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그 여잘 찾았다고? 언제? 아니, 어떻게 찾았지? 설마 정말 닉스 놈과 한패이기라도 했나?”
가노가 목소리를 낮추고 다급하게 물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럼 그 여자도 같은 곳에 갇혀 있었어? 어떻게 된 거야.”
“자네 능력 부족이 아니니, 그렇게 충격받지 않아도 돼. 가면서 말하지. 시간 없잖아.”
충격에 빠진 가노에게 나름의 위로를 건넸다. 그 니콜라스 디아시가 작정하고 숨겼으니 아무리 가노라도 오필리아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대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이 세상은 본디 그 두 사람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는 거란다. 가노여.’
나는 속으로 냉소했고 가노는 날강도에게 전 재산을 털린 사람처럼 황망한 얼굴을 했다. 그 기분, 이쪽도 잘 안다.
“아, 그리고―.”
내가 운을 떼자 가노가 ‘또 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 성력 생겼더라. 아니, 있던데.”
“…….”
가노가 한 번에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처럼 또다시 잠시간 침묵만 했다. 안 그래도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그는 곧 미간을 더욱 일그러뜨리더니 천천히 위아래로 나를 훑어봤다. 무언가를 가늠하듯이.
나는 그 무엄한 짓거리에 한마디 하려다 참았다. 이내 가볍게 한숨을 쉰 그가 황망히 입을 뗐다.
“……그래. 당신은 농담을 더럽게 못하지.”
“지금 농을 칠 상황인가?”
은근히 빈정이 상하기도 해서 나는 얼굴을 팍 구기고 되물었다.
“오, 아이사. 지금, 진짜라고? 그런 게 가능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스읍. 호칭.”
“……그래, 가주. 아니, 지금 호칭이 문젠가? 이것도 그 여자와 관련된 거야?”
“그래. 특급 기밀이니 목소리 낮추게. 여기서 이야기할 문제가 아니야.”
나는 닫힌 방문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가주……. 당신, 도대체……. 정말 미쳐 돌아가는군. 그러니까―.”
가노는 복잡한 표정으로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붉은 머리칼이 번듯한 이마 뒤로 시원히 넘어갔다.
“어이! 밖에 아무나 들어와라.”
가노가 뭔갈 더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나는 기회를 뺏어 버렸다. 슬슬 마음이 급했다.
나의 우렁찬 목소리에 즉각 문이 열리고, 얼굴이 눈에 익은 사용인 한 명이 후다닥 뛰어 들어왔다. 아마 엑트라의 비서 중 하나였을 것이다.
“황도까지 갈 가장 빠르고 좋은 마차를 준비하라. 준비가 되는 대로 출발하겠다.”
“네, 가주님!”
빠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사용인은 바로 나가지 않고 우물쭈물거렸다.
나는 기꺼이 추가 질문을 허용하며 턱짓했다. 그러자 잠시 머뭇대던 사용인이 입을 열었다.
“저, 가주님. 그, 스탕 부인에게는―.”
“배웅은 필요 없다. 상단 일이나 보라 하고, 내가 편지를 남기지. 종이랑 깃펜 가져와라.”
“저 그럼…….”
“또 뭐야?”
짜증 낸 게 아니라 원래 말투가 이 모양인 것인데 사용인이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디아시 경은, 디아시 경은 어찌하나요! 원래 계획 그대로, 이틀 후에 호위대를 편성해 모실까요?”
“…….”
“……디아시 경이라니. 내가 아는 그 디아시?”
꿋꿋하게 질문하는 필사적인 사용인의 모습은 어쩐지 용맹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침묵했고, 가노는 얼굴을 왈칵 구기곤 내게 물었다.
가노는 허례허식과 가식에 찌든 제국 귀족의 생태를 싫어했는데 개중에서도 그 정점에 있는 디아시를 특히 꺼려했다. 디아시가 좀 유별나기도 했으니, 그는 디아시만 보면 두드러기가 올라올 것 같다고 한 적도 있었다.
나는 가노의 질문을 씹었다. 어쩐지 착잡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그저 난감해서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래 계획대로 한다. 제3기사단이 카탐에 도착하면 그들을 호위로 편성해서 그가 가고 싶다 하는 곳까지 편히 모셔라. 성의 표시는 영지에 돌아가서 내가 직접 한다.”
“지금 당장 모셔 오면 떠나시기 전에 인사를 나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모셔, 올까요?”
손을 달달 떠는 주제에 사용인은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됐네. 당장 떠나야 하는데 배웅받을 시간 없어. 냅두게.”
내가 손을 휘휘 저어 축객령을 내리자 사용인은 풀이 죽은 얼굴을 하고 ‘네, 가주님’이라고 답하며 자리를 떴다.
“가주. 경? 디아시 경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야. 니콜라스 디아시는 아닐 거 아니야.”
‘……닥쳤으면.’
와중에 가노가 끈덕지게 물었지만 나는 그를 철저히 무시한 채 그대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어쩐지 도망치는 기분이 들었다.
가노가 ‘노마 디아시’를 떠올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니콜라스 디아시는 ‘디아시 가주’로 불리고, 몇 년 전 별안간 은퇴해 버린 디아시 선대 가주 밀란 디아시는 보통 ‘디아시 공’으로 불렸다.
니콜라스를 제외하고 ‘노마 디아시’는 모두에게 죽은 사람이었다. 그 아버지 밀란조차 죽었다고 여겼을 것이다.
쿵쿵쿵.
가슴이 소란했다.
‘찝찝해.’
이건 분명, 함께 망할 불꽃놀이를 보자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탓일 것이다.
* * *
harbaragi_syk
“저희 가주님은 한 번에 못 알아듣는 걸 굉장히 싫어하세요!”
엑트라가 종이를 보지도 않고 휘리릭 서명을 하며 말했다. 노마는 시선을 다른 데에 두고도 정확한 자리에 서명을 하는 엑트라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벌써 엑트라 입에서 아이사가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만 스무 개가 나왔다.
“우물쭈물하는 것은 더 싫어하십니다.”
……이젠 스물한 개. 엑트라가 검지를 치켜들며 강조했다.
“또 가주께선 말 타는 걸 싫어하십니다. 탈것 자체를 워낙 안 좋아하신다고 해야 할지……. 그래도 워낙 이곳저곳 다녀야 하시는 분이라, 가주님 마차는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서 특별 제작했습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그게 아주 그리우셨을 거예요.”
엑트라가 자신의 비서에게 장부를 넘기며 끌끌거렸다.
“아, 그렇다고 막, 예민하시기만 한 분은 아닙니다. 어린 시절부터 배도 타시고 타지 생활도 길게 하신 편이라 잠자리는 또 안 가리십니다.”
그러면서 또 오해 말라며 손까지 내저으면서 아이사를 변호했다. 노마는 흙바닥에서 곧잘 자던 그녀를 떠올리곤 엑트라의 말에 크게 공감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또 다음 가게에 도착했다.
“맥포이 가문 상징색이 보라색이지 않습니까? 가주님 눈동자 색도 그렇고요. 가주님께선 왼손에 가보로 내려오는 반지를 항상 끼고 계신데, 귀하진 않지만 보라색이라 자수정이 쓰였습니다.”
가게로 들어가는 멧 통을 일일이 세던 엑트라가 롬닥의 깃발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가 말한 자수정 반지라면 노마도 익히 본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가주님은 보라색 장신구, 옷 이런 걸 싫어하세요. 질리셨다 이거죠. 피부가 하얘서 잘 어울리시는데도…….”
말꼬리를 흐린 엑트라는 마지막 멧 통을 굴리는 인부의 등짝을 부채로 촥, 떠밀어 도왔다.
“그리고 항상 머리를 바짝 땋아서 아래쪽으로, 쪽을 지고 계시잖습니까?”
엑트라의 이야기에 한껏 몰입한 노마가 고개를 순연히 끄덕였다. 가게의 창고 쪽으로 향하는 동안 어느새 노마는 그녀를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사실 그건 심한 곱슬머리라 그렇습니다. 거드는 하녀들이 없어서 대충 하나로 묶기만 하시고 여기까지 오셨으니 경도 보셨겠지요?”
노마는 산발이 된 아이사의 검은 머리칼을 떠올리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데릭! 여기 숫자가 맞지 않잖나! 디아시 경,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그때 엑트라가 뒷줄에 서 있던 남자에게 버럭 소리쳤다. 그녀는 내내 떠들면서도 남들이 못 찾는 사소한 실수를 날카롭게 잡아냈다. 기가 막힌 멀티태스킹에 노마는 짧게 감탄했다.
그리고 또 다음 가게.
“어디까지 했지요?”
슬슬 지치는지 엑트라가 파닥파닥 빠르게 부채질을 하며 물었다.
“가주님이 심한 곱슬머리이신 것까지 말했습니다, 부인.”
“아! 곱슬머리. 그래요, 특히 여름에 더 곱슬기가 심해지는데 그게 얼굴에 닿는 걸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더 바짝 땋아 쪽을 짓곤 하시죠. 같은 이유로 주렁주렁한 장신구나 옷들도 싫어하십니다. 나 참, 그래서 평소엔 단출한 차림만 고집하세요.”
엑트라는 얘기하다 보니 그 점이 불만인지 하소연하듯 말했다.
“음식도, 저런 단것은 잘 안 드세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엑트라는 축제 거리의 한 노점상에서 파는 설탕으로 절여진 포도알 같은 것들을 부채 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확실히 노마는 아이사와 몇 번의 식사를 함께 하면서 그녀가 단것에 입을 대는 모습을 본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어제 축제 거리에서 제게 먹어 보라며 알록달록한 설탕 과자를 사 주었다. 이상한 음식이 아니라며 먼저 그중 하나를 입에 넣기도 했다. 아이사가 사 준 설탕 과자는 매우 달았다.
노마는 어쩔 수 없이 입꼬리가 상승하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부인.”
“네네! 가주님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다 물어보십쇼!”
엑트라가 의기양양하게 큰소리쳤다.
“그러면 가주께서 좋아하시는 건 무엇입니까?”
아―.
“…….”
엑트라는 그제야 자신이 아이사가 싫어하는 것만 늘어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기억을 뒤졌다.
그러게. 가주님이 좋아하는 것은 뭐더라? 그분이 싫어하는 건 수천, 수만 가진데 막상 좋아하는 게 뭔지는 확실치 않았다.
아치 도련님? 맥포이? 롬닥? 멧? 돈? 아니야, 그런 거 말고 좀 더 평범한 거 없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디아시 경. 이 스탕이 떠올려 보겠습니다.”
엑트라가 신음을 하며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그사이 노마는 시선을 돌려 주변을 찬찬히 둘러봤다.
그때 노마의 눈에 뭔가 띄었다. 노마가 어제도 본 것이었다. 정확히는 아이사가 보던 것이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확실했다. 분명 저곳에 아이사의 시선이 다른 때보다 오래 머물렀다.
노마는 홀린 듯이 그것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노마가 대뜸 자리를 뜬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엑트라는 맹렬히 고민하고 있었다.
“스탕 부인.”
그녀의 수행 비서가 무척 난감한 얼굴을 하고 다가왔는데도 엑트라는 고민을 멈추지 못했다.
“부인, 여관에서 급한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수행 비서는 물러서지 않고 엑트라의 귓속에 짧게 소식을 전했다.
“뭐라? 가노 님? 언제? 이걸 왜 지금 전하나!”
효과는 굉장했다. 자기만의 세상에 푹 빠진 것처럼 보이던 엑트라가 대경해서 펄쩍 튀었다.
이내 그녀는 황망한 얼굴로 노마가 서 있던 자리를 돌아봤다. 그러나 노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디아시 경?”
“부인, 기사님은 저쪽에 계십니다.”
순간 당황한 엑트라에게 수행 비서가 눈치 좋게 한 방향을 가리켰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디아시 경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언제 저기까지 갔는지, 노마는 사람이 붐비는 노점상 거리를 벗어나 돌로 쌓아 올린 엉성한 담장을 마주 보고 있었다.
엑트라의 눈에 노마가 담장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이런, 어쩌면 좋아……. 벌써 도착할 줄은. 설마하니 가노 님이 직접 오시다니, 오작교 노릇을 하려다 되레 내 손으로 다리를 부순 꼴이 되었구나!’
엑트라는 후회가 막심했다. 아까 축제 거리에 먼저 나가자며 노마를 설득했던 자신을 속으로 저주했다.
“당장 여관으로 돌아가자. 지금 돌아가면 가주님을 뵐 수도 있겠다. 배웅은 됐다고 하셨어도 가신으로서 인사는 드려야지. 당장 경을 모셔 오라.”
“예, 스탕 부인.”
롬닥 상단이 이르게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뻗어진 노마의 손에 새까맣고 조그마한 생명체가 안긴 것은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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