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무슨 일이지? 왜 벌써 돌아왔나?”
나는 여관 중정으로 이어지는 문을 박차는 동시에 물었다. 그만큼 다급했다.
그러자 기사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다가와 빠르게 내게 고했다.
“가주께서 말씀하신 곳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디아시 제1기사단과 마주쳤습니다. 그들은 닉스의 잔당을 소탕하고 주변을 정찰하던 중이었습니다.”
머리가 띵했다. 아찔한 현기증에 나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짚었다.
‘디아시가 여기서 왜 나와?’
제1기사단이라면 보통 가주를 호위할 것이다.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니콜라스 디아시가 어떻게 거길 벌써.’
“디아시 가주가 이미 3일 전에 그곳에 도착해 닉스의 몸을 성지로 옮기기 위해 떠났답니다.”
내가 탄타로스를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 도착했다는 말이었다.
이어 기사는 디아시 가주가 탄타로스를 떠나면서 대신전에 바로 연통을 넣었으니, 대신관 또한 성력이 강한 신관들을 꾸려 이미 성지로 향하고 있을 것이라 덧붙였다.
실로 놀라운 속도였다. 닉스를 성지로 옮겨 시간을 벌려던 내 계획이 배는 앞당겨진 것이다.
그러나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내게 득인지 실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필리아.”
나는 탄식처럼 그 애 이름을 중얼거렸다.
“예?”
성력도 없는 주제에, 힌트도 없이 곧장 탄타로스를 찾았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원래는, <오필리아와 밤>에선 이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필리아는 <오필리아와 밤>을 아는가?
“……젠장할.”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만 그 망할 소설 내용이 떠오른 게 아니라면 말이 된다.
애초에 이게 다 신인지 뭔지의 농간이라면, 그래. 메헤라가 날 언제 예뻐했다고 내게만 그 이야기를 알려 줬을까. 왜 이 경우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지? 속 편하게 나만 알고 있다고 가정했다니.
‘신이 가장 사랑하는 인간인 오필리아가 있는데.’
닉스의 몸뚱이를 성지로 옮겨 그 봉인을 강화하자는 생각도 필시 오필리아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그 앤 그런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니.
오필리아, 그리고 니콜라스까지 그 망할 소설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또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쩌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더욱 아찔했다. 순간적으로 고질병인 편두통이 일어 어금니를 꽉 깨물어야 했다.
“……가주님. 자세한 경위는 디아시 가주가 서신을 남겼습니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기사가 조심스럽게 품속에서 잘 접힌 종이 뭉치를 꺼냈다. 나는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그 뭉치를 바라보다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차라리 오필리아만 알고 있다면 나았다. 이 세상에 오직 나랑 걔만 <오필리아와 밤>을 알고 있다면 적어도 내게 불리하진 않을 것이다.
오필리아는 내게 부채감을 느낀다. 오필리아라면 날 희생해 닉스를 죽이는 방법은 거부할 것이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오필리아와 밤>을 알고, 내가 죽어야 닉스를 완전히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경우였다.
닉스는 제국, 온 대륙을 멸망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위험한 범죄자다. 개인적 원한과 별개로 제거해야 하는 인물이 확실하다. 그리고 내 죽음이 닉스를 죽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라면.
나라면 아이사 맥포이를 죽여 오필리아에게 성력을 되돌리는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그게 가장 확실하며 효율적이니까.
쿵쿵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불안, 초조 따위로 머리가 깨질 것 같았지만 오히려 행동은 더없이 침착했다.
나는 밀봉된 종이 뭉치를 빠르게 열어 펼쳤다. 여느 때와 같이 디아시 가주의 서신은 짧았다.
“…….”
나는 곧 새로운 혼란에 빠졌다.
맥포이 가주는 영지로 돌아가라. 이후 일은 대신전과 디아시 가문이 책임지겠다.
책임? 정확히 어떤 책임을 말하는 걸까? 오필리아와 니콜라스 디아시의 꿍꿍이가 뭐지?
나는 입 안을 잘근잘근 짓씹으며 머리를 팽팽 굴렸다.
‘니콜라스는 모르나?’
대뜸 이대로 이 일에서 빠지라니, 어딘가 뒤가 구렸다. 굳이 빠지라고 하니까 몹시 찝찝했다. 나는 침착하게 짧은 글을 끝까지 읽어 내렸다.
추신. 맥포이 가주는 노마 디아시의 행방에 대해 아는가.
반사적으로 종이를 잡은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내가 부러 그를 감춘 것도 아닌데, 가슴께를 무언가가 쿡쿡 찌르는 기분이 들었다.
탁―.
때마침 나를 뒤따라온 듯한 노마가 중정에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일그러진 미간을 펼 생각도 못 한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급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오는 노마가 보였다. 아침 햇살에 닿은 그의 머리칼이 그가 걸을 때마다 물결 위를 흐르는 빛무리처럼 반짝였다. 혼자 별 가루를 뿌린 것처럼 요정 같은 등장도 이젠 별로 당황스럽진 않았다.
“가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노마가 잔뜩 구겨진 내 얼굴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아까보다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적당한 대답을 찾아내려 했다. 과부하가 온 나머지 그가 다가오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만 느껴졌다.
마침내 세 발자국 앞에 선 노마가 내 이곳저곳을 살폈다. 금안의 움직임에 따라 기다랗고 풍성한 속눈썹이 나풀거렸다.
새삼 모든 게 참,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 망할 소설도, 내가 살아남은 것도, 노마 디아시가 깨어나 내 눈앞에 서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보는 것도.
“…….”
차라리 다 꿈이었으면.
나는 할 말을 찾다 헛숨을 들이켰다. 노마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내 말을 기다렸다.
“동생 만날 생각은, 아직도 없습니까?”
목소리를 가다듬고 겨우 뱉어 낸 말은 고작 이런 것이었다. 노마의 금안이 내 손에 구겨진 서신에 머물렀다.
“당신 동생이, 디아시 가주가. 당신 행방을 묻는군요.”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 * *
harbaragi_syk
스탕 부인 엑트라는 노마를 잠시 중정 한편에 자리한 정자로 안내했다.
“정찰대가 가져온 소식 때문에 가주께서 갑자기 바빠지셨네요. 긴히 생각할 것이 많으실 테니 부디 이해해 주세요, 디아시 경.”
그러곤 퍽 미안한 얼굴을 하고 노마에게 말했다. 그녀는 다과를 노마 쪽으로 조금 밀며 성의를 보이기 위해 애썼다. 다행히 며칠간 본 노마는 의외로 단것을 즐겼다.
“이 늙은이와 축제를 돌아다녀 봤자 별로 재미가 없으실 테지만, 가주께서 디아시 경을 부탁하셨습니다. 약속을 하셨다고요. 내일이나 모레엔 카탐을 떠나실 예정이시니 오늘이 아니면 더 시간도 없지 않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다만 맥포이 가주님이 걱정입니다.”
“가주께서 당장은 못 나가지만 불꽃놀이 전에 꼭! 꼭, 나오시겠다고 하셨으니까요.”
“아닙니다, 저는 정말 괜찮으니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저는 정찰대 소식이 마냥 좋은 것이라 여겼는데 저희 가주님 생각엔 그렇지 않나 봅니다.”
엑트라의 시선이 여관 맨 위층, 아이사가 머무는 방 창문에 잠시 머물렀다.
“왜 우리 가주님은 항상 이렇게 사건 사고가 많은지……. 아이고! 이 늙은이가 괜한 말을 중얼거렸군요, 죄송합니다. 제 말은, 경께서도 너무 걱정 마세요. 저희 가주님 강인함은 온 제국이 알아주니까요.”
“예. 잘 압니다.”
노마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기도 모르게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 이럴 때가 아니긴 하지만.’
엑트라는 그 모습을 보고 반색하여 생각했다.
‘두 분이 쌍방 호감이 있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이번에야말로 모퍽 그 쭉정이 놈을 쫓아낼 수 있지 않을까?!’
“디아시 경!”
엑트라가 뜨거운 콧김을 뿜으며 노마를 불렀다.
“네, 부인. 말씀하세요.”
노마가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그의 아름다운 미소를 마주한 순간, 엑트라의 망상은 그녀 머릿속에서 현실이 되었다. 노마는 얼굴, 성품, 가문, 무예. 어디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다.
‘우리 가주께서 그간 운이 나빴던 이유가 다 이 사람을 만나려고 그랬던 것이 아닐까? 이 사람이 바로 미래의 맥포이 가주 부군이다!’
엑트라는 당장 친분 있는 다른 가신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다. 아이사가 들었으면 나이고 뭐고 바로 등짝을 쳤을 주접이었다.
가주인 아이사를 닮아 추진력 하나는 끝내주는 엑트라는 더 고민하지 않았다.
“디아시 경. 역시 저희 상단과 함께 먼저 축제 거리로 가시죠! 이르면 내일이나 모레 저희와 헤어지시니, 가주께 선물이라도 준비하시면 어떻습니까? 귀족의 방식으로다, 그리고 기분도 풀어 드릴 겸 말입니다!”
엑트라가 노마의 손을 덥석 잡고 꽤나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가주님를 모신 지 10년, 이 스탕이 가주님 취향은 죄 꾀고 있습니다!”
“…….”
장사꾼 생활 20여 년이 무색하게 노마는 항시 미소를 띠고 있어 은근히 속을 알기 어려웠다. 노마의 짧은 침묵에 엑트라는 남몰래 침을 꼴깍 삼켰다.
“제가 서툴러 미처 그 생각을 못 했군요. 좋은 생각입니다. 모든 배려에 감사합니다, 부인.”
“역시!”
노마가 눈을 반달로 곱게 접으며 말하자 엑트라가 환호했다. 그는 엑트라가 소리를 질러 대서 조금 놀랐지만 의욕 넘치는 그녀를 응원하듯이 방긋 웃어 주었다.
* * *
harbaragi_syk
나는 몇 시간째 침대에 시체처럼 엎드려 있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안 죽고 좀 살아 보겠다는데 그게 이리도 어려울 일인가?
‘일단 암살 대비를 강화하자. 당장 도그만 경과 합류해야겠어.’
“……이런 뭐 같은. 뭐 하나 깔끔하게 해결되는 일이 없군.”
나는 분에 못 이겨 팡! 침대 한쪽을 때렸다.
“오필리아…….”
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오필리아와 밤>에서 걔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더라. 내 죽음에 정확히 걔가 어떻게 반응했지?
그 이야기 속의 오필리아는 내 죽음에 분노했다. 슬퍼했다. 분명 절망하기도 했다.
“……오필리아가 날 죽일 리 없으면 뭐 해. 또 누가 나를 노릴지 모르는데.”
창을 타고 한풀 더위가 꺾인 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아직 땋아 올리지 못해 기다랗게 풀어진 검은 머리가 바람에 흐트러졌다. 나는 거추장스러운 머리칼을 피해 고개를 틀었다.
‘내가 이래서 머리를 바짝 땋고 다니는 건데.’
“…….”
바뀐 시야로 이번엔 창틀 한쪽에 놓여진 테렛사 세 송이가 보였다. 노마가 저 시들거리는 테렛사를 준 일이 바로 어제였다.
“곧 죽을 줄 알았더니 악착같구만.”
파들파들한 테렛사는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수준이었다. 이제 보니 저 테렛사나 지금 내 꼴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엿같은 선물을 줬군, 노마.”
나는 인상을 쓰고 중얼거렸다. 지금쯤 노마는 나 대신 엑트라를 따라 나섰을 것이다.
‘내일’ 운운하며 약속했던 일이 바로 몇 시간 전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 상태론 불꽃놀이는커녕 오늘 여관 밖에 나가지도 못할 것 같았다.
‘한 입으로 두말하게 생겼네.’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더 둥글게 말 때였다. 갑자기 창밖이 소란스러웠다. 이상하게 소란함은 잦아들지 않고 점점 커졌다.
“……뭐야?”
나는 긴장감을 느끼며 천천히 상체를 들어 올렸다.
‘뭐지? 노마와 엑트라가 벌써 돌아왔나?’
쿵. 쿵. 쿵.
군화를 신은 사람이나 내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기사들은 뭘 하고 있는 거지?’
크게 당황한 나는 허겁지겁 침대에서 기어 내렸다. 내가 막 침대를 벗어나려 할 때, 쾅! 하고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
나는 악 소리도 못 내고 온몸을 굳힌 채 문을 박차고 등장한 인물을 보았다.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들어온 사람이 그대로 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내 미간도 한 칸씩 모였다.
“……야. 당신이 여기 왜 있나?”
침대 끄트머리에 애매하게 걸쳐진 상태로, 나는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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