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노마가 정말 방랑 기사라면 모를까 그는 ‘디아시’다. 굳이 디아시에게 왕창 빚을 질 필요가 없다.
그 반대라면 모를까!
‘그래, 없지. 노마 디아시와는 여기서 마무리를 짓자.’
노마에게 새 말을 주고, 맥포이의 체면이 있으니 기사를 조금 붙여서 보내자. 후에 가문 대 가문으로 지금까지 도와준 값을 치르자.
맥포이 가주라면 응당 그렇게 한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자, 디아시 경!
“…….”
그런데, 입이 안 떨어졌다.
그렇다면 노마 디아시는 어떤가.
노마는 여태 나만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도낏병이나 착각이 아니라 정말 아련하기 짝이 없는, 주인에게 버림받기 직전인 강아지의 눈빛으로 나만 보고 있었다.
진짜. 도대체 무슨 생각이람.
“……디아시 경.”
“네, 맥포이 가주님.”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한 주제에 목소리는 무척이나 담백해서 조금 혼란스러웠다.
“우리 계약은 카탐까지니까, 카탐까진 함께 가시죠.”
따로 노는 노마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을까. 또 충동적으로 입이 먼저 움직이고 말았다.
충동은 내가 극히 혐오하는 것이다. 근데 내가 그러고 있다니…….
도대체 왜?
옆통수로 엑트라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를 비롯해 다른 이들도 흥미로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나와 노마를 바쁘게 번갈아 봤다.
“제게 호의를 보여 주셨으니 귀빈으로 모시게 해 주세요. 경께선 이틀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고, 또 이대로 단신으로 영지에 돌아가는 것은 제가, 이 아이사 맥포이가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 입 닥쳐 아이사 맥포이! 하고 이성이 비명을 질렀지만 나는 계속 나불거리고 있었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정적으로 그를 설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노마의 얼굴에 항시 장착되어 있는 잔잔한 미소에 균열이 갔다. 그의 입매가 늘어지며 입술이 벌어졌다.
“그러니!”
그 균열에 지지 않고 나는 더 우렁차게 외쳤다.
“저와 함께, 카탐으로 가시죠. 불편함 없이 모시겠습니다, 디아시 경.”
무릎만 안 꿇었지 정중히 뻗어진 오른손은 길이 남을 흑역사가 될 것이다.
같은 순간 엑트라가 고백 장면을 목격한 소녀처럼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렸다. 모두 에구머니! 하는 표정으로 젊은 여가주의 박력 넘치는 구애 아닌 구애를 지켜봤다. 감탄사를 입 밖에 내는 멍청이는 다행히 없었다.
일순 쥐 죽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 이히힝, 푸르릉거리는 말 울음소리를 제외하면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미쳤군. 방금 무슨 개소리를 뱉은 거지?’
이성이 드디어 상황을 따라잡았을 때 노마가 환하게 웃었다. 만개하다 못해 흐드러져 넘치는 꽃처럼, 아주 환하게 말이다.
주변에서 메헤라시여, 하는 감탄이 불시에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노마의 웃음은 없던 신앙심마저 생겨나게 하는 모양이었다.
“…….”
나라고 다르지 않았다. 숨을 죽이고 기쁘다는 듯이 웃고 있는 노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까지 노마 디아시의 웃음은 다 비즈니스였구나. 그게 다 사회생활이었구나. 저 사람은 원래는, 저렇게 웃는구나.
노마의 햇살 웃음에 이성이 도로 가출하고 말았다.
“가주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그사이 노마 디아시가 선수를 쳤다. 아름답게 웃는 남자는 정오의 찬란한 햇빛 아래서 그렇게 말했다.
이걸 어떻게 번복한단 말인가……. 난 못 해. 아무도 못 할걸?
맥포이 가주는 그대로 정정할 타이밍을 영영 놓치고 말았다. 아주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나 들 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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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포이 가주의 보좌관 에리카 시모어는 벌써 일주일째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자기는커녕 머리를 감는 간단한 일조차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의 총기 어린 연녹색 눈동자는 빛을 잃었고, 언제나 단정하게 땋아서 틀어 올리는 연갈색 머리는 며칠째 감지 못해 제대로 떡이 진 상태였다.
그간 에리카 시모어의 젊은 주인, 아이사 맥포이는 얼마나 많은 위협에 시달렸는가. 지금껏 아이사를 향한 납치, 살해, 크고 작은 테러 미수야 셀 수 없었다.
그럼에도 전부 ‘미수’였다. 유능한 맥포이의 종은 절대로 제 주인을 적에게 빼앗긴 적이 없었다.
그러나 뺏기고 말았다. 황제 앞에서, 황실 기사단과 황도 경비병이 어느 때보다 주변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는 그 건국제에서. 그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들은 가주를 빼앗겼다.
이 얼마나 무능한가. 맥포이 기사단장 글렌 도그만 경이 그 자리에서 자결하려던 것을 막으려고 기사 다섯이 들러붙었다. 결국 에리카가 직접 나서 당장 죽겠다는 그를 뜯어말려야 했다.
도그만 경은 선대 가주 시절에 조금 이르게 은퇴한 인물로, 은퇴 후 오랜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대륙 전역을 여행하고 있었다. 그러다 10년 전, ‘그 일’이 터지자 다시 맥포이 기사단에 복귀한 노장 중의 노장, 충신 중의 충신이었다.
‘그날’을 겪은 맥포이라면 누구나 잃는 것을 두려워한다. 늦둥이 딸뻘의 귀한 분이 눈앞에서 납치당했으니 오죽했을까. 그 절망을 에리카는 십분 이해했다.
또한 에리카 시모어는 그 범인을 안다.
닉스다. 10년 전 맥포이에 나타나 맥포이 전체를 갖다 바쳐 알포의 힘을 얻은 그 미친 새끼가 이번엔 가주님을 납치했다.
10년 전 그날, 에리카 역시 자신의 어머니를 제외한 모두를 잃었다. 열여덟, 성년을 맞이해 성년식을 치르러 어머니와 동부에 위치한 성지, 바그다트로 떠나지 않았다면 에리카와 그녀의 어머니 역시 지금쯤 백골이 되었을 것이다.
10년 전 살아남은 맥포이 사람들은 대개 그런 식이었다. 조상신이 도와 그날 영지에 없던 사람들. 에리카 시모어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나마 그녀에겐 어머니가 남았으므로 사정이 조금 나은 편이었다.
에리카는 그렇게 인력난에 시달리는 어린 새 가주의 보좌관이 되었다. 그녀가 배움이 깊고 시대를 앞서간 유학파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보다 마땅히 할 사람이 없었다는 이유가 컸지만 의외로 에리카는 매우 유능한 보좌관이었다. 운이 나쁘기로는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아이사에겐 놀랍게도 그나마 인복, 인재 복이 있었던 것이다.
둔기에 맞아 옆으로 넘어가던 나의 어린 주인, 기괴한 웃음을 짓던 범죄자의 얼굴.
살면서 단 한 번도 닉스를 마주친 적 없지만, 에리카는 눈앞에서 제 주인의 머리를 깨고 흥흥 웃던 미친놈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닉스다.’
단숨에 온몸에 전율이, 소름이 끼쳤다. 죽었다고 판단해 마음을 놓았던 것이 패착이다. 자신은 보좌로서 저 새끼의 시체를 보는 순간까지 긴장을 놓아선 안 되었다.
후회했을 땐 아이사가 우스갯소리로 했던 말이 현실이 된 후였다.
‘누군가 날 해하는 데 성공한다면 닉스 그 개새끼겠지. 만약, 그 미친놈이 정말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깔깔.’
말이 씨가 된다더니. 내 그리 입방정을 주의하라 말씀드렸는데.
하여간 재미없는 그 농담. 제 어린 주인은 또래 친구도 하나 제대로 없어 농담도 더럽게 못했다. 물론 에리카도 또래 친구가 없는 인간이라 더 할 말은 없었다.
몇 년이 잠잠해서 정말 닉스가 뒈진 줄로만 알았다. 아이사도, 에리카도 그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을 조금 잊고 있었다.
이런 후회도 잠시였다. 에리카는 당장 닥친 일을 처리하기 바빴다. 눈앞에서 가주를 빼앗긴 충격에도 그녀는 매우 침착하게 바로 아이사가 만들어 놓은 행동 지침대로 움직였다.
가주 부재 시, 혼란에 빠진 맥포이의 멱살을 잡고 끄는 것이 가주 대리. 그게 바로 수석 보좌관 에리카 시모어였다.
에리카는 아이사가 납치당하자마자 바로 기사단을 쪼개 수색대를 편성해 닉스를 쫓았다. 그리고 자신은 그길로 곧장 맥포이 본성으로 돌아갔다.
가주의 어린 후계자 아치 도련님의 신병을 확보해 안전 가옥에 옮기는 것은 그녀가 정보원을 보내 가장 먼저 처리한 일이었다. 에리카의 어머니인 시모어 부인이 아치 도련님의 유모로서 함께 은신했다.
그리고 롬닥 상단. 상단은 가주가 부재하자 왕국부터 지방 귀족과의 거래까지 모조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지랄 맞은 탐색전을 벌이고 있었다. 아이사 맥포이의 사망이 확인될 시, 그 과정에서 떨어질 떡고물을 누구보다 빨리 주워 먹고 최대 이익을 챙기기 위함이었다.
아이사 맥포이가 그들과 사람 대 사람으로 신뢰와 우정을 쌓아 온 것은 아니니 당연했지만 그렇다고 괘씸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물론 아이사의 사교성이 최악인 것은 어디 가서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짹짹. 포로롱, 짹.
이어지는 정보전과 고도의 기 싸움에, 에리카는 오늘로 6일 밤을 새우고 가주 집무실 책상에서 새 아침을 맞았다. 다크서클이 드디어 턱 끝까지 내려온 그녀는 떠오르는 태양을 노려보다 다음 서류를 집어 들었다.
‘행동 지침에 따르면 오늘 해가 지는 순간, 가주 사망을 전제로 움직여야 한다. 정말 돌아가셨나? 정말 그게 마지막이라고?’
둔기에 맞고 옆으로 쓰러지던 가냘픈 몸을 떠올린 에리카는 거칠게 눈가를 쓸었다.
‘가주님은 이대로 죽는 게 억울하지도 않습니까.’
에리카의 어린 주인은 이대로 죽기엔 인생이 너무 기구했다. 그녀의 주인은 열다섯, 아직 철 덜 든 나이에 떼죽음을 맞은 가문과 영지를 이었다. 함께 구른 에리카가 안타까워할 군번은 아니지만, 그 뒤로 아이사는 쉬어 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그 고생을 한 아이사는 이제야 좀 두 다리 뻗고 쉴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남들이 말하는 행복, 그런 걸 누릴 일만 남아 있었는데…….
‘메헤라가 인간을 사랑하기는. 사랑이 다 얼어 뒈졌다. 이 정도면 가지고 놀려고 인간을 만든 거지.’
에리카는 신성 모독을 되뇌며 다시 벌건 눈으로 서류를 읽어 내렸다.
아이사 맥포이의 방계 혈족 중 유일하게 살아 있는 그녀의 팔촌 오라버니, 게일의 움직임이 불손하다는 보고서를 읽어 내린 순간 에리카는 양손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아악!”
‘이 개놈 자식이 기어이. 데릴사위로 들어갔으면 그 영지에 얌전히 처박혀 있을 것이지!’
하필이면 건들기 쉽지 않은 남부 유력 귀족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게일을 암살하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아, 진짜……. 어디 계세요, 가주.’
방 안이 붉은빛으로 차올랐다. 에리카는 멍하니 창가를 바라봤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못 해 먹겠다.’
이 해가 지면 아이사 맥포이, 제 어린 주인의 사후 플랜으로 넘어가야 했다.
사실 에리카 시모어에게 주군에 대한 뜨거운 충성심과 사랑이 있는 건 또 아니었다. 에리카는 천성이 뜨뜻미지근한 사람이라, 선 긋기로는 제국에서 최고인 사람이었다.
그녀의 감성은 마른 우물이었다. 아이사가 마녀라면 에리카는 귀축으로 통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 역시 겉으로 보기엔 퍽 살갑지 않았다. 남들 보기에 매우 정 없고 사무적인 주종 관계처럼 보였다. 누군가 돈만 준다면 에리카가 아이사를 배신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이는, 그런 무미건조한 사이라 해도 될 듯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남아 맥포이에 남은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둘 사이의 유대는 어쩌면 그 무엇보다 끈끈했다.
에리카는 버티기에 너무 버겁다는 감각을 아주 오랜만에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해가 완전히 지기 직전, 수석 보좌관 직통 연락망이 움직였다. 오직 맥포이 가주만이 에리카 시모어에게 보낼 수 있는 연락책이었다.
그 순간, 에리카는 메헤라를 불렀다.
‘살았다. 살아 있었다. 살았다.’
맥포이가 멸문 직전에 이르렀던 그 사건 이후 에리카는 신앙심을 잃었다. 메헤라가 인간을 사랑한다면 영지 전체가 그렇게 되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믿었다.
메헤라를 증오했다. 그럼에도 가장 먼저 튀어나온 건 ‘메헤라시여!’였다. 신의 도움을 믿을 만큼 극적이었다.
쾅―!
에리카가 때늦은 신앙심에 젖어 있을 때, 집무실을 박차고 예상치 못한 인물이 등장했다.
‘아니지. 이 인간이라면 오히려 늦은 건가?’
“에리카.”
“가노 님.”
에리카가 매우 성가신 표정으로 불청객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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