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나는 지금 왜 여기 있는가.’
북적이는 인파를 헤쳐 나가며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린 것 같단 말이지.’
앞장서서 인파를 뚫던 나는 흘끔 뒤를 돌아봤다. 내 눈높이보다 훨씬 위에 있는 노마의 눈과 마주쳤다. 시선이 맞닿자 노마는 미소를 짓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 나. 뭘 응원하듯이 끄덕이고 있어. 혹시나 당신이 미아가 될까 봐 확인하는 건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고개를 홱 돌리고 사람들을 비집고 나아갔다.
그래서 내가 뒤를 돌아볼 때마다 노마가 재빠르게 손을 뒤로 숨겼단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걸음마 하는 딸내미를 전전긍긍하며 따라다니는 아빠 꼴을 하고서 내 뒤에 바짝 붙어 걷고 있는 줄은, 더더욱 몰랐다.
이게 다 불쾌지수가 극에 달해서 그랬다. 엑트라 말로는 오늘은 광장에서 큰 공연을 하는 날이 아니라 인파가 덜할 거라더니 딱히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건국제는 한 달 내내 부어라 마셔라 밤새 즐기는 축제였다. 귀족이고 평민이고, 제국민에게 1년 중 가장 큰 이벤트가 바로 건국제였다. 매일 크고 작은 공연과 볼거리가 즐비하고, 거대한 규모의 축제장이 열리며 새벽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시기였다.
귀족들은 건국제 전후인 황도 사교 시즌에 맞춰 황도로 향했다가, 다시 영지로 돌아가며 돈을 있는 대로 쓰기도 했다. 덕분에 건국제 때 번 돈으로 1년을 먹고사는 사람도 있었다. 롬닥 역시 ‘멧’의 연 수입 반을 건국제 기간 동안 벌어들인다.
중앙과 동부를 잇는 카탐은 동부, 북부, 남부의 세 갈래 길이 전부 모이는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이다. 하여 건국제 기간에 카탐을 거치는 인파는 어마어마했다. 당연히 축제 규모 역시 맥포이 버금갔다.
‘아, 나오지 말걸.’
축제 거리를 메운 인파는 카탐의 정기 장날의 세 배는 되어 보였다. 심지어 점점 불어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다, 장사꾼 아니랄까 입이 번지르르한 스탕 부인의 개수작 아닌가!’
나름 사람을 피해 보려 했지만 이리저리 부딪혀 휘청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불쾌지수가 쌓이며 엑트라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다.
“잠시만요, 가주님!”
약 세 시간 전, 나를 불러 세운 건 다름 아닌 엑트라 스탕이었다.
엑트라는 노마가 축제를 구경하려면 나도 함께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의도가 심히 불손해 단박에 기각하려 했지만 그녀는 정색을 하고 의외로 조목조목 바른 말만 했다.
“가주님께서 동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아시다시피 가주님을 호위하기에 지금 롬닥의 병력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가주께서는 정적도 많으시고, 심지어 광신도까지 가주님을 노리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놈들이 가주님의 행방을 찾아내면 이 병력으론 호위가 힘듭니다.”
“롬닥이 평소와 달리 여관에서 움직이지 않고 기사단 또한 계속 이곳에 머무니, 벌써 입을 놀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곳에 롬닥이 뭘 숨겨 놓았다고요.”
말 그대로 이 여관에 롬닥이 떡고물을 숨겨 놨다고 생각한다 이거였다. 그리고 그 떡고물은 무려 그 상단주이고, 지키고 있는 기사 수는 턱없이 부족했다.
요는 여관에만 계속 머물면 눈길을 끈다는 것이었다.
“가주님께서도 상단을 호위하는 기사단과 함께 움직이시면서 그자들의 의심을 지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엑트라는 진지하게 말했다.
옳은 말이었다. 롬닥 상단은 최대한 평소처럼 움직여야 했다. 롬닥이 움직이려면 기사단이 당연히 뒤따라야 하고 호위에 구멍이 생길 바엔 내가 상단과 이동하는 편이 나았다. 정적과 광신도는 곳곳에 있었다.
“겸사겸사 축제 구경도 하시고요. 물론 호위하기 편하게 두 분이 꼭! 함께 움직이시면 좋겠네요.”
스탕 부인, 엑트라는 누가 뽑았는지 유능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주책이었다.
사람 둘을 붙여 놓는다고 인연이 생기면 세상은 사랑이 넘치다 못해, 모두가 서로를 사랑하는 세상일 것이다.
노마가 ‘저 때문에 가주님이 무리하시게 할 순 없습니다’ 하는 소리나 하며 담담하게 한 걸음 물러서지만 않았어도, 나는 스탕 부인의 설득에 콧방귀나 뀌었을 것이다.
“저는 축제 구경을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저 또한 호위가 가능하니, 롬닥은 예정대로 움직이세요. 제가 여관에 남아 가주님을 호위하겠습니다.”
노마는 한없이 담담하게 이야기하는데, 한 마디 한 마디가 정말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를 애잔한 눈빛으로 보던 엑트라가 파렴치한 보듯 날 가자미눈으로 흘긴 것도 작은 몫을 했다.
“아, 갑시다! 당장 나가요!”
아악! 또 무슨 빚을 지게 하려고! 나는 제 발이 저려서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고, 반색한 스탕 부인은 세수가 먼저라며 나를 질질 끌고 나갔다.
그렇게 벌써 축제 거리를 쏘다닌 지도 한 시간째였다. 내 체력으로는 이미 한참 전에 한계였다.
그나마 사람이 좀 없는 길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뜨거운 열기가 확 끼쳤다. 동시에 주변에서 커다란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반사적으로 움찔, 걸음을 멈추고 열기가 끼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 뿜는 묘기꾼과 그 구경꾼들이 들썩거리고 있었다. 진기명기가 분명했지만 나는 저런 건 질색이었다.
더 이상 여기 못 있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기가 막힌 불 쇼를 선보이는 사나이가 이번엔 하늘을 향해 불을 뿜었다.
‘아뿔싸’ 했을 땐 이미 늦었다. 흥분한 관중들이 저마다 날뛰었다. 가까이 보려고 다가가는 자, 불길에 놀라 몸을 뒤로 물리는 자들이 서로 뒤엉켰다.
작달막한 나는 쉽게 군중의 움직임에 휩쓸렸다. 몸의 중심축이 기우뚱, 뒤로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
그러나 기울임을 느끼기도 전에 누군가의 가슴팍에 내 뒤통수가 퍽, 소리를 내며 안착했다.
“괜찮습니까?”
언제 이렇게 바짝 다가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노마는 안정감 넘치게 가슴으로 내 뒤통수를 받고, 양손으로 내 어깨를 붙들었다.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올려다봤다.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는 그와 수직으로 눈이 마주쳤다. 가까웠다.
“아, 고맙습니다.”
나는 빠르게 다시 고개를 숙여 정면을 보았다. 괜스레 후드를 더 푹 눌러썼다.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이 길은 벗어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노마는 자신의 기다란 망토 품으로 나를 보호하듯이 감쌌다.
내가 겨우 노마의 어깨에 차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 하나가 그 품에 쏙 담긴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엉겁결에 안기다시피 한 모양새였다.
어쩐지 아까보다 더 덥고 숨이 막혔다. 노마는 그 상태로 인파를 속을 움직였다. 축제 거리를 벗어나자 그나마 한산한 길이 나왔다. 걸음을 완전히 멈추고 나서야 그의 망토 자락과 팔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걱정 마세요. 호위는 열 사람 모두 잘 따라붙고 있습니다.”
노마가 주변을 휘 돌아보며 어쩐지 뿌듯한 투로 말했다.
“아, 네. 잘됐네요.”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많이 더우십니까?”
노마가 반사적으로 손부채를 거들며 물었다.
“아닙,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손 거두세요. 당신이 제 사용인도 아니고.”
노마는 가끔 귀족 예법을 개나 준 사람같이 굴어서 내가 다 기겁할 때가 많았다.
디아시 가문은 황제가 대신관을 겸하던 초대 제국 시절의 예법을 아직도 지키고 있는 괴상한 곳이었다. 평생 그런 디아시의 귀한 후계자로 자란 사람이 가끔 이런 식으로 거리낌 없이 행동하니, 예법과 거리가 먼 나조차 당황스러울 때가 있었다.
이런 행동들은 도대체 누굴 보고 배운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얼굴이 붉으십니다.”
“…….”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뺨을 더듬었다.
“아……. 제가 빨갛습니까? 조금 더워서 그렇습니다.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축제 거리가 실제로 더워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노마 앞에선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일이 많았다. 맥포이로 돌아가자마자 미인에 대한 면역을 기르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작게 끄덕인 노마는 잠시 망설이는 듯 보였다. 왜 그러냐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역시, 제가 당신을 잡아도 되겠습니까?”
“잡아요? 뭘 잡아요.”
목적이 불분명한 말에 나는 정색을 하고 되물었다.
“당신은 너무, ……자그마해서 제가 당신을 놓칠까 걱정됩니다.”
노마가 진중한 얼굴로 속삭였다.
아하. 그 말이구나.
나는 빠르게 납득했다. 일단 이 많은 인파에 휩쓸리면 순식간에 저 멀리 떠내려가거나 넘어져 밟히고 있을 테니.
‘……아니, 근데 뭐가 어째? 너무 자그마해?’
작은 키가 항상 아쉬웠던 나머지 나는 빠른 수긍과 동시에 조금 발끈하고 말았다.
“저는 평균 키이니 그렇게 작지도 않고, 멀리서 호위가 보고 있으니 길 잃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럼. 제가 길을 잃을까 무서우니 저를 잡아 주시겠습니까.”
노마가 특유의 방글방글, 반짝반짝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
설마……, 나 지금 어르고 달래진 건가? 이거 외면도 내면도 애 취급인 것 같은데…….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다. 유치하게 굴었다는 생각에 수치심이 뒤늦게 몰려왔다.
“저를 뭐, 당신 어린 동생 취급하시는 겁니까? 저는 떼쓴 게 아닙니다.”
노마의 동생, 싸가지 니콜라스 놈과 동급이 된 느낌에 나는 질색했다.
노마가 그런 내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면서 하하, 하고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노마가 웃음소리까지 낸 건 처음이라 나는 더욱 수치심을 느꼈다.
“그럴 리가요. 당신은, 당신입니다.”
“…….”
아닌데. 애 취급하는 게 맞는 거 같은데.
노마는 어딘가 즐거워 보이기까지 해서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얼굴을 살폈다.
“그럼 이제 잡아 주시겠습니까?”
그러면서 노마가 팔 한쪽을 내밀었다. 망토에 가려졌던 그의 하얀 손이 드러났다. 나는 대답 없이 그의 소매를 천천히 잡았다.
“…….”
“꽉 잡아 주세요.”
노마가 팔을 제 쪽으로 당기며 말했다. 그러곤 고개를 숙여 나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이사 님.”
“……!”
순식간에 귓가가 뜨거워지는 느낌에 나는 황급히 남는 손으로 귀를 막고 한 걸음 그에게서 떨어졌다. 와중에 꽉 잡아 달라는 말을 지키듯이 소매를 놓치지 않았다.
귓가부터 시작한 열은 빠른 속도로 퍼져 볼까지 달아오르고 말았다. 막을 수가 없었다. 펄쩍 뛰어오르지 않은 것만으로 용했다.
‘젠장. 방심했다.’
다른 사람이 ‘아이사’라고 부른 것이 조금 오랜만이라 놀랐다. 정확히는 ‘아이사 님’이라고 불렀지만 어쨌든 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들으니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예상치 못한 그의 장난에 나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그를 올려다봤다. 잔뜩 구겨진 시뻘건 얼굴은 퍽 우스웠을 거다. 내 표정이 재미있는지 노마는 나를 보고 소년처럼 웃었다.
노마는 어쩐지, 아니 분명히 신나 보였다. 뿌듯해 보이기까지 했다. 카탐에 와서 그의 다양한 표정을 알게 된 것 같았다. 물론, 중요하진 않았다. 아무튼.
‘이런 미친……. 이런 캐릭터인 줄은 몰랐지.’
디아시에도 장난을 칠 줄 아는 사람이 있다고? 진짜 거리감을 알 수 없는 인간이었다.
노마는 컨디션도 최상인 듯했다. 그는 오늘 미친놈처럼 허공을 보지도, 멍하지도 않았다. 노마의 소매를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번엔 노마가 앞장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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