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그만 좀 쳐다보라.”
“흐흐흥.”
엑트라가 음흉하게 웃었다.
“스탕 부인. 자네 때문에 밥이 안 넘어간다.”
나는 결국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역정을 냈다.
“어제 마차에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알코옹, 달코옹 나누셨는지, 이 늙은이가 궁금해서 지난밤을 꼴딱 새웠지 뭡니까. 마차가 도착한 지가 어언―.”
“그 입 다물고 식사 방해할 거면 나가게.”
더 들을 것도 없었으니 축객령을 내렸다.
식사 자리까지 쫓아와 미친 소리를 하다니 엑트라는 진작 잘리지 않은 게 용했다. 나는 그녀의 실적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되짚었다.
‘역시 자르진 말아야지.’
엑트라는 주책바가지이지만 우수했다. 그러니 황도와 카탐을 잇는 요직에 있는 것이지.
“에이, 가주님. 제 말 좀 들어 보십쇼. 가주님 뜻대로! 하시면 됩니다. 이 엑트라 스탕은 무조건 가주님 편입니다.”
방금 잘릴 위기였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엑트라가 짐짓 비장한 얼굴을 하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얼씨구.
“자네 주인 뜻이 뭔데.”
나는 엑트라가 어디까지 하나 보려는 심산으로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느슨하게 기대며 물었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이 스탕은, 다― 압니다. 가주께서도 잘생기고 젊은, 심지어 고귀한 신분인 디아시 경을 맥포이 가주 부군으로 모시고 싶지 않습니까?”
스탕 부인에게는 노마의 신분에 대해 대충 언질을 해 놓았다. 그 뒤, 사용인들의 무례한 껄떡거림은 어느 정도 줄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노마가 젊은가? 그는 따지자면 나보다 아홉 살 연상이었다. 물론 내내 시간이 멈춰 있었으니 신체 자체는 나보다 어리긴 할 것이다.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보게 스탕. 자네들은 아직도 그 버릇을 못 고쳤군. 다리 사이에 뭐 달린 놈만 보면 왜 그렇게 나랑 못 붙여서 난리야. 제발 모여서 낭만 소설 좀 그만 보게. 늙은이들이 항상 시간이 남아도나 보군. 친히 일거리를 늘려 줄까?”
나는 와인을 한 모금 홀짝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야 모퍽 그놈, 아니 모퍽 소가주는 가주님에게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엑트라가 힘주어 말했다. 그 목소리는 어쩐지 억울하기까지 했다.
“왜 안 어울려. 얼굴은 수수깡보다 못하지만 팔다리 멀쩡히 붙어 있고 키도 크잖아. 게다가 조금 멍청하지만 ‘모퍽’의 소가준데. 이보다 완벽할 수 있나?”
엑트라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힘 빠지게 만드는 모퍽의 낯짝이라도 떠올랐나 보다.
“모퍽 소가주의 가장 큰 장점은 멍청함과 담이 작은 것이지. 왜? 난 내 약혼자가 아주 마음에 드는데.”
나는 씨익,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난 말했네. 후계자는 아치 하나. 내 부군은 철저하게 아치에게 유리한 사람으로 정한다. 그러니 사지 멀쩡하고 가문의 명성이 높은 대신 멍청하고 배포가 개미 오줌보다 못해야 하네. 모퍽 소가주만 한 적임자가 있나? 내가 그놈을 어떻게 골라냈는데.”
내 단호한 태도에 엑트라가 울상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흥, 콧방귀를 뀌며 다시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올려 고기를 썰었다.
“자네들이 누굴 들이대도 나, 파혼 안 해. 꼬우면 암살이라도 해 보던가. 더 못난 놈으로 대령하지.”
그러곤 뚝뚝 육즙이 떨어지는 고기를 와작 씹었다. 픽, 하고 입 안에서 육즙이 터졌다. 첫 끼니로 먹는 고기의 맛은 최고였다.
“모퍽보다 더 못난 놈은 안 됩니다! 모퍽을 저희가 어떻게 참고 있는데!”
엑트라가 왁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인자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필립 모퍽이 그렇게 싫나. 성혼을 해도 내가 하는 건데 왜들 저러나 모르겠다.
“하하, 그러니 내 ‘소중한 약혼자’, 필립을 건드릴 생각하지 말게.”
나는 엑트라를 놀리는 재미에 푹 빠져서, 나이프를 불량하게 빙빙 돌리며 말했다.
말 그대로였다. 나에게 필립 모퍽은 나름 귀한 약혼자였다. 아치를 생각하면 필립 모퍽처럼 좋은 조건은 없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문고리를 놓쳐 끼이익 듣기 싫은 소리를 낸 것이.
나와 엑트라의 시선이 동시에 문 쪽을 향했다. 문은 감질나게 양쪽으로 서서히 벌어졌다.
“디아시 경!”
문이 열리고, 그곳엔 노마가 서 있었다. 엑트라가 반색해 그의 이름을 외쳤다.
“디아시 경? 거기 서서 뭐 합니까?”
“……가주님. 좋은 오전입니다.”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등장한 노마가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엑트라가 그런 노마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스탕이 불렀군.’
나는 엑트라를 가자미눈으로 흘겨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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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는 아주 우아한 동작으로 식사를 했다. 음식 씹는 소리는 물론 접시에 식기 닿는 소리조차 한 번 들리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매우 신비롭고 경건해, 나도 모르게 ‘저 인간은 똥은 싸나?’ 하는 궁금증이 일었지만 묻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엑트라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림의 떡 보듯이 식사를 하는 노마만 구경했다. 미련이 뚝뚝 흐르는 눈빛에 내가 다 부담스러웠다.
노마는 엑트라의 질척이는 눈빛에 간간이 상큼하게 눈인사를 해 주었다.
“일하러 안 가나?”
“가주께서 아직 식사 중이신데 제가 어떻게 자리를 뜹니까. 천천히 드십쇼. 저도 간만에 디저트까지 먹으렵니다.”
나는 흥, 하고 콧방귀를 끼었다. 그도 그럴 게 엑트라는 언제나 바쁘다, 바빠 하며 식사를 대충 넘기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기어코 디저트까지 먹겠다고? 너무 투명했다.
그렇게 다시 조용히 식사를 하려던 차였다.
“가주께선 약혼자가 있으셨군요.”
갑자기 노마가 뜬금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문 앞에서 내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노마의 말에 엑트라가 챙, 나이프를 떨어뜨렸다. 나는 교양 없이 구는 엑트라를 째려봤다.
“제 나이가 방년 스물다섯인데, 그럼. 설마 약혼자 하나 없겠습니까?”
나는 입가를 닦은 뒤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당연하기도 했고.
조마조마한 얼굴로 날 보던 엑트라가 내 대답에 나라 잃은 사람처럼 허망한 얼굴을 했다. 그런 엑트라가 너무 웃겼던 나머지 그녀를 구경하다 노마의 얼굴이 일순 굳은 것을 보지 못했다.
순전히 엑트라를 골려 줄 생각으로 나는 신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껏 미혼인 게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남들은 성년 지나고 스물이 되자마자 하는 게 성혼인데. 저는 늦은 편이죠. 이 난리만 아니었다면 올겨울이나 내년 봄에 성혼식을 했을지도 모르지.”
깔깔. 나는 엑트라를 보면서 이야기했다.
엑트라가 그거 아니라는 듯이 절박하게 도리질을 치다 끝내 이마를 싸맸다. 그녀는 매우 답답해 보였고, 나는 매우 즐거웠다.
“약혼한 지 어언 5년 정도 됐으니 나도 곧 성혼해야지. 디아시 경도 약혼은 하지 않았습―.”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지껄이다가 뚝, 하던 말을 멈췄다.
‘망할. 실수했다.’
나는 다급하게 시선을 돌려 노마의 표정을 확인했다. 노마와 눈이 마주쳤다. 노마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젠장, 아무리 요새 나사가 빠졌기로서니 나도 정말 정신이 나갔군.’
노마에겐 약혼녀가 있었다. 그가 잠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절명한 제국의 황태녀. 제1황녀 칼리페시. 그녀가 노마의 약혼녀였다. 노마는 약혼 스케일도 남다른 남자였다.
죽은 황태녀 칼리페시는 귀족 사이에서 유명했다. 또라이로. 나 역시 어린 시절 비범한 그녀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다.
물론 평범한 제국민들 사이에선 ‘성군이 될 똑똑한 우리의 황태녀 님!’쯤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귀족 사회에서 그녀는 성품이 잔혹하며 욕심이 많은 것으로 유명했다. 동시에 그녀의 머리가 비상하다는 것엔 아무도 이견이 없었다.
황제를 쏙 빼닮아 그 총애를 독차지했던 명실상부한 권력자, 그게 바로 칼리페시였다.
황태녀라는 지위가 주어진 후에 그녀는 최고의 안하무인으로 등극했다. 노마와의 약혼도 그 직후였다.
황제는 칼리페시의 빛나는 명석함 하나만 믿고 그녀의 거지 같은 성품을 눈감아 주었다. 황제의 확고한 지지 덕에 그녀는 살아만 있었다면 무난하게 다음 대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가 행방불명된 약혼자를 그리워하다 절명하지만 않았어도.
약혼자에 대한 사랑이 너무 깊어 결국 병을 얻은 황녀의 안타까운 사연은 제국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다. 황녀와 성기사의 비극적인 로맨스로도 유명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황실’에서 발표한 내용이었다. 실상은 아주 딴판이었다.
황태녀 칼리페시는 역저주로 광증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년도 맞이하지 못한 어린 나이였다.
저주가 특히나 위험한 이유는 시전한 자에게 그 저주가 똑같이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대부분 ‘알포의 저주법’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모르니, 영특하다는 황태녀도 그것까지는 몰랐을 것이다.
그녀가 저주를 부린 대상은 놀랍게도 노마의 절친한 친구이자 황실 기사단 소속의 기사였다. 누군가 황태녀를 꼬여 내 광증에 걸리는 저주를 부리게 해, 종래엔 그녀까지 광증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무려 황태녀가 이단을 행하다 죽은 사건이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제국 내에서 손에 꼽았다. 황제는 이 사실을 완전히 묻어 버렸기 때문이다.
내 경우엔 닉스가 정말 죽었는지, 죽지 않았다면 어디에 있는지 추적하다 뜻밖에 황실의 비밀에 손을 댄 경우였다.
닉스가 아직 대신전에 속해 있었을 때, 칼리페시의 주말 기도를 돕던 고위 신관이었다는 것.
신기하게도 황태녀가 신관 하나와 친밀하게 지냈고, 그게 닉스라는 것.
황태녀에게 저주를 알려 준 사람도, 황태녀의 저주로 광증에 걸린 노마의 친구에게 접근한 것도 전부 닉스였다.
왜 황태녀가 노마의 친구에게 저주를 부리게 된 건지 내막은 알 수 없었다. <오필리아와 밤>에도 황태녀가 저주를 부린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분명한 건, 칼리페시의 저주는 결국 노마를 노린 짓이라는 것이다.
나는 카탐으로 오는 길에 틈틈이 노마에게 닉스에 대해 알려 주었다. 황실, 당신네 디아시, 그리고 내가 닉스를 쫓던 이유를 간략하게 이야기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노마의 약혼녀, 칼리페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친구가 갑자기 미쳐 버린 것이 자신의 약혼녀의 짓이고, 그 약혼녀 역시 고인이 된 지 십수 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노마의 반응은 정말 담백했다.
“황태녀 님께서 그날 일에 관여했을 것이라 짐작은 했습니다.”
이게 전부였다. 그래서 나는 대충 그들만의 처절한 치정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넘겼던 적이 있다.
정확히 칼리페시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녀가 노마와 그 친구 사이에 일어난 비극의 시작이자 사건의 원흉이라는 점만큼은 확실했다.
‘이딴 실수를 하다니.’
“미안합니다, 디아시 경. 제가 무신경했습니다.”
나는 식기를 내려놓고 빠르게 사과했다.
“사과하실 것 없습니다. 칼리페시 님은 제 약혼녀가 맞지만 얼굴도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사이였으니까요. 남과 다름이 없는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노마는 무슨 말을 더 하려는 듯이 입술을 달싹이다 말았다.
“무리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 실수가 맞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세요.”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다시 한번 사과했고, 노마는 정말 괜찮다는 듯이 빙긋 웃고 말았다. 엑트라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나와 노마의 눈치를 보았다.
그때였다.
“스탕 부인! 아니, 가, 가주님! 급한 소식입니다!”
엑트라의 사용인 하나가 펄쩍 뛰며 식사 자리에 난입했다.
“헉, 헉. 정찰을 갔던 기사들이 돌아왔습니다!”
이르면 내일 아침에나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정찰대가 하루 일찍 돌아왔다.
“전부요!”
그것도 전부.
……계획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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