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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드 엔딩 후에-25화 (25/139)

25.

“이 미친놈이, 자네가 왜 여기 있어! 배는 어쨌어! 이 미친놈이!”

경악에 차 두 번이나 미친놈이라고 외쳤다.

말도 안 돼. 이 인간은 여기 있으면 안 됐다. 내게 속아 종신 계약을 맺은 놈. 내가 죽으면 제국에서 제일 득 보는 놈. 버릇없는 해적 놈!

내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호통을 치거나 말거나 가노는 멈추지 않고 다가왔다.

“이익……!”

나는 가노의 멱살을 잡고 흔들 요량으로 지지 않고 달려들었다.

“이 또라이 새끼를 그―.”

이를 악물고 손을 뻗는 순간, 가노가 양팔을 벌리고 내게 달려들었다.

“……컥.”

그대로 가노에게 덥석 안겨 든 꼴이었다. 우락부락한 팔뚝과 가슴, 복근 등이 내 빈약한 몸을 압살하는 바람에 절로 숨넘어가는 소리가 나왔다.

‘망할 근육 덩어리가……!’

“가노 님! 아무리 가노 님이라도―.”

기사들과 사용인들이 한발 늦게 가노를 쫓아 뛰어 들어오다, 문을 넘지 못하고 일제히 멈춰 섰다.

“헉.”

“어머!”

그들은 헛숨을 들이켜고 부둥켜안은 두 남녀를 황망하게 바라봤다. 그들의 머릿속에 수천 권의 로맨스가 촤르륵 지나가며 오해가 시작되려는 순간.

퍽―.

나는 가차 없이 가노의 중심을 무릎으로 걷어 올렸다.

“아…….”

둔탁한 소리가 가볍게 흐르고 모두가 숨을 죽인 끝에 단말마의 탄식을 흘린 가노가 비틀거리며 내게서 한 발 떨어졌다. 거대한 떡대를 가진 남자라도 급소는 급소였다.

“이런 경우 없는 새끼. 드디어 뇌까지 근육이 됐나?”

거대한 가노의 몸뚱이가 비켜서면서 야차 같은 얼굴을 한 내가 솟아났다. 문 앞에 삼삼오오 모여 넋을 놓고 있던 이들이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슬그머니 흩어졌다.

“가노, 너 이 새끼! 자네가 여기 왜 있어? 이 미친놈아, 넥타로 가는 배는 어쨌어!”

나는 그의 가슴팍에 주먹을 갈기며 물었다. 그러나 마치 돌덩이에 주먹을 친 것처럼 내 주먹만 아팠다.

“아이사…….”

가노는 저 혼자 상봉의 기쁨에 벅차오르기라도 했는지 아련하게 남의 이름을 불러 젖혔다. 그러면서 다시 날 껴안으려고 하는 듯이 양팔을 벌리는 게 아닌가.

그가 나보다 다섯 살은 훌쩍 넘는 연상인 것은 맞지만, 나는 그의 주인 되는 자였다. 감히 내 이름을 부르는 건 가노에게 허락되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민첩하게 한 걸음 물러서며 가차 없이 그의 주둥이를 손바닥으로 짝짝 후려쳤다.

찰싹! 찰싹!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입! 입! 누가 주인 이름을 막 부르나? 정신 안 차려? 잊지 말랬지. 자네가 사업 파트너는 맞지만 계약서상 나는 엄연히 자네 주인이야.”

“……내 입을 막 때리는 걸 보니 맥포이 가주, 당신이 확실하군.”

가노가 내게 맞은 입술을 아련하게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언제나 여유 넘치는 놈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구는 꼴에 나는 눈살을 더욱 찌푸렸다.

“왜. 내가 기어코 살아서 아쉽나?”

그래서 나는 가노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부러 더 못되게 물었다.

내 심술에 가노는 아프다는 듯이 눈썹을 찡그리곤 웃었다. 그 얼굴은 어딘가 안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기분이 꽤 이상했다.

“흥, 내가 살아서 자네에게 좋을 게 별로 없을 텐데.”

나는 팔짱을 끼고 가노의 낯 뜨거운 시선을 피하며 퉁명하게 말했다.

“……가주. 당신과 내 만남은 비록 사기와 불신으로 얼룩져 있지만, 우리가 종이로 몇 년을 묶인 사이인데. 어떻게 그렇게 말하지? 내가 죽으면 당신도 슬프지 않겠어?”

종이로 몇 년. 누가 들으면 아주, 결혼 서약서를 말하는 줄 알 법한 대사였다.

나는 가문을 살리기 위해 해적과 손을 잡았다. 가노가 가진 바닷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가노는 10년 전, 열다섯 애였던 나에게 속아 종신 계약서에 서명했다. 한낱 종이 쪼가리의 위력은 대단했는데, 그게 메헤라 앞에서 맹세한 ‘깰 수 없는 맹약’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계약의 경우, 맹약을 깨는 사람은 죽는다. 메헤라 신이 보증하는 약속. 이거야말로 상호 합의에 의한 저주 같은 거였다.

가노는 철저하게 내게 유리하게 쓰인 종신 계약서대로, 죽는 날까지 날 위해 일해야 했다. 그는 이 일에 매우 분노했고, 지금도 암암리에 ‘깰 수 없는 맹약’을 깨는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면서 왜 날 저딴 눈으로 보는지. 하나만 하라고.’

나는 커다란 손이 남몰래 잘잘 떨리는 것을 흘긋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가노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는 뻔했으나 해 주지 않았다.

가노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가 저런 눈을 하고 나를 본 지도 꽤 되었고, 나는 장사하는 사람이므로 이런 쪽으로도 눈치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저 마음에 답을 줄 생각도 여유도 상황도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그를 대놓고 아랫사람 취급하고, 완전히 신뢰하지도 않지만 가노는 이젠 내게 ……삼촌 같은 사람 정도는 되었다.

그는 이렇다 할 정서적 교류나 접점이 없었던 죽은 친오빠, 아이노보다 차라리 가까운 존재였다. 함께한 세월이란 그런 힘이 있었다.

가노는 맥포이 가주가 10년간 가꿔 온 세상에서 삼촌 내지는 오빠 정도의 역할인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가 그 위치에 있길 바랐다.

“…….”

나는 애타는 눈으로 날 보는 가노의 눈을 마주 보다 홱, 몸을 옆으로 돌려 버렸다.

“자네는, 죽기 전까지 귀족 예법은 배울 생각이 없나 보군. 응접실에서 대기하라. 곧 내려가지.”

그러면서 나는 바깥의 사용인에게 턱짓했다. 가노가 그답지 않게 갈급하게 구는 것을 일부러 차갑게 쳐 냈다. 정신 차려라, 이 뜻이었다.

가노는 옆으로 몸을 튼 나를 붙잡을 듯이 손을 뻗었지만 정말 잡지는 못했다. 슬금슬금 들어온 사용인이 가노를 데리고 나갔다. 그는 방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는 굳이 그 강렬한 눈빛을 피하진 않았다. 그저 여느 때처럼 무감한 얼굴로 받아 냈다.

내가 눈치가 좋듯이, 기구하기로 나만큼 험난한 인생을 살아온 가노 역시 눈치가 빨랐다. 가노는 내가 제 마음을 눈치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그 마음을 받아 줄 생각도, 여유도, 상황도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의 진면목은 비상한 신체, 재력, 무력 따위가 아니라 제 분수와 자리를 잘 지키는 것에 있었다. 가노는 선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나는 완전히 몸을 돌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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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많이 상했어, 가주.”

여관에 마련된 응접실에서 의외로 얌전하게 날 기다린 가노는 아까보다 한결 제정신인 듯했다.

“그럼 죽을 뻔했는데 좋겠나?”

심드렁한 내 말에 가노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성격 나쁘다고 중얼댔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내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보다 기사단은. 에리카와 도그만 경은 어딨지? 왜 자네 혼자야?”

“에리카 대신 내가 왔고, 나는 어떤 기사보다 빠르지. 도그만 경이라면 지금쯤 카탐에서 하루 정도 걸리는 마을에 도착했을 거야. 이름이 뭐더라.”

그래, 알 만했다. 가노가 대열을 유지하며 달리는 기사단을 앞서 온 것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그는 기사 작위는 없어도 여러모로 잘난 놈이었다. 비상한 신체 능력과 무력을 가진 그는 황실 기사단장을 데리고 와도 쉽게 때려눕힐 것이다.

그러나 문득 이곳의 주인공들과 노마 디아시가 생각났다.

“글쎄, 그건 모를 일이지.”

내 도발에 가노의 두꺼운 눈썹산이 꿈틀거렸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호승심으로 번들거렸지만 어울려 줄 시간이 없었기에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본성은. 아니, 아치는. 시모어 부인과 잘 있나?”

항변할 기회를 놓친 가노는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리곤 느리게 입을 열었다.

“……에리카가 실패하는 것 봤나. 안전 가옥에 잘 모셔 두었지. 영문 모르고 시골에 처박혔으니 열심히 땡깡 좀 부리고 있지 않겠어? 우리 도련님 성질이 점점 가주, 당신을 닮아 가고 있잖아. 시모어 부인만 죽어나 가고 있겠지.”

“뭐가 어째?”

입만 벌렸다 하면 무례하기 짝이 없어 눈썹을 치켜떴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나의 주인.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거짓을 고하지 못하지. 당신이 가장 잘 알다시피.”

“…….”

가노가 계약서를 물고 늘어졌다. 유쾌한 척하는 낯짝으로 은근히 비꼬며 사람을 긁는 것이 이제야 좀 평소의 가노 같았다.

“그보다, 나의 가주께서는 어디까지 알고 있지? 디아시와 대신전의 움직임은 아나?”

빙글 웃던 가노가 다시 진지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아까 오전에. 정찰 보냈던 기사들이 디아시 기사들과 만났더군.”

“그래. 그럼 맥포이 가주는 이만 영지로 돌아가라는 전언도 들었겠군.”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할 것 없어. 정보원에 의하면 함정이나 뒤가 구린 뭔가는 아니야. 그리고 그거 아니더라도 당신은 어서 영지로 돌아가야 해.”

“왜, 나 죽었다고 내 팔촌 오라비가 움직이기라도 했나 봐?”

내가 사악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여럿이 마녀 같다고 한 바로 그 웃음이었다.

“확실히 다친 데는 없나 봐. 여전하군.”

가노가 화답하듯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가노는 인상이 강렬해서 그런지 환하게 웃으면 사납게 보였다. 섬세한 꽃처럼 따사롭게 웃는 누구와 다르게 말이다.

‘얼씨구.’

나는 상념을 떨치려는 듯이 고개를 휘저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할 게 많겠어. 서둘러야지, 그래.”

나는 검지로 찻잔을 톡, 톡 치며 중얼거렸다.

“지금 당장 모시지. 도그만 경과 길에서 합류하면 돼.”

가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하루 정도는 가노의 호위로도 충분했다. 그는 부대 하나의 위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일단 공식적으로 나의 생존을 알려야겠지.”

고개를 작게 끄덕인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그 새끼부터 조지고 돌아간다.”

그러곤 비뚜름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그 새끼는 친애하는 팔촌 오빠 놈이 되겠다. 쥐새끼 같은 팔촌 오라비 게일을 생각하니 뒷골이 당기는 동시에 의욕이 활활 타올랐다.

‘딱 기다려라. 네놈이 분수도 모르고 움직이는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하필이면 상대하기 까다로운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얼마나 거슬렸는지 모른다. 나는 결코 선인은 아니었기 때문에 입맛을 다셨다.

“바로 황성으로 가서 황제 폐하를 알현한다. 합법적으로 조질 명분이 필요해.”

“그래, 그게 가장 빠르지. 닉스 쪽은 어떻게 할 건지 정했나?”

내 경우 필요에 의해 정적을 제거한다면, 가노는 정적 제거가 취미였다. 그가 한껏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대신전과 성력으로 유명한 디아시가 합심한다면 어떻게든 닉스의 봉인을 유지할 순 있을 것이다. 나는 오필리아의 성력을 반의반도 못 다루며, 최대한 이 사실을 숨길 생각이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차라리 누군가 ‘맥포이 가주를 죽이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 밖에 꺼내는 걸 막는 데 힘쓸 때였다.

“성지엔 사람을 보내. 공식적인 방법, 비공식적인 방법 둘 다. 은밀하게 움직여서 가장 깊숙한 정보를 빼낼 수 있고 동시에 정보를 흘릴 수 있는 자로.”

“알았어. 더 필요한 건?”

“없어. 아―.”

“있나?”

“내 의뢰, 한 건 빼지. 의뢰비 도로 뱉어 내.”

“의뢰? 무슨 의뢰?”

가노의 서글서글한 낯이 조금 찌푸려졌다. 그는 일적으로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에 은근히 이런 부분에 예민했다.

“그 애.”

“그 애?”

“내가 찾았어. 그러니까 선금 뱉어.”

가노는 잠시 침묵하다 곧 ‘그 애’가 누군지 깨닫곤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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