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바다 위에 계셔야 할 분이 왜 여기 있으세요?”
에리카가 성가시다는 티를 숨기지 않고 차분하게 따졌다. 매사 능글맞게 빙글거리던 얼굴이 회색으로 질린 꼴을 보자니 사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애가 잔뜩 탄 얼굴이었다.
“내가 직접 가지.”
“가주님이 아시면 이번에야말로 잘리지 않겠습니까. 가주께선 저와 1기사단, 3기사단만 불렀습니다. 가노 님은 당장 자리로 복귀하시죠.”
가주가 부른 적 없는 사람은 꺼지라, 이 말이었다.
“그대도 알다시피 내가 가는 게 가장 안전하잖아. 그리고 그대는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얼굴인데.”
가노가 가슴에 손을 얹고 책상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당당하고 뻔뻔한 태도에 에리카는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따지고 보면 가노는 롬닥의 공동 대표 격인 인물로, 에리카에겐 상사였다. 그러나 가노가 윗사람으로서 위엄을 챙길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 에리카는 가끔 불손한 태도를 보이고는 했다.
“그보다 이거 가주님 직통이라 극비 중 극비인데, 제 정보망도 사찰하세요? 이거 완전 즉결처형감인데요.”
“……그댈 보니 아이사가 무사하긴 한가 보군. 암호문 해석은 도저히 못 하겠더라. 하여간 철저해서. 아이사는 지금 어디 있지?”
가노는 드디어 안심이라도 했는지 와중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뻔뻔하게 암호는 풀지 못했다며 능청을 떨었다.
“가주님이라 부르시죠. 어딜 친한 척 그분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습니까. 그나저나 이 시간에 여기 계시다니 넥타 왕국으로 가는 배에서 뛰어내리시기라도 한 건가요? 설마 배를 돌린 건 아니라고 믿습니다, 가노 님.”
가주 납치 소식을 듣고 펄쩍 놀라 여기까지 달려온 주제에 능글맞은 척하는 것이 고까워, 에리카는 정색하고 말했다. 와중에 저 인간이라면 아이사 일에 배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대는 해적이 물개라도 된다고 믿나 봐? 순진한 구석이 있군. 해적이라고 바다 한가운데에 몸을 던지고 그러진 않아. 당연히 배 돌렸지.”
가노가 어깨를 으쓱하며 의기양양한 투로 말했다. 뭇 여성들이 가노 님! 가노 님! 하고 환호하는 우락부락한 근육이 함께 움직였다.
“가주님이 퍽이나 기뻐하시겠군요. 위약금은 가노 님의 사비로 해결해야 할 겁니다.”
에리카는 머릿속에서 용암 분화구가 터지는 것을 느끼며 침착하게 받아쳤다. 상대는 가주의 사업 파트너이자 동업자, 맥포이의 동맹이었다.
“당연하지. 아이사에게 맞을 각오도 이미 했어. 선발대는 당연히 도그만 경이겠네?”
“가주님께 존칭 제대로 하시라니까요. 예, 그리고 이미 선발대가 출발했으니 가노 님은 얌전히 저지른 일 수습이나 하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만 바다로 꺼지세요, 라는 말은 마음속으로만 했다.
“벌써? 이런, 자네는 너무 유능해서 탈이야.”
“가주님께서 호위로 1, 3기사단을 부르셨고, 대신전에 성기사단을 따로 요청했습니다. 그러니 가노 님은 가 봤자 가주님에게 등짝이나 처맞을 거예요.”
에리카는 되도록 가노를 바다로 다시 돌려놓고 싶었다. 저 인간이 비록 일평생 해적질을 해 오고 예법과 예절, 도덕은 개나 줘 버린 인간이지만 의외로 수완이 좋았다. 특히 제국 외의 거래에서 가노가 손댄 일 중 성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번에 넥타 왕국에 멧을 수출하는 건은 아이사가 꽤 오랫동안 신경 쓴 일이기도 했다. 성공만 하면 어마어마한 이윤을 남기리라.
그런데 그 담당자가 하라는 일은 팽개치고 여기서 생떼를 쓰고 있으니 속이 답답했다.
“뭐? 성기사단? 대신전이라면 질색을 하면서. 성기사단은 왜지?”
“닉스, 그 개자식이 사술을 쓰지 않습니까. 성력을 다뤄야 잡던가 하죠. 그러니 가노 님은 더더욱 쓸모없습니다. 검기로는 닉스를 못 잡아요. 아, 납치범이 닉스인 건 아시죠? 어디까지 아십니까?”
에리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가노의 정보망 규모를 가늠했다.
“건국제에서 맥포이 가주를 납치한 것이 닉스라는 사실은 온 제국민에게 소문이 났을 정도던데. 닉스 쪽에서 자길 알아봐 달라는 듯이 나댔으니 정보망 쓸 필요도 없었어. 그리고 난, 그 종이짝 같은 새끼 잡으러 가는 게 아니야.”
가노의 얼굴은 확실히 며칠 새 상한 티가 났다. 그 얼굴은 납치 소식을 듣고 배에서 여기까지 쉴 틈 없이 달려왔다는 걸 말해 주는 듯했다.
무엇보다, 가노는 정말 화가 났을 때 저렇게 가식을 떨며 웃곤 했다.
“아이사, 우리 조그만 주인님을 찾으러 가는 거지.”
“…….”
‘이젠 숨길 생각도 안 하는군. 저 새끼는 지금 자기 얼굴이 어떤지 아나?’
에리카는 속으로 혀를 쯧, 차며 생각했다.
“……호칭부터 바로 하세요.”
“사실 그대도 내가 호위로 가는 편이 더 마음 편하잖아.”
“가노 님 검기야 제가 잘 알죠. 그 무력으로 바다의 왕 노릇을 하시는 것 아닙니까.”
에리카는 빠르게 인정했다. 가노는 그냥 해적이 아니었다. 해상은 가노의 손바닥 안이었다. 그 권력은 모두 그의 압도적인 무력에서 나왔다.
“내가 맥포이와 손을 잡은 건 그대 가주 때문이야. 맥포이와 동맹을 계속하는가는 가주의 생존에 달렸지. 나는, 맥포이 가주가 살아 있는 꼴을 두 눈으로 봐야겠어.”
가노가 흉흉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읊조렸다. 그나마 아이사가 아끼는 그 에리카의 앞이라 살벌한 제 상태를 숨겼던 것인데 인내심도 이제 한계였다.
에리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곧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가노를 훑어봤다.
뭐, 제 주인이 유독 고귀한 핏줄이라 가노의 혈통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가주님의 ‘연애 대상’으로 나쁘진 않았다.
배 타는 사람이니 그을리긴 했으나 가노는 가는 곳마다 여인네들이 줄지어 따라붙기로 유명한 미남이었다.
시원시원하게 뻗은 이목구비에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칼. 거대하다고 느껴질 만큼 커다란 키에, 터질 듯한 근육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 뭇 여인네의 뜨거운 눈길을 끄는 남자였다. 그 몸뚱이엔 아이사 두 명 정도는 너끈히 가려질 것이다.
으, 다시 봐도 기가 질리는 몸뚱이에 에리카는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우겨 보자면, 가노는 고귀한 피를 타고 나긴 했다. 몰락한 왕조의 사생아라서 그렇지.
그와 인연이 닿은 것은 맥포이의 선대 가주가 가노와 그의 어머니를 의탁해 준 과거가 있었기 때문인데, 가노는 고귀하게 태어나 일평생 해적질하고 산 것치고 드물게 은혜를 갚아 맥포이 재건을 도와주었다. 거기엔 약간의 함정이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대외적인 신분 역시 귀족이긴 했다. 가노는 서부의 지방 귀족 가문을 돈 주고 사들여 가짜 신분을 가지고 있다. 그는 대외적으론 롬닥 상단의 바닷길을 책임지는 상단의 2인자이자, 맥포이의 가신인 것이다.
‘그가 실은 해적이란 건 온 나라 사람이 알지만.’
에리카는 대충 이 정도면 맥포이 가주의 연인으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주님은 상처 하나 없으시다는데, 차라리 아치 도련님께 가는 게 가주님 점수 따기 더 좋을 겁니다.”
‘뭐, 가주께서 알아서 하겠지’라는 생각으로 한 가지 팁을 얹어 주었다. 그러나 가노는 고집이 있었다. 아이사가 멀쩡한지 기어코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에리카 역시 가노와 기 싸움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네 맘대로 하라는 생각으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설마 단신으로 오셨습니까?”
가노가 응, 하고 웃었다.
‘정말 앞뒤를 안 가리는구나.’
에리카는 이마를 싸맸다.
“시모어 님! 급합니다!”
에리카의 비서가 급박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 것은 그때였다.
“대신전에서 사람이 왔습니다만, 디아시 기사단이 동행했습니다. 대신관 자필 서신을 함께 가지고 왔습니다.”
비서가 얼떨떨한 얼굴로 에리카에게 서신을 넘기며 말했다.
아무리 대신전을 앞세웠다고 해도 다른 가문의 기사단이 사전에 허락 없이 남의 영지에 들어온 것은 도발로 볼 수 있었다. 가노가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가노 님. 지금 신성한 가주 집무실에 무장을 하고 들어오신 겁니까? 목이 두 갠가 봅니다.”
가노의 손이 자연스럽게 칼 쪽으로 향하는 걸 본 에리카가 그를 타박했다.
“흐응, 무장 해제할 정신이 없었어. 너무 급해서. 그런데 잘 들고 온 것 같기도 하고?”
가노가 창 바깥을 노려보며 중얼댔다. 에리카는 버릇없는 가노를 잠시 제쳐 두고 빠르게 문서를 읽어 내렸다.
이내 문서를 끝까지 읽은 에리카의 얼굴이 당혹으로 굳었다.
“왜 그래?”
“디아시가 왜……. 어떻게 알고?”
놀란 가노가 다가와 물었지만 에리카는 한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생각할 게 많았다.
“시모어 보좌관님, 그들을 들일까요?”
눈치를 보던 비서가 물었다.
“……들여라. 당장.”
에리카가 인상을 쓴 채 말했다.
서신은 대신관이 보낸 게 아니었다. 디아시 가주, 니콜라스 디아시가 보낸 것이었다.
에리카 시모어는 가주의 전언을 직통 연락을 통해 받았다. 아마 그 누구보다 빠르게 소식을 받았을 것이다. 아이사가 있는 카탐에서 대신전이 더 가깝다하더라도 비슷한 시간에 연락을 받았으면 받았지, 늦게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상황으로 미루어 본다면 누군가 아이사보다 빠르게 대신전과 디아시 가문에게 닉스의 본거지를 알렸다는 건데…….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에리카 시모어는 인상을 쓰며 창밖을 보았다. 본성 높은 곳에 위치한 집무실에서, 도개교가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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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가주님! 일어나셨습니까? 잠자리는 편하셨나요.”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엑트라가 붙여 준 하녀가 웃으며 나를 반겼다.
“그래, 배가 고프구나. 식사는 방에서 하지. 세숫물 먼저, 그리고 식사 전에 스탕 부인 좀 불러와라.”
“예, 가주님.”
나는 하녀가 총총 복도를 가로질러 사라지는 걸 보다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얼마만의 푹신한 침대인가. 카탐 중심부의 고급 여관은 당연히 맥포이 본성의 가주 침실보다는 못하지만 흙바닥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무엇보다 수발들어 주는 자가 있으니 얼마나 편한가.
“…….”
‘생각해 보니 수발드는 자가 없진, 않았지.’
귀하디귀한 디아시의 도련님을 은근 종처럼 부렸으니, 그 노망난 디아시 어르신들이 알면 드디어 나를 죽이려 들 것이다.
나는 키득거리다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일단 에리카랑 대신전에 연락 보냈고. 여기 있는 기사단 쪼개서 정찰도 보냈고. 대신전에 요청하긴 했지만 성력 높은 사람을 또 따로 수배 중이니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했기 때문에 나는 강박적으로 플랜을 더듬고 있었다.
“그래. 괜찮다. 아직까지 계획대로야.”
나는 비장하게 중얼거리다 자연스럽게 창 앞에 섰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늦여름의 미풍을 타고 들려왔다. 따스한 바람이 얼굴을 두드렸다.
나는 따뜻한 햇볕이 카탐 곳곳에 반짝반짝 내리쬐는 풍경을 바라봤다.
평화로워라.
“더럽게 아름다운 세상이군.”
아이사 맥포이는 뒈졌어야 할 세상은 미치도록 눈이 부시고 아름다웠다.
그때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려 상념을 깨뜨렸다.
“스탕 부인, 들어와라.”
스탕 부인은 항상 타이밍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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