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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드 엔딩 후에-20화 (20/139)

20.

아이사의 기분 탓이 아니라, 노마는 오늘 정말 기분이 좋았다. 맥포이 가주와 함께 축제에 나온 것은 상상 이상으로 즐거웠다.

노마는 헛웃음을 삼켰다. 두 사람은 놀러 나온 것이 아니었다. 맥포이 가주는 여전히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고 자신은 제정신이 아닌 그런 때에, 눈치 없이 들뜨는 제 마음을 노마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축제 거리는 대단했다. 활기와 생명력 그 자체였다. 커다란 목소리로 웃고 떠드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것만으로 어딘가 안심이 되었다. 편안했다.

그리고 옆엔 맥포이 가주가 있었다. 노마는 그녀 옆에 있으면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정말 조그마하지만 놀랍게도 그랬다.

그녀는 ‘디아시 경’을 조금 알 뿐, ‘노마 디아시’가 실은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지 몰랐다. 그래서 그녀가 편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노마는 생각했다.

또 그녀는 제게 다정하기도 했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매몰차게 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같은데,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이 말을 하면 당신은 또 얼굴을 붉히면서 화를 내겠지.’

그 모습을 상상하니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바람에 노마는 표정 관리에 힘써야 했다. 맥포이 가주의 정수리는 겨우 제 어깨에 차기 때문에 그녀가 조금만 턱을 들어 올려도 표정을 들킬 수 있었다.

그녀는 자주 화를 냈고, 또 자주 얼굴을 붉혔다. 시시각각 극적으로 변하는 아이사의 표정은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해 노마는 그녀 앞에서 웃음을 터뜨리지 않으려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노마는 그녀가 귀족치고 감정 표현이 꽤나 풍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카탐에 와서 보니 꼭 그렇지도 않았다. 맥포이 가주는 아랫사람들을 대할 때 누구보다 귀족처럼 굴었다. 또는 누구보다 용병 우두머리 같았다.

그녀는 절도 있는 위엄을 가졌으나 동시에 매우 불량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항시 미간을 살풋 찌푸리고 입매를 비뚜름하게 올린다. 악당스러운 표정은 거의 허물어지는 일이 없다.

그녀는 웃음에 특히 박했다. 그녀 입으로 절대 울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노마는 스스로 눈치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고라는 예외가 있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잘 읽었다.

그래서 노마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맥포이 가주, 아이사가 제게 유독 관대하다는 것을.

‘아―.’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노마는 자신이 지금 무척 기분이 좋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정, 인내, 절제는 성기사의 미덕이며 그는 누구보다 감정을 다스리는 것에 능했다.

노마는 메헤라를 모시는 기사라면 어떤 감정도 과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디아시 가문과 신전에 속한 사람으로서 평생 그런 가르침을 받아 왔다. 실제로 인생 대부분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나.

그러니 제 기분이 이렇게 들뜨는 건 이상했다. 노마는 들뜬 마음을 습관처럼 가라앉혀 보려 했다. 이럴 때가 아니기도 했다. 이래 봬도 맥포이 가주의 호위 역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노마는 아이사가 ‘너무 자그마한’에 발끈한 순간, 방방 널뛰는 기분을 잠재우는 것을 포기했다. 참을 수 없이 웃음이 터져 버렸다. 소리 내어 웃는 것이 굉장히 오랜만이라 제 웃음소리가 어색할 지경이었다.

물론 어색함도 잠시였다. 아이사, 그녀의 반응이 아까보다 더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노마는 저 표정을 또 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노마의 유모가 그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도련님은 마님을 닮아 아직 아기 도련님이셨을 때, 누구보다 심한 장난꾸러기라 제가 아주 애를 먹었습니다. 이렇게 점잖은 기사님이 될 줄 이 노인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이게 다 동생이 생기셔서 그런 걸 거예요.”

노마는 유모의 말이 과장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과장 없는 사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러면서 노마는 스스로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 충동에 몸을 맡겼다. 아이사의 표정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입을 열었다.

“아이사 님.”

효과는 대단했다. 아이사는 크게 당황해 곧장 무례를 지적하지도 못했다.

노마는 그런 그녀에게 호칭을 지적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녀가 충격에서 빠져나오기 전에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작다고 하는 걸 싫어하시나 봐.’

노마의 입꼬리가 자기도 모르게 상승했다.

‘귀엽지 않은가.’

노마는 자신이 맥포이 가주를 두고 아주 불경한 생각을 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었다.

가볍다 못해 발끝이 붕붕 뜨는 기분을 느끼며 그는 아이사를 쪽을 다시 힐끔 내려다봤다. 제 소매를 꽉 잡고 제 옆을 걷는 그녀는 아직도 당황스러움을 갈무리하지 못한 채였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그녀 정수리에서 김이 펄펄 끓는 듯했다.

노마는 그 모든 게 마음에 들었다.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걸 겨우 참았다.

맥포이의 가주는 다정하다. 목청도 우렁찬 게 웬만한 무인보다 용맹하다. 심지어 살면서 제가 본 사람 중 가장 욕을 잘하기도 했다.

‘아―.’

그러다 노마는 뒤늦게 깨달았다. 아까부터 이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축제 거리를 걷는 동안 이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활기가 넘치는 시끌벅적한 축제에 묻혀 그런 걸지도 모른다. 또는 온 신경이 자그마한 그녀가 인파를 뚫는 모습을 지켜보는 데 쏠렸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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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하기 싫었지만 장신의 몸 좋은 성인 남성은 인파를 뚫기가 훨씬 쉬웠다. 반걸음 앞서 길을 여는 노마 덕에 나는 이리저리 치이는 일 없이 수월하게 걸을 수 있었다.

노마는 단단히 재미가 들렸는지 그 뒤로도 몇 번 ‘아이사 님’이라고 속닥거렸다. 그때마다 귓가부터 간지러움이 퍼져 죽을 맛이었다.

처음 멋대로 ‘아이사 님’이라 불렀을 때 분노하고 무례를 지적했어야 했다. 그러나 누가 봐도 놀리는 것이 분명해서 나는 어울리지 않게 한참을 당황했고, 선 그을 타이밍을 그대로 놓쳐 버렸다.

벌써 몇 번째 이런 식으로 말렸는지 모르겠다. 나는 노마가 몇 번을 더 ‘아이사 님’이라고 부른 뒤에야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무례합니다’ 하고 쏘아붙일 수 있었다.

스스로 노마에게 무르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문제는 노마 역시 내가 자신에게 꽤 무르다는 사실을 이미 눈치채 은근히 뻔뻔하게 굴기 시작했다는 거다.

노마는 하나도 안 죄송한 얼굴로 ‘죄송합니다, 아이사 님. 아, 제가 또’ 라고 말했다.

능청스러운 거짓말에도 나는 화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다음부터는 실수하지 말라며 멍청하게 지껄인 것이 다였다.

가노 그 싸가지 없는 해적 놈이 가끔 ‘아이사’ 하고 하극상을 벌이면 칼부터 살벌하게 꺼내 드는데, 노마에겐 그렇게 못 하겠다.

일단 저 목소리부터 문제였다. 이게 다 저 근사한 목소리로 남의 이름을 부르니까 얼굴이 불타고 그러는 거다.

두근두근. 궁지에 몰린 것처럼 빠르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반걸음 앞서가는 노마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그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간간이 뒤를 돌아보며 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그가 고개를 조금 돌려 내 쪽을 보면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아마 심하게 티가 났을 테지만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간 또 얼굴 붉힐 일이나 생길 것이다.

‘소매 안 놓치고 있으면 어련히 잘 따라가고 있는 것을, 왜 돌아보고 난리야!’

그런 생각을 하며 노마가 돌아볼 때마다 딴청을 피웠다.

‘그나저나 안 나왔으면 창 붙잡고 울고 있었겠군. 이렇게 신나 할 줄 몰랐지.’

아까부터 노마는 축제가 처음인 사람처럼 별걸 다 뚫어져라 살피며 거리를 거닐었다. 잠든 사이에 바뀐 것도 많고 새로 생긴 것도 많으니 만사가 신기하긴 할 터였다.

그러나 저 모습은 아무리 잘 쳐줘도 꼭 축제에 처음 와 본 점잖은 아이가 아닌가.

……매우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혹시 축제 자체가 처음이십니까?”

나는 설마 해서 물었다.

“네. 축제도, 실은 시장도 처음입니다. 임무를 하며 장터를 지나간 적은 있으나 장날이 아니었으니까요.”

“…….”

노마는 여러 의미로 온실 속 화초 같은 남자였다.

‘그래……. 귀하게 키워졌구나. 너무 귀하다. 그래, 디아시 후계자에 단장을 노리던 성기산데 그럴 수 있지. 평민들 즐기는 축제며 시장 바닥에 올 일이 뭐가 있었겠어.’

갑자기 어떤 책임감이 막중하게 나를 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실은 이대로 은근슬쩍 여관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이왕 나온 거 조금만 더 돌아다니지, 뭐. 어차피 상단 쪽도 일이 덜 끝났을 거다.’

나는 빠르게 합리화를 마치고 호기롭게 입을 열었다.

“또 어디가 궁금합니까? 시간은 있으니 다 가던가요.”

그리고 나는 그 말을 10분 만에 후회했다.

일단 드디어 발바닥에 불이 날 것 같았고 노마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음에도 사람들에게 잘 잡혔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이 숨 쉬듯 꼬이는 사람이 있다더니, 노마가 그런 모양이다.

“기사님! 키가 크신 기사님! 테렛사 꽃 한 송이 사세요!”

내가 잠시 갓길에 멈춰 서 신발을 고쳐 신는 사이 노마는 그새 꽃을 파는 잡상인 소녀에게 붙잡혀 있었다.

보라색 꽃송이를 다발로 든 소녀는 겁도 없는지 큰 키와 덩치를 후드로 감춘 남자를 덥석 붙잡고 늘어졌다. 그 꼴을 본 나는 신발을 고쳐 신다 말고 혀를 세차게 찼다. 신발 끈을 묶는 손이 빨라졌다.

그러는 동안 노마와 소녀는 하하 호호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소녀의 키는 나보다 작았다. 노마의 바로 아래서 그를 올려다보았다가 후드 틈새로 얼굴을 보고 만 소녀의 볼이 삽시간에 붉게 상기됐다

‘그 얼굴을 보고 말았구나!’

그때 화사한 미소를 띤 노마가 내 쪽을 바라보더니 꽃을 가리켰다.

“사고 싶은 게 있으면 마음껏 사세요. 금화를 조금 드릴 테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 돈으로 사시면 됩니다.”

축제 거리에 들어서기 전에 분명 내가 그렇게 말했다. 왜 아무것도 안 사나 은근히 신경이 쓰였는데 드디어 뭔갈 사려나 보다.

그런데 고작 테렛사 꽃이라니. 테렛사는 물가에서 피는 들꽃으로 잘 시들기도 했다. 그야말로 개복치 같은 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테렛사가 일주일을 버티면 행운이 생긴다는 말도 있었다. 행운 점으로도 쓰이는 꽃이라 축제 때 파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저거 심지어 너무 질이 안 좋아 보이는데? 나라면 줘도 안 받아.’

그래도 인생 첫 구매를 한다는데 찬물을 끼얹기 뭐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마는 소녀에게 값을 치르고 꽃송이를 받기 위해 등허리를 조금 숙였다. 소녀가 작았기 때문이다.

“기사님……. 너무 아름다우세요.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가까워진 노마의 얼굴에 과부하가 온 소녀가 붉은 얼굴을 하고 홀린 듯 중얼거렸다.

“고맙습니다.”

노마는 그렇게 말하고 소녀에게 방긋 웃어 주며 감사를 표했다.

노마가 꽃송이를 넘겨받은 순간, 소녀가 충동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소녀가 노마의 후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소녀의 충동을 나는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꽃을 품에 안고 저 얼굴로 웃어 주는데 정신이 혼미하기야 하겠지.

‘그래도 그렇지, 멋대로 후드를 벗기려고 하면!’

소녀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란 나는 노마를 내 쪽으로 잡아당기려고 마찬가지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느려 터진 내 반응 속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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