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노마는 순발력 있게 스스로 몸을 뒤로 물려 소녀의 손을 피했다.
‘한두 번 피해 본 솜씨가 아닌데.’
“…….”
나는 애매하게 뻗어진 손을 거두어들였다.
“죄, 죄송합니다! 기사님! 저도 모르게, 정말 죄송합니다!”
소녀는 그제야 자신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소리로 사과하기 시작했다.
울먹이는 얼굴로 허겁지겁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노마는 침착하게 괜찮다 말했다. 적당하게 올라간 그의 입꼬리는 평소와 같은 모양새였다.
소녀가 거의 우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주변의 시선이 몰렸다. 몇몇은 대놓고 이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수군댔다. 일단 자리를 피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갑시다.”
나는 급한 대로 그의 팔뚝을 망토 채로 붙들었다. 그대로 그를 질질 끌고 다시 인파 속으로 섞여 들었다. 물론 노마가 끌려 준 것이겠지만.
“아이사 님. 이제 괜찮습니다.”
얼마나 걸었을까, 노마가 소곤거리며 나를 불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퍼뜩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봤다. 테렛사를 팔던 소녀와 시선들에서 충분히 멀어진 듯했다.
다음으로 노마를 올려다봤다.
‘얼굴이 너무 가깝지 않나?’
그제야 거리감이 조금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 시선을 조금 내려 내가 뭘 잡고 있는지 봤다. 내 양팔이 노마의 팔을 아주 꽉꽉 감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꼭……. 가볍게도 아니고 제대로 팔짱을 낀 것같이…….
“미쳤나?”
나는 정색을 하고 노마의 팔을 던지듯이 놓았다. 노마의 팔이 내팽개쳐졌다.
“네?”
“아니, 당신에게 한 말이 아니라…….”
“네, 압니다.”
“……뭘 알아요.”
노마는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뭔가 당해 낼 수 없는 그 표정에 나는 시선을 피했다.
‘아, 이게 아니지.’
“후드가 그대로 벗겨졌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원래 누구에게나 이렇게 대책 없이 친절하게 굽니까? 누가 말 건다고 그렇게 막 다 웃어 주면 어떡합니까. 옛날은 몰라도 요즘 세상엔 그러다 큰일 납니다.”
노마의 얼굴이 드러났다면 그 순간, 그는 순식간에 군중에게 둘러싸였을 것이다. 그의 외형은 여러모로 이목을 끄니까.
그래서 나는 짐짓 엄하게 쏘아붙였다. 내용만 보면 노마보다 스무 해는 더 산 늙은이가 하는 말 같았다. 또는 어린아이를 혼내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네, 조심하겠습니다. 아이사 님.”
그래도 노마는 순하게 네네, 했다. 이쯤 되니 그가 도대체 어디까지 내 말에 긍정만 할지 조금 궁금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제가, 언제 이름을 허락했습니까. 무례하십니다.”
나는 이왕 시작한 김에 조목조목 따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가주님이라고 부를 순 없지 않습니까.”
노마가 곤란한 척하며 말했다. 물론 그게 맞는 말이긴 했다. 이 사람 많은 곳에서 가주님, 가주님 할 수는 없지.
“……에리카라고 부르시라니까.”
노마는 이번엔 웃음으로 대답을 넘겨 버렸다. 왠지는 몰라도 에리카라고 부르기 싫다, 이거였다.
“누가 보면 아이사라는 이름이 퍽 마음에 든 줄 알겠습니다.”
“네, 좋은 이름입니다. 발음이 편해요. 에리카는 어렵습니다.”
참 나. 비슷하구만.
“……좋을 대로 하시던가요.”
개수작이었지만 넘어가 주었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와서 그럴까, 사람이 아주 관대해진 기분이었다.
노마가 이번엔 아주 기쁜 듯이 웃었다.
“아무튼 공석에선 절대 이름으로 부르시지 마시고 제대로 호칭하세요. 예법을 따르셔야 할 겁니다.”
“네. 아이사 님.”
“…….”
날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치나 유모인 시모어 부인뿐이었다. 기사단장인 도그만 경이야 날 이름으로 불러도 되는 사람이지만, 귀한 분의 존함을 입에 올릴 수 없다며 요란을 떤 적이 있어서 그 뒤로 나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노마 디아시가 뭐라고 지금 이름을…….’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되긴 싫어서 나는 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더 생각했다간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질 듯싶었다. 치명적인 손해를 피하는 장사꾼의 촉 같은 거였다.
“그나저나 사람들이 그대에게 자주 그렇게 달려들고 그럽니까?”
그래서 다른 화제를 골라잡았다.
“금안이 독특하다 보니 가끔 이런 일이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눈동자 색 때문만이 아닌 것 같은데.
“……제 생각엔, 차라리 인상을 쓰고 계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단순해서 미간에 주름이 잡힌 사람은 잘 안 건듭니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조언을 덧붙였다.
“하하.”
“……?”
노마는 나의 진지한 조언에 아까 전, 키를 걸고넘어졌을 때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기껏 조언을 해 줬더니 웃어?
“왜 웃지? 뭐가 웃깁니까?”
나는 순간 욱해서 위협적으로 물었다. 내가 정색을 하고 묻자 노마가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내렸다.
“제가, 인상을 잘 못 씁니다.”
내가 한 소리 하기 전에 노마가 선수를 쳤다.
“그러니 아이사 님이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그런 걸 가르쳐 드려야 압니까?”
“타인에게 언제나 친절하라 배워서요.”
그렇게 아련하게 말하면 또 내가 할 말이 없지 않나.
“……다음에 가르쳐 드리죠.”
나는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쯧, 물가에 놔둔 아치인 양 눈 떼기 어렵군. 그러고 보니 아치, 잘 있으려나? 고게 요즘 한 성깔 해서 오히려 시모어 부인이 걱정인데.’
시모어 부인은 나의 유모이기도 했다. 본래 아치의 유모는 시모어 부인의 딸들 중 하나가 되는 게 자연스러울 터였다. 그러나 다 죽고 에리카 시모어 하나만 남는 바람에 시모어 부인이 계속 유모 역을 맡게 되었다.
은퇴를 못 하게 한 것도 미안한데, 세상 순한 아기였던 아치가 좀 컸다고 한 성깔 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아치가 문장을 구사하기 전까진 모두 그 애가 천사인 줄만 알았다.
‘부인에게 미안스럽군.’
시모어 부인을 떠올리니 자연히 은퇴를 반납하고 돌아온 도그만 경이 생각났다.
‘도그만 경은 날 보자마자 제 목에 검부터 들이대겠지. 에휴, 그 기운 좋은 할아버지를 또 어떻게 말려.’
도그만 경은 감동의 재회고 뭐고 득달같이 달려들어 맥포이가가 내린 검으로 부디 제 목을 쳐 달라고 오열할 것이다. 가주님을 지키지 못한 자신은 죽어 마땅하다며 치맛자락을 붙들고 늘어질 모습이 눈에 선해 절로 기가 빨렸다.
그럼에도 맥포이가 사람들을 생각하니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기분 좋은 생각이라도 하셨나요?”
그때 노마가 나를 따라 웃으며 물었다. 그렇게 말하는 노마야말로 아까부터 이상하게 들뜬 듯하더니 이젠 대놓고 신나 보였다.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네, 뭐. 그러는 경께선 구경 잘 하셨나요.”
그게 어이가 없기도 해서 묻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어렸다.
“이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저는…….”
내 질문에 노마가 어딘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부끄럽게도 즐거웠습니다.”
노마가 눈을 살포시 내리깔며 말했다. 그의 볼이 축제의 열기에 점점 물드는 듯했다. 발그레하다.
다음 순간 노마가 아, 하고 짧은 탄식을 뱉더니 한쪽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의 손엔 아까 잡상인 소녀에게 산 테렛사 세 송이가 있었다.
“아이사 님의 눈동자 색과 비슷합니다.”
“이걸……. 지금 저 주시는 겁니까?”
노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는 어떤 기대감이 그득했다.
테렛사가 내 눈 색과 비슷하긴 한데, 그렇다고 이 상품 가치 없는 것을 지금 나더러…….
“고맙습니다.”
하지만 머리와는 다르게 나의 입과 손은 냉큼 꽃을 받아들였다.
“오늘 함께 축제에 나와 주셨으니, 답례입니다. 사소한 것이라면 받아 주실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저야말로 감사를 드려야겠군요. 머리가 복잡했는데, 시끄러운 곳에 있으니 낫군요.”
“그러셨습니까?”
“네.”
“저도 그랬습니다.”
“…….”
아니, 다시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번엔 좀 다르게, 미지의 영역과 맞닥뜨린 것에 가까웠다. 피부에 얕은 소름이 끼쳤다. 분위기가 낯간지러웠다.
이게 다 노마 디아시, 저 아무한테나 친절한 인간 때문이다. 이 분위기를 진짜 어쩔 거야. 후퇴! 후퇴! 머릿속에서 시끄러운 경보가 울렸다.
“그럼, 이제 그만 돌아갈까요? 상단 일은 웬만큼 끝났을 겁니다.”
나는 당장 이 분위기를 깨기 위해 마차 대여소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째서 벌써 돌아가십니까?”
그런데 잘만 네네, 하던 노마가 뭐 때문인지 의아한 얼굴을 하고 늘어지는 게 아닌가.
“……예?”
내 머리 위에 물음표가 100개는 떠올랐을 것이다. 아니 그럼, 더 놀 생각이었나?
“지금쯤이면 상단도 거의 용건을 마무리했을 겁니다. 그러니 슬슬 돌아가도 괜찮을 거예요.”
나는 혹시 그가 상단을 걱정하는가 싶어 침착하게 설명했다.
“스탕 부인이 당신께서 건국제 불꽃놀이를 매우 좋아하신다고, 꼭 그 시간까지 잘 모시라 당부했습니다.”
“제가 건국제 불꽃놀이를 좋아해요?”
그 성력을 쥐어짠 노가다를?
건국제 ‘불꽃놀이’란 화약도 없는 이 시대에 황실과 대신전이 메헤라 신에 대한 신앙심을 높이기 위해 합작해 만든 오래된 전통이었다. 각 도시의 신관들을 쥐어짜서 기나긴 건국제 기간 동안 밤마다 하늘에 성력으로 짜낸 빛을 흩뿌리는, 아주 비인도적인 행사였다.
빛깔이 아름다운 성력을 가진 신관들은 특히 열심히 굴려졌다. 그걸 내가?
“……아닌가요?”
“아니, 그…….”
확실히 노마에겐 그의 면전에 대고 ‘아니!’를 외치기 어려운 뭔가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건 내일 봅시다. 어차피 건국제 기간 내내 매일 밤 하는 것이니.”
“내일도 나옵니까?”
내일.
나도 모르게 ‘다음’을 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상단 일이라는 게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축제 규모를 보면 아시겠지만 멧만 해도 필요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내 말이 뭔지 알겠죠? 어쩔 수 없이 내일도 돌아다녀야 한다는 거죠.”
탄타로스에 보낸 정찰대는 빨라 봤자 이틀 후에나 올 것이니 내일까지는 시간이 있다. 또한 맥포이에서 오고 있는 맥포이 기사단 역시 아무리 빨라도 이틀이나 사흘은 지나야 카탐에 도착할 것이다.
여관에 틀어박히면 잡생각만 늘 테고……. 그래, 그러니까 나가는 거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네. 그럼 내일은 꼭, 아이사 님이 좋아하는 불꽃놀이를 봐요.”
노마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미친.
“……그럼, 이제 진짜 갑시다.”
나는 튀어 나갈 뻔한 욕지기를 삼키고 성급하게 뒤를 돌았다.
너무 성급했을까? 갑작스럽게 뒤를 도는 바람에 나는 누군가와 부딪혔다. 헉, 하는 순간 넘어질 것까지 각오했으나 이상하게 내가 튕겨 나가지 않았다.
내가 튕겨 나가지 않다니? 그렇다면 높은 확률로 어린애였다.
‘이런 젠장.’
아니나 다를까 웬 어린 소년이 뒤로 넘어가는 것이 보였다. 다급하게 손을 뻗었지만, 이번에도 내 반사 신경은 그리 좋지 못했다.
‘아, 망했다―.’
한발 느리게 뻗어진 내 손을 노마의 손이 앞섰다. 어느새 내 등에 바짝 다가선 노마는 한 팔로는 내 복부를 감싸고 다른 팔로는 뒤로 넘어가던 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순식간이었다.
‘십년감수했다.’
이렇게 붐비는 거리에서 넘어졌다간 사람 발에 채이기 딱 좋았다.
“괜찮나?”
커다란 손에 어깨가 붙들린 아이는 눈을 땡그랗게 뜨고 내 쪽을 보았다. 정확히는 내 뒤를 응시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눈동자가 잘잘 흔들리는 모습으로 짐작건대 많이 놀란 듯했다. 와중에 노마의 손이 워낙 커서 그런지 붙잡힌 아이의 어깨가 퍽 아파 보였다.
“경, 아이를 놓아 주시는…….”
응? 나는 그제야 노마의 손이, 팔이, 등 뒤로 느껴지는 몸이 지나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렸다. 노마의 옆얼굴이 보였다.
노마는 어딘가 찔린 듯한 얼굴을 하고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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