부 잃었다!

자신이 살아 돌아왔음을 광고하는 것은 아이사의 뜻이 맞았다. 하지만 저따위 소문이 공작원을 푼 것보다 오히려 빠르게 퍼진 것은 그녀 뜻이 아니었다.

우습게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신나서 떠들어 대는 쪽이 돈을 들여서 공작원을 푼 것보다 월등히 효과가 좋았다. 그들은 제멋대로 맥포이 가주에 대해 떠들어 대면서 그녀를 순결이니 명예니, 드디어 모두 잃은 사람 취급을 했다.

그거 두 개가 없으면 좀 어떤가 하면 제국은, 특히 귀족들 사이에는 유독 여성에게 혼전 순결을 강조하는 풍습이 은근하게 남아 있었다. 물론 평민들 사이에도 그 영향이 존재했다.

다들 깨어 있는 척, ‘요즘 누가 그런 것을 신경 쓰나? 자유롭게 연애도 하다 결혼하는 것이지!’ 하고 입으로만 나불거렸다. 실제로는 떳떳하지 못했다.

이런 유의 소문이 돌면 귀족들은 그것을 추문이라고 여겼고 여성의 경우에는 높은 확률로 혼삿길에 문제가 생겼다.

세상이 아직 이랬다. 그래서 끈적한 연애는 모두 숨어서 즐겼으며, 암묵적으로 못 본 척, 못 들은 척해 주는 것이 귀족들의 요즘 매너였다.

맥포이 가주가 해적의 정부이니 하는 소리는 어디까지나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우스갯소리에 불과했다. 낭설 따위는 ‘맥포이의 주인’에게 실질적인 타격을 줄 수 없었다.

그런데 같은 귀족 사이에 연애 감정으로 일어난 일도 아니고, 끔찍한 광신도 무리와 추문?

실제로 일어난 납치, 보름 만에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여가주.

자극적인 소재는 사람들의 상상에 무게를 실었다. 인생에 재미가 부족했던 사람들은 잔인하게도 간만에 만난 수위 높은 가십에 대해 신나게 입을 놀렸다.

가볍게 한마디씩 뱉은 말은 칼날과 같았다. 맥포이 가주의 측근과 가신들은 자신들의 가주가 명백한 피해자임에도 쏟아지는 칼날에 분개했다. 사실도 아닌 일들이 사실이 되어 가주와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맥포이라도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자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 볼 수 없었다. 창창한 귀족 여성이 겪을 수 있는 불행을 그들은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로 여겼기 때문이다.

저급한 소문이 판을 치고 여느 때처럼 기정사실처럼 퍼져 나가고 있을 즈음, 맥포이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도그만 경은 이번만큼은 참을 수 없다고, 전부 죽여 버리겠다며 길길이 날뛰긴 했다. 모두가 늙은 기사를 막기 위해 고생했다. 그러나 정작 맥포이 가주는 무시를 택하고 곧장 제 할 일을 하러 맥포이 본성으로 떠났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맥포이 가주가 살아 돌아온 지 한 달이 되어 갔다.

그사이 맥포이 가주는 가문 하나를 박살 내랴, 제가 죽은 줄 알고 계약을 어긴 놈들에게 불이익을 주랴, 성력이 강한 사람을 수배하랴 아주 바빴다.

여느 때처럼 퍼진 소문이 평소보다 질이 나쁘다는 이유로 그것을 우선순위에 둘 수 없었다.

오랜만에 고개를 든 에리카는 눈 밑이 검다 못해 볼까지 검은 기가 도는 제 주인를 잠시 바라봤다. 물론 에리카의 눈 밑이라고 다를 바는 없었다.

“…….”

에리카가 보기에 아이사는 평소보다 더 강박적이었다. 어딘가 조급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이 시급하기야 했다. 가문 하나를 없애는 일은 신속해야 하며 실수가 없어야 했으니.

안타깝게도 성지 바그다트와 디아시에 심어 둔 정보원의 최신 보고에 의하면 닉스 일 역시 진전은 없었다. 닉스는 봉인된 채였지만 언제 갑자기 풀려도 이상하지 않은 불안정한 상태 그대로였다.

이 잡듯이 온 대륙을 뒤졌지만 닉스를 완전히 봉인해 가루로 만들 수 있는 자를 아직 찾지 못했다. 일 처리가 이례적으로 지지부진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맥포이 가주가 갑자기 성력이 생겼다는 말이 새어 나가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 말고 가주가 초조해하는 다른 이유가 분명 존재하는 듯했다. 10년 동안 아이사를 모신 에리카의 촉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가주님이 불안해한다.

‘강박적인 인사는 맞았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꼭 죽을 날짜 받아 놓은 사람처럼 왜 저러시나?’

아이사의 상태를 명료하게 정의한 에리카는 와작 이맛살을 찌푸렸다.

“가주님. 살살 하시죠. 그러다 과로사하시겠어요.”

결국 참지 못한 에리카가 한마디 했다. 당연히 무시할 줄 알고 한 말에 깃펜을 쥔 아이사의 손이 우뚝 멈췄다.

“……미친. 그런 방법도 있지. 그렇게도 죽을 수 있겠어.”

해괴망측한 소리를 중얼댄 아이사가 처리하던 서류를 매섭게 노려보더니 깃펜을 내려놨다. 에리카는 미친 사람 보듯이 제 주인을 쳐다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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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미쳤……. 역시, 얀 님을 다시 불러오겠습니다.”

의외로 주인을 막 대하는 에리카는 그나마 예의를 차려 미쳤냐고 묻는 대신에 주치의를 부르겠다고 했다. 내 성품이 너그러운 편이 아닌데 측근들은 어째 하나같이 은근히 무엄했다.

“……머리 안 다쳤다니까.”

“제 눈앞에서 쇠막대로 머리를 맞고 쓰러지셨는데요. 분명 그때 머리에 문제가 생긴 것이 확실합니다, 가주님.”

에리카의 얼굴은 장난기 하나 없이 진지했다. 그녀는 내가 완전히 미친 사람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성력 생기셨다면서요. 자체 회복 같은 건 못 하십니까? 과로사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드셨다면 이쯤에서 잠시 쉬시고 산책이라도 하시죠. 안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근육이 모조리 퇴화하겠습니다.”

“내 성력이 아니라 맘처럼 안 돼. 산책은, 됐네.”

“엄청난 성력이라도 그다지 쓸모가 없군요. 아무튼 시모어 부인이 오면 가주님 지금 모습을 보고 기절할 겁니다.”

에리카가 불순하게 내 명치께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노려보자 그녀는 바쁜 척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기절은 무슨……. 엄하기 짝이 없는 시모어 부인은 나를 보자마자 내가 소녀 시절이었을 적처럼 훈계를 늘어놓을 것이다.

“저는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후, 그럼 쉬면서 이거나 정해 주시죠.”

“아니, 쉬라며.”

나는 인상을 쓰며 반항했지만 에리카는 감히 가주의 말을 씹고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가주님을 둘러싼 소문이 심상치 않습니다.”

“하루 이틀인가?”

“진지하게 생각해 주세요. 이게 키소만큼은 아니더라도 급한 사항이긴 합니다, 가주님. 키소뿐만 아니라 맥포이까지 이단으로 찍히게 생겼단 말입니다. 이대로 두면 롬닥에도 영향이 갈 것이 뻔합니다.”

“하여튼, 다들 상상력 하나는 끝내주는군. 다들 심심한가 봐? 나 없으면 재미없어서 어떻게들 살려고 했대?”

“이번 소문들은 특히 질이 나쁩니다. 어느 정도 해결하시죠. 특히 이단 소문은.”

“걱정할 것 없어. 그러니 키소부터다. 이단에 대한 소문은 그다음이야.”

의외로 저지르는 것이야 간단하다. 원래 수습이 오래 걸리는 법. 놓친 키소를 싸그리 잡아들이고 키소 소유의 광산을 황제 소유 비밀 상단으로 넘기는 작업이 아직 한창이었다.

“가주님, 그럼―.”

에리카가 잠시 말을 삼켰다.

“……추문은, 추문도 그대로 두실 겁니까? 추문은 결국 가주님의 약혼에도 영향을 줄 겁니다. 이걸 빌미로 모퍽이 결혼을 미루자는 둥, 시끄럽게 굴 수 있습니다.”

에리카는 어쩐지 자존심이 팍 상해 보이는 얼굴을 하곤 뒷말을 붙였다.

“……필립 모퍽이야 파혼을 입에 담을 깜냥도 없을 텐데, 뭐. 가노와 나 사이에 애가 있다는 소문이 돌아도 아무것도 못 하는 자가 이제 와 뭘 할 수 있겠나?”

나는 가기 싫다고 그 덩치로 생떼를 부리다 겨우겨우 넥타로 가는 배에 올랐던 가노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가노와 애라니, 처음 들었을 땐 어이가 없어서 박장대소한 소문 중 하나였다.

“그거야 호사가들이 물증도 없이 재미로 지껄이는 말이니까 그렇죠. 이번 추문은 가주께서 실제로 납치를 당한 기간이 있어 제법 무게가 있습니다. 실제로 광신도 무리가 벌이는 범죄들이 대부분 그런 쪽이기도 하고요.”

“……지랄들이군.”

“네, 지랄들이죠. 아무튼 도련님이 본성으로 돌아오기 전에 어느 정도 정리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치가 영문도 모르고 시골에 짱박힌 지도 어느새 두 달을 앞두고 있으니, 꼬맹이 인내심에 진즉 한계가 왔을 것이다. 그러나 정적 많은 고모는 이르게 사춘기가 온 소년의 섬세한 마음을 하나하나 신경 써 줄 여유가 없었다.

“추문은, 하던 대로 무시하라. 내가 무슨 해명을 해도 사람들은 믿고 싶은 대로 믿을 거다. 한두 번이냐? 그리고 어차피 아치는 지금 본성에 못 불러들여. 키소 정리가 덜 됐잖아. 지금 와 봤자 아치가 표적밖에 더 되나? 한 달은 더 거기 둬. 폴른 경이 잘할 것이다.”

“…….”

해리 폴른은 맥포이 후계자를 호위하는 맥포이 제2기사단의 단장이다. 그는 소라색 눈에 금발을 가진 전형적인 미남자로 맥포이 최고 미남으로 유명했다.

젊은 나이에 맥포이 제2기사단장을 맡은 해리는 그 출신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평민에 고아로 도그만 경이 주워 왔다. 지나치게 곱상한 것이 걱정되어 주워 왔더니 그의 재능이 엄청나 도그만 경이 아꼈다.

해리 역시 도그만 경을 잘 따라서 그가 은퇴할 때 같이 가문을 나섰다가, 도그만 경과 함께 다시 돌아와 현재는 젊은 나이에 단장직을 맡고 있었다.

이 역시 인력난 때문에 벌어진 파격 인사 조치이긴 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폴른 경이 여러모로 적임자이기도 했다.

“……네, 한 달.”

그런데 이 긴 침묵은 뭐지? 에리카답지 않게 조금 느린 반응에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

“뭐야, 대답이 왜 그래? 퇴근 못 했다고 시위하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퇴근 못 한 게 하루 이틀인가요? 그보다, 노마 디아시 말입니다.”

정색하고 말을 돌리는 모습이 어째 수상했으나 갑작스럽게 소환된 노마 디아시 때문에 의심은 순식간에 잊혀졌다.

“뭐, 왜.”

이번엔 내 쪽에서 수상한 반응을 하고 말았다. 에리카는 왜 저러냐는 듯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뭐긴요? 진짜 그와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별일 없어. 그냥 은인일 뿐이야. 왜, 뭐, 왜.”

“……뭐 아닙니다.”

어쩐지 발끈하는 나를 두고 에리카는 별로 안 궁금하다는 듯이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말았다. 어쩐지 괘씸했다.

“노마 디아시가 디아시 본성으로 돌아갔습니다. 맥포이 제3기사단과 만나자마자 카탐에서 곧장 디아시 본성으로 향했고, 제3기사단은 디아시에서 오늘 맥포이로 복귀했습니다.”

“…….”

“디아시 쪽에서 극비로 부쳤지만 벌써부터 말이 돌고 있어요. 노마 디아시가 살아 있었고, 돌아왔다고.”

‘집에 갔구나. 그렇게 뭉그적거리더니.’

노마가 겁먹었던 것이 무색하게 디아시 형제의 관계는 걱정할 필요 없을 것이다. <오필리아와 밤>에 나온 것처럼 니콜라스와 뜨거운 눈물의 재회 이런 거나 했겠지, 뭐.

“누구랑 다르게 살아 돌아왔다고 마녀네, 이단이네 하는 소리는 안 듣고 기적이라는 소리나 듣나 봅니다. 더 추적할까요?”

에리카가 답지 않게 비아냥거렸다. 이번 일이 꽤나 억울한 모양이다.

“사람은 떼지 말고, 이렇다 할 변화가 있을 때만 보고하라.”

“알겠습니다.”

누구는 살아 돌아와 마녀 취급이고 누구는 기적 취급이라니.

어쩐지 실소가 터졌다. 동시에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사람을 쳐다보던 노마 디아시가 생각났다.

괜스레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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