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데드 엔딩 후에-22화 (22/139)

22.

다그닥, 덜커덩.

질 나쁜 마차는 승차감이 아주 뭐 같았다.

‘내 마차가 그립군.’

여느 귀족들이 흰 칠, 금칠만 해 댄 마차와 다르게 검은 칠에 금, 보라색 장식이 붙은 맥포이 가주의 마차는 꽤나 멋졌다. 승차감은 말할 것도 없고.

다시 다그닥, 다그닥, 덜컹덜컹, 덜컹.

“…….”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반대편에 앉은 노마를 봤다. 내 부주의로 넘어질 뻔한 소년을 그가 잡아 준 것까진 괜찮았다. 다 괜찮았는데.

그 후, 노마의 상태가 영 별로다. 가끔씩 보았던 넋 나간 미친놈 상태는 아니었다. 그는 마차에 오른 뒤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대차게 차인 사람 또는 전 재산을 사기당한 사람처럼 파리했다.

어떤 감정을 누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만 같아서 나는 일단 그를 내버려 두었다. 방금 전 일을 천천히 돌아봤다.

노마는 소년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항시 웃는 낯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 그 표정 변화는 극적이었다.

그 표정은 찰나도 아니었다. 비록 짧은 시간 보았지만 노마는 표정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노마가 완전히 무너진 얼굴을 하고 그 자리에서 굳었다.

이상함을 감지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 그 얼굴을 발견하고 오만 생각을 다 했다.

‘아는 앤가? 설마 숨겨 놓은 아들인가? 숙맥 아니었나? 숙맥인 척한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안 닮았는데. 게다가 디아시 후계자였던 사람이 설마 그 나이에 사고를 쳤을까. 그랬으면 그 가문 어르신들이 뒷목 잡고 쓰러졌겠지.’

오만 가지 생각이 빛보다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갔다. 왜 그러냐는 내 물음에 노마는 벌벌 떨리는 입술로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을, 착각했습니다.”

아는 사람과 닮았다는 건가? 그렇다고 저런 얼굴을 해?

나는 다시 눈앞의 소년을 봤다. 검은 머리칼에 밝은 갈색 눈동자의 소년은 아치보다 한두 살 더 먹어 보였다. 노마가 알 만한 열 두셋 먹은 애가 누구…….

기억을 뒤지던 나는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니콜라스 디아시.’

칠흑처럼 검은 머리, 노마와 같은 금안. 나이 차이 꽤 나는 형제.

“…….”

생각해 보니 노마는 니콜라스 새끼가 딱 저만할 때 잠이 들었다. <오필리아와 밤>에 나오는 니콜라스 디아시의 서사에 의하면 말이다.

굳이 <오필리아와 밤>의 내용을 모르더라도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사실이기도 했다. 디아시의 젊은 가주가 어린 시절 사라진 제 형, 노마 디아시를 백방으로 찾아다닌 이야기는 유명했다.

어쨌건 남자 주인공 니콜라스 디아시의 서사는 어린 날, 친형처럼 믿은 남자가 자신을 인질로 삼아 노마에게 저주를 시전하면서 시작된다.

니콜라스는 눈앞에서 검은 가루로 분해되는 노마를 보고 공황에 빠지고, 그 순간에 각성한다. 니콜라스의 각성으로 노마는 죽음의 저주를 피하지만 그 여파로 잠이 든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각성으로 니콜라스가 졸도한 사이 닉스가 노마의 몸뚱이를 훔쳐 간다.

이때 노마의 친구에게 저주를 알려 주고 그를 자극한 것이 바로 닉스로, 그 범죄는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니콜라스는 노마의 몸을 되찾기 위해 닉스를 찾아 헤매다 실마리를 쫓아 서부로 향한다. 그러다 때마침 학살당한 맥포이 영지에서 기어 나오는 소녀와 운명적으로 마주친다.

그게 여자 주인공 오필리아와 남자 주인공 니콜라스의 첫 만남이자 험난한 모험의 시작이다.

<오필리아와 밤>의 결말부에선 오필리아가 닉스를 물리치고 탄타로스에서 노마를 찾은 후 감동적인 형제 상봉이 이루어지지만, 그 후 노마가 어떻게 되는지는 서술되지 않는다.

그저 ‘아름다운 두 형제가 부둥켜안고 울었다’ 정도가 <오필리아와 밤>에 나오는 노마 디아시라는 인물의 결말이다.

니콜라스 디아시는 굉장히 눈물이 박한 캐릭터인데, 작중에서도 딱 두 번 운다. 오필리아를 잃을 뻔했을 때, 그리고 제 형인 노마 디아시와 재회했을 때.

어쨌건 그 니콜라스 디아시가 십수 년째 절절하게 찾고 있는 그의 형은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나는 다시 시선을 올려 반대편에 앉은 노마를 보았다.

‘……네가 미친놈처럼 찾아다니던 형은, 영 네놈이랑 만나기 싫은 것 같은데.’

노마는 여전히 곱게 눈꺼풀을 내리깔고 있었다. 다 죽어 가는 저 얼굴을 보니 알 것 같았다.

“…….”

노마는, 제 동생 니콜라스에게 끔찍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거기엔 부끄러움, 부채감 등등이 지독하게 얽혀 있겠지.’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하는 게 뻔히 보이기도 했고, 동생만 한 소년을 마주쳤다는 이유로 저 꼬락서니가 되는 것을 보니 견적이 나왔다. 미안해서 얼굴을 마주할 염치가 없다, 이거군.

두근두근 내내 고조에 있던 기분이 현실감을 찾았다. 머리에 냉수가 부어진 기분이었다. <오필리아와 밤>이 다시 떠오른 순간, 축제 거리를 쏘다닌 일은 이미 한철 꿈이 됐다.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테렛사는 노마의 상태와 비슷했다. 세 송이의 꽃 모두 내 손아귀 힘에 짓이겨져 시들거렸다.

‘그럼 그렇지.’

테렛사가 일주일을 가면 행운이 찾아온다.

일주일은 무슨. 내 테렛사는 한 시간도 못 갈 것이다.

‘내 현실은 여기다. 정신 차려, 아이사.’

나는 어쩐지 튀어나올 것만 같은 욕을 참기 위해 입 안을 짓씹었다.

순간 노마 얼굴에 테렛사를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노마가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뭘 잘했다고 아련하게 눈만 감고 앉았어.’

내가 아는 누구랑 하는 짓이 비슷해서 역정을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노마 저 인간은 지 동생이 얼마나 미친놈처럼 자신을 찾아 헤맸는지 모르겠지. 그러니까 저 지랄, 청승인 거다.

나와 니콜라스 놈의 유일한 공통점은 10년 넘게 찾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복수하겠다는 명목으로, 니콜라스 놈은 되찾겠다는 명목으로.

그간 나는 닉스 또는 오필리아를 쫓고, 니콜라스는 오필리아와 함께 노마를 찾기 위해 닉스를 쫓고 있었으니, 니콜라스 놈과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일이 많았다. 지금 생각하니 생쇼가 따로 없었다.

‘그―렇게 오필리아라는 여자를 모른다더니. 니콜라스 이 개자식.’

웃긴 건 지금 내가 찾던 오필리아는 니콜라스와, 니콜라스가 찾던 노마는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당신 동생이 목에 상처 난 것이 대수겠냐. 제 형이 저주에 걸린 것도 다 자기 잘못이라고 믿고 당신을 찾아 헤맸다고.’

찾는 사람이 무슨 심정인 줄도 모르고 회피하기 바쁜 노마가 괘씸했다. 사람 사이 골은 대화 부족에 도망치기 바빠서 생기는 게 대부분이다.

물론 내가 살아남아 노마를 탄타로스에서 데리고 가 버리면서 형제의 극적인 재회가 불발되긴 했다만, 재회 이벤트가 없어졌다고 그새 삽질을 하다니.

남 일에 아무 때나 끼어드는 것은 오지랖이다. 오지랖 한 번으로 영지까지 말아먹을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았다.

나는 말을 아껴야 했다. 지금 이 정보들은 내 기억의 조각이지 노마가 직접 이야기해 준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그렇지, 뭘 잘했다고 숨어?

숨어 있다가 나중에 나타나면, 한 100년 있다가 나타나면 기억이 잘 안 날 거라고 생각하나? 그럼 된다고 믿는 건가?

웃기고 있네.

“이봐요. 디아시 경.”

이게 마냥 남 일 같지 않아서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맥포이는 원래 잘 못 참기도 한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노마가 눈을 떴다. 촉촉한 눈동자를 마주하자 날뛰는 감정이 좀 누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왜 니콜라스 디아시에 대해 묻지 않습니까. 왜 그대 가족, 가문, 아무것도 묻지 않아요. 십수 년이 흘렀는데 궁금하지도 않습니까?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그러는 겁니까?”

“아이사 님.”

노마가 미간을 조금 찡그렸다. 화가 났다기보단 슬프고 괴로운 얼굴이었다.

“형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서 그대가 니콜라스 디아시를 피하는지 몰라도, 적어도 십수 년 제 형을 찾아 온 대륙을 떠돈 그놈은 당신을 꼭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네요.”

“……니콜라스가, 저를 찾아다녔습니까?”

“그 인간이 그럼 손 놓고 있었게? 디아시 형제는 죽고 못 산다더니 다 헛소문입니까?”

“그 애는 너무 착하니……. 순수하고 착한 아이니, 저를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순수? 착해? 동일 인물을 말하는 게 맞나?

“동생이……. 그 흑발에 금안, 댁이랑 되게 닮았지만 눈썹이 좀 더 날카롭고 이름이 니콜라스가 맞습니까?”

나는 혹시 몰라서 확인차 물었다.

“니콜라스를 무척 잘 아시네요.”

그래……. 어렸을 땐 누구나 귀여운 시절이 있는 거겠지.

“어쨌든. 동생, 작작 피하세요. 가족이라며.”

나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

“당신이 뭐 얼마나 잘못했고 미안한 일을 저질렀는지는 몰라도, 설령 니콜라스 디아시가 당신에게 영원히 꺼지라고 했어도. 당신이 찔리는 게 있으면 진짜 꺼지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니콜라스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말할 아이가 아닙니다.”

그러면서 노마가 아픈 표정을 하고 미미하게 웃었다.

‘나한테 한 적 있는데? 볼 때마다 하는 거 같은데?’

도대체 노마 머릿속에 니콜라스가 어떤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정말 가족이면, 진짜 미안하면 당신 때문에 동생이 뭘 겪었건 피하지 말라고요. 차라리 옆에 붙어서 매일 사과를 하란 말입니다.”

“그날 일어난 일은 전부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노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당신 잘못이면 더더욱 당신네 니콜라스가 울고 짜증을 부려도 찰싹 붙어서 다 받아 줘야지. 결국엔 회피가 제일 쉽고 편하니까 그런 거잖아. 다 자기만족 아닌가?”

“…….”

“정말 미안하면 그러면 안 되지 않습니까?”

내 목소리가 점점 격양되었다. 더 이상 노마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선명한 금발, 푸른 눈을 가진 망할 기지배에게 하는 말이었다.

“지가 그렇게 잘못했으면 미워라도 할 수 있게, 짜증이라도 낼 수 있게 옆에 붙어 있어야지! 굴러도 내 눈앞에서 구르고 죽어도 내 눈앞에서, 내 손에 죽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는 마차 창틀을 콩 때리며 외쳤다. 내가 들어도 박력 넘치는 목소리였다.

“……그렇습니까?”

“……그저, 제 생각입니다.”

“…….”

“그러니 제 말은, 제가 알기로 당신 동생은 당신을 한순간도 원망한 적 없다는 겁니다.”

“…….”

“아마도.”

“…….”

“그러니까 쓸데없이 청승맞게 굴지 마세요.”

노마의 표정은 해괴했다. 갑자기 흥분해서 쏘아붙이는 내게 적잖이 놀란 듯했다.

“흠, 흠. 아무튼 그저 제 생각입니다. 선택은 당신이 하세요. 할 일이 넘쳐 나는 가주 자리야 동생이 떠맡았으니, 당신은 자유의 몸이기도 합니다.”

물론 디아시가 사지 멀쩡한 장남을 내버려 두진 않겠지만.

“제가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 될 건 뭡니까? 이대로 곧장 임타에 가신다 해도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경의 선택이죠.”

임타는 제국 남부에 있는 최고의 휴양 도시였다. 365일 온화한 날씨 속에서 매일 술 파티가 열린다. 나 역시 은퇴한다면 그곳에 갈 생각이었다.

“당신도 대충 죽다 살아났으니 망할 가칙과 옛 제국법을 조금만 덜 지켜도 숨통이 트일 겁니다.”

노마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반대로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불필요하게 많은 정보를 쏟아 낸 기분이었다.

애써 시선을 돌렸다. 풍경을 보는 척하기 위해 가림막을 거두었을 때, 나는 그제야 마차가 여관 앞에 멈춘 지 한참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창밖으로 스탕 부인 엑트라와 사용인 몇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맨 앞에 서 있는 엑트라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표정은 툴레에서 날 놀리던 노부인과 같은 표정이었다.

아뿔싸!

갑자기 마차에서 내리기가 싫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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