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디아시 경, 그분 미모에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호호! 어쩜, 뭘 가져다 대어도 빛이 나시더군요!”
엑트라에게 일 처리에 대한 보고를 받다 디아시 경은 잘 모셨냐는 내 질문에, 예상치 못한 대답이 떨어졌다.
여기서부터 내 미간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드디어 맥포이에도 안주인이 생긴다며 다들 들떴습니다. 가주님, 제가 얼마나―.”
그 뒷말은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무슨 개소리지? 누가 안주인이야?”
“예……? 그럼 그 아름다운 분을 왜 여기까지 모셨나요? 굳이, 굳이 그분을 붙잡으시길래 저희는 당연히 그렇고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했지요.”
나는 ‘굳이’ 두 번에 치명타를 입었다. 아름다운 거랑 무슨 상관이야? 뭐가 그렇고 그렇게야!
“어머나……. 저희는 당연히 가주께서 그분을 마음에 두셨―.”
내 얼굴이 무섭게 굳어지는 걸 마주하고도 엑트라는 끝까지 입을 놀리려 했다.
“은인! 은인이라 하지 않았나! 잘 모시랬더니 뭔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가!”
기가 차서 입만 뻐끔대다 빽 소리를 질렀다. 엑트라가 에구, 하며 귀를 막았다.
‘저, 저 능청스러운 늙은이 같으니라고.’
맥포이 가신들은 가주가 조카딸뻘, 손녀딸뻘이다 보니 가끔 거리감이 지나쳐 이렇게 오지랖을 부리곤 했다. 그들의 오지랖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제발 제국 레이디의 품위를 지켜라. 그리고 제발 결혼 좀 해라! 우리도 안주인, 가주 부군 가지고 싶다!
내가 성년이 되자마자 슬슬 나왔던 안주인 타령은 필립 모퍽, 가진 건 유서 깊은 가문 이름 하나뿐인 그 머저리를 허수아비 약혼자로 세워 놓으며 잠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가신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들 마음에도 차지 않는 못생긴 놈이 위장용이라는 건 바로 알아차렸다. 그들은 가주께서 얼마나 우리가 피곤했으면 모퍽의 소가주, 그 주근깨 많은 겁쟁이를 옆에 뒀을까 싶어 일단은 눈치껏 조용히 했다.
그리고 최근, 가신들 중 시모어 부인을 중심으로 제대로 된 상대를 데려오든가 어디 한번 그 못생긴 필립과 정말 결혼을 하든가 하라며 은근한 압박이 시작된 참이었다.
시모어 부인은 보좌관 에리카 시모어의 어머니로, 어린 시절 나의 유모였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은근히 꼼짝하지 못했다.
게다가 믿을 사람이 별로 없다는 이유로 은퇴도 못 하게 하고 아치를 맡겨 놓은 처지라 시모어 부인의 말은 내게 그 무엇보다 강력했다.
‘어떻게 사지 멀쩡한 남자만 보면 붙여 보려고 안달이군.’
근래 항상 이런 식이었다. 다들 남의 혼사에 관심도 많았다.
물론 가신 된 입장에서 내 후계자라곤 달랑 아치 하나에 방계는 씨가 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걱정이 될 만도 하다. 좋은 충심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알 바는 아니었다. 가신들이 하도 난리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결혼도, 애 생각도 없었다.
‘그대들이 백날 소원 성취를 부르짖어도 이쪽은 떡 줄 생각이 없단 말이다.’
귀여운 조카 아치에게 가주 자리를 물려주고 좋을 때 은퇴해 천수를 누리는 것이 내 인생 계획이었다. 나의 원대한 계획은 에리카 정도만 알고 있었다.
나는 더 듣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어머, 가주님! 어디 가십니까! 아니, 세수도 안 하시고!”
어디 가겠냐!
나는 세숫물을 가지고 대기하던 사용인을 지나쳐 쿵쿵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디아시 경을 어디에 모셔 놨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웅성거리며 구경꾼들이 모여 있는 복도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구경꾼들이 어느 방을 훔쳐보고 있는지 찾는 건 더더욱 어렵지 않았다.
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며 복도를 가로지르자 방문 앞에서 기웃거리던 무리들이 눈치 좋게 흩어졌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그 무리엔 심지어 기사들도 군데군데 끼어 있었다. 맥포이 기사들은 출신 때문인지 용맹하고 의리만 있었다. 그들에게 기사도는 바라지도 않았다.
기강 없는 건 알고 있었다만 저 꼴을 보니 왜 다른 기사들이 맥포이 기사를 싫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본래 제국에서 기사란 출신 하나하나 따져 임명되는 고귀하고 명예로운 직업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출신을 따질 겨를이 없었기에 그들을 택했다.
나는 그것들을 흘겨보며 혀를 찼다. 와중에 꺅, 꺅, 즐거움 가득한 비명이 문틈으로 새 나왔다.
‘얼씨구.’
꽝―!
문이 열리고, 조그마한 여자들 사이에서 우뚝 솟아 있는 노마 디아시가 보였다.
신이 나서 노마에게 이것저것 들이대고 있는 하녀들과 활짝 열린 문 틈새를 놓치지 않고 그새 흘긋거리기 바쁜 기사들까지, 환장이었다.
예의를 차리며 곤란한 듯이 미소를 머금고 있던 노마가 나를 발견했다. 우리가 친한 사이도 아닌데, 그는 날 보자마자 얼굴 근육을 죄다 풀고 웃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우리가 정말 가까운 사이라도 된 줄 알았다.
“가주님.”
근 하루 만에 보는 햇살 미소는 여전히 강력했다. 나를 반기는 그는 어딘가 구원 줄을 찾은 사람과도 같아서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어린 사용인들이 펄쩍 뛰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후……. 다들…… 나가라.”
나는 손질이 안 된 머리를 쓸어 넘기며 겨우 한마디 했다. 아랫것들 방정 때문에 쪽팔려서 그렇다. 위엄 다 버리고 뛰다시피 걸어서 그런지 숨이 차기도 했다.
혼비백산한 사용인들이 가지고 온 옷가지와 장식품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는 문가에 삐딱하게 기대선 채로 그 꼴을 지켜봤다.
‘디아시 처음 보나.’
아, 처음 볼 만도 했다. 디아시는 대부분 자신들의 비옥한 영지에 처박혀 두문불출하는 인간들이었다. 꼭 전설 속에 나오는 요정들인 양, 신비주의를 고수했다.
그러니까 그 유명한 디아시 가문, 특히 그 직계의 미모는 아무나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저 ‘은발의 디아시’가 도대체 누구인지 다들 궁금해 죽을 지경일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방계 쪽 사람이겠거니 생각하는 정도가 보통 사람의 상상력일 것이다.
‘저게 십수 년 전에 행방불명된 그 ‘노마 디아시’인 걸 알면 뒤집어지겠구나.’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노마는 그 아름다움 하나로 이미 이 거대한 여관을 아주 뒤집어 놓은 모양이다. 다들 핑계 하나씩 마련하는 성의도 없이 대놓고 귀족이 머무는 방 앞을 기웃대질 않나…….
그걸 또 노마는 친절하게 받아 주니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었다. 호기심과 호감으로 가득 찬 소녀 떼의 틈바구니에 있는 노마의 모습은 딱, 소동물에게 둘러싸인 어느 동화의 공주님 꼴이었다.
‘잘 모시랬더니 인형 놀이를 하고 있으면 어쩌냐. 다들 미쳐 버렸군.’
“헉, 가주님. 갑자기, 갑자기 달리시면 이 늙은이가―.”
그때 뒤늦게 엑트라가 도착했다. 그녀 또한 나처럼 뛸 필요 없는 귀부인이고 심지어 나이도 있어, 곧 졸도할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심지어 일사불란하게 짐을 챙겨 문밖으로 도망치던 사용인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며 비틀댔다.
“……가관이군. 누가 내 객을 이딴 식으로 대접하라 했지? 스탕 부인, 다들 돌았나?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군.”
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엑트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휴, 이 주책들아!”
엑트라는 방을 빠져나가는 하녀들의 등짝을 짝짝 때리는 동시에 그들의 도망을 은근히 도왔다. 그러면서 내 눈치까지 보는 걸 잊지 않으니 아주 바빠 보였다.
스탕 부인 엑트라는 다 좋은데 주책이 너무 심했다. 사용인이며 기사들에게 뭐라 말을 흘려 놓았을지 짐작도 안 갔다. 여기에 아랫것들에게 말도 안 되게 관대하니…….
그녀를 타박하려고 입을 벌리는 순간이었다.
“가주님, 잘 주무셨습니까.”
노마가 선수를 쳐 나를 불러 세웠다.
“아, 예. 뭐. ……경께선 간밤에 불편함 없으셨습니까.”
노마가 끼어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평소보다 더 경직된 말투가 튀어 나갔다.
엑트라는 종종 ‘우리 가주님은 맨날 보는 게 우리 같은 늙은이들밖에 없어서 말투가 아주 마흔 먹은 꼰대가 되었다’며 한탄하곤 했다.
엑트라가 나와 노마의 대화에서 뭘 기대했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대번에 실망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녀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듯했다.
정신 차려라, 스탕 부인. 내 장르는 로맨스가 아니니.
“가주께서 신경 써 주신 덕에 편안했습니다.”
인사치레를 하는 노마는 번쩍번쩍 광이 나서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아침부터 뭐, 바로 무도회에 보내도 손색이 없었다.
안 봐도 훤했다. 사용인들이 이것저것 노마에게 대보다가 신나서 아예 함째로 물건들을 들고 와 그를 꾸며 댔을 것이다.
“아니, 이걸 또 다 받아 주고 계셨어요? 귀찮으셨을 텐데 그냥 거절하시지 그랬습니까.”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닙니다, 가주님. 다들 친절했습니다. 물론 제게 너무 과분한 것들을 권해서…….”
노마가 다시 곤란한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지금 두르신 것, 전부 가지셔도 됩니다.”
“네? 이걸 다…….”
“그보다! 얼굴 본 김에 계약에 대해서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 계약은―. 아닙니다, 가주님.”
민망해서 계약을 정리하자는 이야기로 노마의 주의를 분산시켜 보려 했는데 그가 양손을 저으며 거부했다.
“닉스, 그자를 처리하는 일로 매우 바쁘신 것으로 압니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저는 시간이 많으니까요.”
시간이 많다고? 진짜 집 가기 싫은 소년도 아니고…….
“카탐은 처음이라, 창밖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지나갑니다.”
“이 방에만 박혀 있는 것이 뭐가 그렇게 재밌다고 시간이 갑니까.”
잘해 준답시고 노마를 데려온 것이 무색하게 그는 호위 문제로 내내 방에 갇혀 있는 신세였다. 그 사실을 깨달으니 새삼 민망해 나는 인상을 썼다.
“밖은 축제가 한참인 모양인지 창으로 보이는 것이 많습니다. 처음 보는 것도 많고요.”
“그야 건국제가 한참이니까요. 황도야 닉스 때문에 망했지만 다른 도시들은 예년처럼 축제를 즐기고 있겠죠.”
“네, 밤까지 불빛으로 밝습니다. 가주께서도 보셨나요?”
창밖을 바라보며 말하는 투가 퍽 아련하고 복잡해서 나는 입 안을 얕게 깨물었다.
생각해 보면 십수 년 만에 눈을 뜨면 참, 당황스럽긴 하겠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는데 나 빼고 모두 변해 버린 것 아닌가. 어떤 기분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밖이, 궁금하십니까?”
“아…….”
노마의 샛노란 황금빛 눈동자에 찰나의 기대감이 스치는 걸 보자 나는 뚫린 입을 더는 주체하지 못했다.
“……호위를 붙여 드릴 테니, 축제 구경 좀 하고 오시던가요.”
노마가 깜짝 놀라 나를 쳐다봤다. 엑트라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제가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 될 건 또 뭡니까? 여기 가만 앉아서 계속 창밖만 보시게요? 차라리 바깥 구경이나 하면서 바뀐 세상에 적응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내 말을 듣는 내내 노마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다 끝에는 함께 카탐으로 가자고 손을 내밀었던 그때처럼 만개했다.
“…….”
“가주께선, 함께 안 가시나요?”
어쩐지 저 미소에 조금 중독될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노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는…….”
내가 왜 가겠나. 가뜩이나 심란한 데다 얼굴을 알아보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할 일이 많습니다.”
사실 지금 기다리는 일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긴 했다. 더 이상 할 일이 없긴 한데 축제 구경이나 할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아예 그에게서 등을 돌리며 말했다.
며칠 지켜본 바로 노마가 무작정 조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는 간혹 축 처진 귀가 보이는 착각이 드는 표정을 짓곤 했다. 때문에 차라리 아예 안 보는 편이 나았다.
“후드 잘 쓰고 나가시고. 스탕 부인, 디아시 경에게 호위를 붙여 드리게.”
그대로 나가려는데, 다급한 목소리가 나를 불러 세웠다.
“잠시만요, 가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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