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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드 엔딩 후에-27화 (27/139)

27.

급하게 여관으로 돌아온 엑트라는 부채를 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엑트라의 수행 비서가 비틀거리는 그녀를 황급히 부축했다.

아이사가 탄 마차는 이미 한참 전에 떠난 후였다. 와중에 아이사는 엑트라와 노마에게 편지를 각각 한 통씩 남겼다.

엑트라는 방금 차인 사람 같은 표정을 지으며 옆에 선 노마를 돌아봤다. ‘가주께서 떠나신답니다, 디아시 경! 어서 돌아갑시다!’ 하고 엑트라가 말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노마는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노마는 사용인이 내민 잘 접힌 편지를 잠시간 내려다보다가 평소보다 조금 느린 동작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노마의 움직임에 그가 안고 있던 조그마한 생명체가 그의 가슴팍에서 예민하게 버둥거렸다. 담장에서 노마에게 한번 안긴 뒤에 도통 떨어지질 않아 어쩌다 보니 여관까지 데리고 오게 된 새끼 고양이었다. 고양이는 잠시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 악착같이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노마는 굳이 제 방으로 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조용히 편지를 뜯었다. 엑트라를 비롯해 주변에 있던 사용인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그의 반응을 살폈다. 편지를 읽어 내리는 노마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곧 노마는 빠른 동작으로 편지를 다시 곱게 접어 품에 넣었다. 지켜보던 사람은 벌써? 하는 시선을 던지며 그런 노마를 좇았다.

“부인. 죄송하지만 먼저 올라가 봐도 되겠습니까?”

“네, 네! 피곤하실 테니 어서 올라가 쉬세요, 경.”

노마가 정중하게 물으니 아무도 그를 붙잡아 편지 내용을 묻거나 기분을 물을 엄두를 못 냈다. 그들 머릿속에선 이미 자신들의 가주님과 기사님은, 낭만 문학에 나오는 여느 주인공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용인들은 엇갈린 사랑을 직관하고 있는 사람들이 되어 모두 노마의 눈치를 봤다. 그들은 언제나와 같이 온화한 얼굴을 한 기사님이 고양이와 편지를 가슴에 품고 계단을 올라 사라지는 모습을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이 또한 가주님께서 알았으면 전부 등짝을 맞고 쫓겨났을 망상들이었지만, 그랬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어느새 해가 지고 색색의 등불이 카탐을 밝히기 시작했다. 간편한 차림을 한 노마가 창가에 섰다. 알록달록한 색들이 그의 눈동자에 비쳐 금안이 여러 빛으로 물들었다.

미동 없이 창밖을 내려다보는 그의 손엔 맥포이 가주가 남긴 편지가 들려 있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합니다.

맥포이 제3기사단이 당신 가는 곳 어디든 호위할 것이며 이후 디아시 가문을 통해 감사 인사를 하겠습니다.

―맥포이 가주 배상.

짧다. 할 말만 적혀 있는 것이 참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마는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와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가만 눈을 감았다. 여관으로 돌아오는 마차에서부터 지금까지 끝없이 침잠하는 이 기분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몰랐다.

니콜라스와 재회를 앞두고 내내 긴장한 것과는 결이 다른 감정이었다. 확실한 것은 노마 자신이 크게 실망했다는 것이다.

‘실망을 했다면, 내가 기대를 했다는 것인가.’

노마는 생각했다.

‘무엇을, 왜?’

어린아이도 아니고 맥포이 가주가, 그녀가 고작 불꽃놀이를 함께 보자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인사는커녕 얼굴도 보지 않고 그렇게 떠나서?

그녀가 얼마나 바쁜지,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는 열흘 조금 넘게 누구보다 가까이 지켜봤으니 잘 알았다. 전시와 같은 상황에서 이런 급작스러운 헤어짐은 어쩌면 당연했다.

‘아이사 맥포이 가주와 노마 디아시 경은 아무 사이가 아니니까.’

그런데 그걸 다 알면서도 노마는 어쩐지 서러운 마음이 드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편지를 잡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노마의 손끝에서 종이가 바삭 구겨졌다.

창밖으로 멀리, 사람들의 함성이 밀려왔다. 노마는 그 소리에 슬며시 눈을 떴다. 불꽃놀이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시작은 하얀빛이었다. 하얀빛이 완전히 사그라들기 전에 이어진 푸른빛이 카탐 하늘을 환하게 밝혔다.

노마는 조용히 창틀에 머리를 기대어 이따금 빛으로 밝혀지는 검푸른 하늘을 바라봤다. 여관과 축제 거리는 제법 거리가 있어 불꽃이 직접 보이지는 않았다. 그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빛의 잔상뿐이었다.

멀거니 풍경을 바라보고 있지만 창밖의 광경 따위가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어쩐지 속이 울렁거려 다시 눈을 감았다.

니콜라스, 이고, 칼리페시.

세 사람으로 벅찬 머릿속에 맥포이 가주가 새롭게 등장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노마 자신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맥포이 가주가 생각나.’

이상한 일이었다.

눈을 뜨고 처음 본 것이 그녀라 그럴까. 눈을 뜨고 매일 본 것이 그녀라 그런 걸까.

그녀의 목소리가 날 깨워서? 그녀가 가끔씩 화를 내며 던지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서?

그런 그녀가 말없이 사라져 버려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일까. 지금은 머릿속에 아이사, 그녀만 한가득이다.

그때 그림자보다 새까만 고양이가 이리저리 방 안을 탐색하다, 노마가 기대선 창틀에 사뿐히 뛰어올랐다. 노마 옆에 똬리를 튼 고양이가 작게 울었다. 꼭 여길 보라는 울음 같아서 그는 느리게 눈을 떠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팡―.

축제다운 폭발음이 들리고 아까보다 화려한 색들로 하늘이 물들었다. 그의 연한 은발, 금안, 흰 피부에도 알록달록한 색이 스몄다.

환해진 사위 덕분에 제 옆에 앉은 작은 생명체의 모습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작은 덩치, 검은 털, 뾰족하게 올라간 눈꼬리가 꼭…….

‘아무리 봐도 그녀와 닮았어.’

무례한 생각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얼굴이 연상되어 머리는 더욱 복잡했다.

‘저 고양이와 닮았다고 말하면 아이사 님은 또 분해하실 텐데.’

그러나 그녀는 떠났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노마는 다시 가만 눈을 감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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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로 직행한 아이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황제를 알현하는 것이었다.

황도 노른자 땅에 위치한 맥포이 저택에 불시에 들이닥친 아이사는, 말 그대로 옷만 갈아입고 황제를 찾아갔다.

황권이 바닥을 친 시대에도 황제는 무치. 그럼에도 황제는 건국제 때 일어난 일에 대하여 친히 위로와 유감을 표현했다. 기꺼이 맥포이 가주가 살아 돌아온 것을 축하해 주었다.

그도 그럴 게 늙은 황제는 이렇다 할 치적도, 번듯한 후계자도 없었다.

영특하여 기대했던 후계 칼리페시는 무려 이단을 행하다 죽었다. 아끼는 자식임에도 서둘러 그 죽음을 묻어야 했다.

칼리페시 대신으로 그나마 그녀와 닮은 구석이 있는 황자 빌리넌트를 황태자로 봉했지만, 불행히도 빌리넌트는 칼리페시의 괴팍한 성정만을 닮았다. 머리가 나쁘고 성정만 포악하니, 귀족들은 새로운 후계자를 썩 반기지 않았다.

미래가 어두운 늙은 황제는 제국을 좌지우지하는 대귀족 앞에서 힘을 쓸 수 없었다. 덕분에 알현은 길지 않았다.

황제는 맥포이 가주를 위로하며 닉스와 그 잔당을 잡아들이는 일에 아낌없는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더불어 그 자리에서 맥포이 가주와 황제 사이에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졌다. 맥포이 가주는 황명과 황제의 침묵을, 황제는 남부의 키소 가문 소유의 소금 광산을 얻었다.

아이사 맥포이의 경우 팔촌 오라비 게일을 품고 있는 남부의 유력한 귀족, ‘키소’의 뿌리를 뽑아야 했다.

그녀가 어린 나이에 가주직에 올라 가장 먼저 한 일은 대대적인 숙청을 일으켜 자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성질 더럽고 멍청한 게일이 그 숙청에서 살아남은 비결이 바로 키소의 데릴사위로 들어간 것이었다.

평생 멍청하더니 딱 한 번 똑똑한 짓을 한 것이다!

게일을 없애는 일이 어려워졌을 뿐만 아니라, 게일 하나 없애는 것으론 끝나지 않게 되었다.

원래 귀족 사회라는 것이 결혼으로 맺어진 관계가 더 끈질긴 때가 있다. 게일의 경우 맥포이의 정체성을 아주 옛날에 팔아먹어 키소가 되길 택했고, 키소는 그런 게일을 가문의 일원으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단언컨대 은근슬쩍 맥포이를 꿀꺽할 계획이 멍청한 게일의 머리에서 나왔을 리 만무했다. 욕심 많은 키소 가주의 발상일 테니, 확실히 뿌리 뽑기 위해선 키소를 없애야 했다.

놔두면 곪다가 언젠간 터진다. 이 폭탄을 아치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

귀족 가문이 다른 귀족 가문을 없애는 일은 세간에 매우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자칫 모든 귀족의 적이 될 수도 있었다. 더더욱 키소를 건들기 쉽지 않았다.

때문에 명분이 필요했고, 그게 황명이라면 아주 좋았다. 황제는 맥포이 가주에게 닉스와 그 잔당을 잡아들이는 일에 ‘아낌없는 지원’과 그들을 엄벌할 것을 약속했다.

어리석은 키소와 게일은 맥포이 가주가 죽었다고 생각해 역시나 발 빠르게 움직였다. 실로 멍청한 짓이었다.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곳은 없는 법이다. 키소를 탈탈 털어 알포를 믿는 광신도 하나 안 나올까? 그 광신도를 ‘게일의 오래된 수족’으로 만드는 일은 숨 쉬듯이 간단한 일이었다.

키소가 맥포이를 삼키려는 야망으로 닉스와 손을 잡았다. 키소가 이단을 행했다. 누가 들어도 그럴싸한 이야기 아닌가!

황제의 경우엔 마침 새로운 용돈벌이가 필요했다. 이왕이면 한 번 해 먹고 끝나는 것이 아닌, 황금알을 낳는 무언가를 원했다.

이렇다 할 업적은 없고 황권은 바닥에, 떨어진 데다, 심지어 후계자 세우기까지 실패한 황제는 공허했고 재물 욕심으로 그것들을 채웠다. 아이사는 그 욕심을 채우는 일에 기꺼이 손을 보태기로 했다.

키소가 가진 소금 광산은 황제의 마음에 쏘옥 드는 것이었다. 동부의 대대적인 소금 광산에는 털끝도 미치지 못하나 그 수입이 안정적이며 쏠쏠했다. 키소가 남부 유력 귀족이 된 배경도 소금 광산에 있었다.

황제는 키소를 축출하고 나면 소금 광산을 진상하겠다는 아이사의 말에 매우 흡족해했다. 그는 아이사 맥포이가 키소의 영지에서 무슨 일을 벌여도 눈감아 주기로 했다.

설득하고 말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신관을 불러다 약식으로 깰 수 없는 맹약을 맺었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키소가 귀족 명부에서 사라지기 3일 전의 일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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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포이 가주는 올해도 건국제의 가십을 화끈하게 책임졌다. 맥포이 가주가 살아 돌아와 황제를 알현했다는 소식은 황도에서부터 제국 전체로 빠르게 퍼졌다.

건국제 기간이 막바지라 귀족들은 대부분 황도에 남아 있었다. 크고 작은 무도회가 황도 곳곳에서 매일 열렸기 때문에 맥포이 가주가 살아 돌아온 이야기는 특히 귀족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 갔다.

어느 때보다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간 것은 정보원을 통한 아이사의 공작이기도 했다. 귀족이고 평민이고, 맥포이 가주가 기어코 살아 돌아온 일에 대해 한 명씩 말을 얹기 바빴다.

“맥포이 가주 그 독한 계집이 살아 돌아왔다며?”

“세상에, 그게 정말인가? 분명 그날, 건국제 당일에 내가 직접 그 여자가 쓰러지는 걸 봤는데? 나는 그때 이미 죽은 줄 알았지!”

“에이, 전부 새빨간 거짓말 아니겠어? 그 미친 광신도 무리에서 어떻게 살아 돌아오나! 원수 사이라던데. 다, 맥포이 그 돈 귀신에 씐 것들이 제 주인 없으면 상단이 망할까 봐 개수작을 부리는 것 아닌가?”

“아니네! 황제께서 친히 위로하며 재물도 내리셨다는걸. 그 흉측한 검은 마차를 황도 광장에서 본 사람도 있다고!”

“…….”

“…….”

그렇다면 대체 맥포이 가주는 어떻게 살아 돌아왔단 말인가?

“역시 그 여잔 마녀였어!”

“맥포이 가주도 광신도가 된 것 아닌가? 그래서 살려 준 것이지.”

“원래부터 광신도였다는 말이 있네.”

“내 사촌이 서부에 사는데, 사실은 10년 전에 맥포이에 일어난 그 사건도 그 여자가 광신도와 손을 잡고 벌인 짓이라는 말이 있어. 제 가족을 제 손으로 죄다 죽인 것이지.”

“세상에. 하긴, 그럼 그 난리 통에 살아남은 것도 말이 되는군!”

“맥포이는 물론 서부 전체가 알포를 믿는다는 소문도 있다고. 사실은 서부 사람들이 다 이단이라는 거지. 어휴 무서워라.”

자극은, 자극을 더해 갔다.

“내 듣기론 맥포이 가주가 사실 닉스, 그 이단자의 애인이라더군.”

“에구머니!”

“내가 듣기로는! 그 광신도 무리에게 몹쓸 짓을 당했대!”

“망측하군.”

“에구머니나! 그게 진짜야?”

‘진짜야?’가 ‘진짜다!’로 퍼지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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