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
그러나 이때의 나는 노마가 무엇에 쫓기고 있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몰랐다. 당신은 무슨 말을 듣고 싶어서 날 그런 눈으로 보는가.
“죄송합니다. 호위가 되어서 이 모양이라니.”
노마가 내 손을 천천히 놓으며 한 걸음, 두 걸음 물러섰다. 그가 뒷걸음친 곳은 우연히도 달빛이 가장 잘 내려오는 위치였다.
후광을 달고 다니는 노마는 스포트라이트도 따라다니는 남자였다. 달빛 아래에서 비틀거리는 미인을 보고 있자니 화가 잠시 잊혔다. 가련하기 짝이 없어 심장 부근이 꽉 조였다. 연민, 측은지심 따위가 들고 일어섰다.
절로 그 장단에 맞춰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팩 돌아서려 하던 것을 잊고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진짜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어. 난 가진 돈이 너무 많아서 이대로 못 죽습니다. 그저 상대할 가치가 없어서 반응을 안 한 거지.”
하얀빛 아래에 가련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얼굴을 들어 올렸다. 눈이 딱 마주친 순간 알 수 있었다.
‘진짜 이거야?’
방금 내 대답이 100점짜리 정답은 아니어도 한 70점 정도는 맞았다는 사실을.
노마는 내 입에서 ‘죽기 싫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다 죽어 가던 황금색 눈동자가 생기를 찾아 반짝반짝 빛이 나기 시작했다.
모든 걸 다 가진 남자를 누가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놨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달빛은 나를 비추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어둠 속에 숨어 마음껏 흥흥거리며 눈으로 노마를 흉봤다.
‘노마에게 저주를 시전한 오랜 친구라는 놈. 그자와 관련됐겠지.’
<오필리아와 밤>에 이름조차 나오지 않은 그자는 노마를 죽이는 데 실패했을지 몰라도 노마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는 것엔 성공한 듯하다.
‘당신도 옆에 사람 하나 잘못 두었다가 고생이 많군.’
생각해 보니 정말이지 주인공들만 행복한 세상 아닌가. 더럽게 치사했다. 나와 노마 사이에 나만 아는 공감대가 형성된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에 오필리아의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그려지기 전에 머리를 털어 냈다.
“더 말하는 것도 피곤하니 오늘은 그만하고 일단 잡시다. 나는, 아니 저는 여전히 경께 화가 났으니 열 발자국 이상 떨어져 주무세요.”
진심으로 더 이상 화는커녕 대화할 기력도 없어서 손을 훠이훠이 저어 축객령을 내렸다.
“카탐에 도착하면 부디 제게 책임을 물으세요. 한순간의 감정조차 참지 못했으니 저는 더 이상 기사도 아닙니다.”
“당신이 기사가 아니면 제국 기사들은 다 완장을 떼야 할 겁니다.”
노마는 자괴감에 절은 사람처럼 구슬픈 얼굴이나 하고 여전히 달빛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말려 내가 노마 듣기 좋은 말이나 하고 있다는 사실을 퍼뜩 깨달았다.
“헛소리 말고 이제 열 발자국 떨어지세요. 전 잘 겁니다.”
나는 바쁘게 그 그림 같은 장면에서 등을 돌렸다.
‘계속 봤다간 화가 풀리겠어. 무서운 놈이군, 노마 디아시.’
나는 노마의 얼굴을 경계하며 몸소 열 발자국을 떨어져 망토를 깔아 자리를 잡았다. 그러곤 곧 수면에 빠져들었다.
노마 디아시는 그날 밤 쿨쿨 자는 아이사 맥포이의 열 발자국 옆에서 잠시도 잠들지 못했다.
그는 우거진 나무에 가려진 밤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다, 등을 보이고 잠든 아이사를 돌아봤다. 자신이 모자라 오늘도 저 레이디가 노숙을 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죄책감과 자기혐오가 스멀거리며 뿌리를 키웠다.
아이사가 깊게 잠들자 노마는 제 망토를 벗어 들고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정말 죽은 듯이 자고 있어서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숨을 죽이고 그녀의 숨소리와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맥포이 가주, 아이사 맥포이. 그녀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숨을 쉬는 그녀 옆에 있어야 노마는 자신이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어리석은 노마 디아시.’
노마는 겁쟁이처럼 구는 자신을 마주하고 또다시 자괴감을 느꼈다. 불편하게 잠자리에 든 그녀를 보고 있자니 자신이 이렇게나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매 순간 확인받는 것만 같았다.
그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잠든 아이사에게 자신의 후드를 덮어 주었다.
“…….”
아이사는 정말 미동 없이 잘도 잤다. 기척을 숨기고 아이사를 내려다보던 노마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풀벌레 소리와 바람에 풀과 들꽃, 나뭇잎이 우수수 흘러가는 소리만 가득했다. 지나치게 평화로우니 상념에 빠지기도 쉬웠다.
“그 나대는 계집, 그냥 확 뒈져 버렸으면 좋겠어!”
“죽어라.”
“죽어 버렸으면.”
무례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 아이사를 두고 했던 폭언이 노마의 머릿속에 되풀이되었다.
누군가 머리에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괴로웠다. 울렁임을 느꼈다. 식은땀이 송골송골 배어 나왔다. 호흡이 빨라졌다. 노마는 마른세수를 하며 호흡했다.
“그 나대는 계집, 그냥 확 뒈져 버렸으면 좋겠어!”
노마의 귀에 대고 울리는 목소리는 점점, 아주 익숙한 목소리로 바뀌었다.
“죽어.”
“죽어, 노마.”
“노마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그 목소리는 마침내 이고의 목소리가 되어 울리기 시작했다.
“이고. 그만.”
아름다운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노마는 번쩍 눈을 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그곳이 아니었다. 눈앞엔 자신을 깨운 그녀가 잠들어 있고 풀과 꽃, 우거진 나무와 달이 보였다. 가만 귀를 기울이면 그녀의 숨소리와 심장 소리가 들린다.
노마는 조금씩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귀에 대고 저주처럼 속삭이는 이고의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괜찮았다. 살아 숨 쉬는 그녀가 옆에 있어 노마는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아주 조금만, 조금만 더 그녀 가까이 있고 싶었다.
‘그녀가 열 발자국 떨어져 있으라 했는데.’
눈을 뜨고 내내 혼자였더라면, 노마는 부끄럽게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사 말처럼 정말 미친놈이 되어 버렸을 거다. 정말로 죽어 버렸을지도 몰랐다.
“약속을 어겨 미안합니다. 아주 조금만, 잠시만 옆에 있을게요.”
노마는 어둠 속에서 잠든 아이사만 바라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게 밤을 지새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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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 삭신이야.’
눈을 뜸과 동시에 어젯밤에 어물쩍 풀려 가던 화가 다시 솟구쳤다. 온몸이 쑤셨기 때문이다. 나는 성을 내며 몸을 일으키다가 내 몸에 덮인 노마의 망토를 발견했다. 솟아오르던 분노가 멈칫했다.
“…….”
그렇다고 삭신의 고통이 없어지는 건 아니라 화가 아주 사라진 건 아니었다. 끝없이 오르다 멈춘 정도였다. 나는 높은 혈압을 유지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래도 눈을 뜨자마자 마주친 게 오늘도 번쩍번쩍거리는 노마의 얼굴이라는 사실은 썩 나쁘진 않았다. 노마는 언제 일어난 것인지 말에게 물과 풀 따위를 먹이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화가 났으니 예의상 잘 주무셨냐고 묻는 노마를 빤히 보다 풀 바닥에서 퍽이나 잘 주무셨겠습니다, 하고 정색을 했다. 내 냉담함에 그는 조금 풀이 죽은 듯했지만 꿋꿋하게 웃어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괴롭힐 맛이 안 났다.
숲을 빠져나와 카탐으로 향하는 방향을 찾기 위해 조금 헤맨 것을 빼면 그 뒤는 또 순조로웠다. 노마는 이동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 드디어 카탐의 성채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 열려 있는 도개교로 수레와 마차, 말, 사람이 오가는 게 점으로 보였다.
노마가 말에 박차를 가했다. 푸르릉, 이틀을 내내 혹사당한 말은 마음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때마침 기다란 상단 행렬이 앞서가고 있었다. 그 상단 행렬을 따라잡았을 때, 나는 기쁨의 비명을 내질렀다. 자색 깃발, 은사로 기운 연꽃을 품은 태양은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어제의 생고생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기나긴 상단 행렬의 주인공은 맥포이의 롬닥, 나의 롬닥이었다.
“멈춰라!”
나는 용맹한 목소리로 행렬을 세웠다. 행렬을 켜켜이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경계를 갖추었다.
그들은 과거엔 어느 용병단이었으나 맥포이 가주와 주종을 맺어 날치기로 기사 서임을 받아 신분 상승을 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현재 그들은 상단을 호위하는 임무를 받은 부대 중 하나였다.
‘음, 누가 뽑았는지 대열이 아주 믿음직스럽군.’
나는 불시에 감사를 나온 상사의 마음이 되어 와중에 흡족함을 느꼈다. 물론 이들은 말단 중의 말단이기 때문에 주인 된 자의 얼굴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마차에 타고 있는 중간 관리자는 내 얼굴을 알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주요 관리자의 이름을 모조리 꿰고 있었기 때문에 마차에 누가 탔을지 잘 알았다.
중앙에서 카탐을 연결하는 관리자는―.
“스탕은 나오라. 나 아이사 맥포이다!”
맥포이의 새로운 가신 가문, ‘스탕’의 안주인 ‘엑트라 스탕’ 되겠다.
내 얼굴, 내 목소리를 아는 엑트라는 마차에서 펄쩍 뛰어나왔다.
“아이고, 가주님!”
엑트라가 펑펑 울면서 나를 향해 달렸다. 드디어 아는 얼굴과 마주치자 나 또한 울컥하긴 했다. 나는 노마의 도움을 받아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가주님!”
“오랜만이군. 그만 울게, 나 바쁘네. 할 게 많아.”
“가주님! 저희는 정말, 정말 가주께서 잘못되신 줄 알고……. 아니, 꼴은 또 그게 무슨! 제 정신 좀 봐요, 시모어 보좌관은 압니까? 이 늙은이 제 명에 못 삽니다.”
“자넨 별로 늙지도 않았으면서 언제나 그 소리군. 안 그래도 그쪽에 연락해야 하니 그만 울고 어서 다시 움직이게. 설명할 시간이 없어.”
닷새 사이 맥포이 가주 사망이 기정사실화라도 된 모양인지 행렬이 눈에 띄게 술렁거렸다.
“빠르게 움직이지.”
“예! 가주님. 어서 마차에 오르시지요.”
나는 습관처럼 혀를 차고 엑트라를 지나쳐 자연스럽게 상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엑트라가 사뭇 비장한 얼굴을 하고 뒤따랐다.
“그, 그런데 가주님.”
그때 엑트라가 다급히 나를 불러 세웠다.
“바쁘대도!”
“저 기사님은 누구십니까?”
“엉?”
엑트라가 망토로 전신을 가린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노마 디아시. 그를 깜빡할 뻔했다.
여름 끝자락이라지만 대낮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고 있는 노마 디아시는 상당히 수상해 보였다. 엑트라가 괴한을 보듯이 노마를 훑었다.
“……내 은인이다.”
“은인이요?”
“디아시 경, 후드 벗으셔도 됩니다.”
노마가 후드를 내리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역시.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저 얼굴은 취향과 상관없이 사람을 홀리는 것이 확실하다.’
넋을 놓은 사람들에게 공감하며 속으로 혼자 끌끌 웃었다. 그러다 어떤 생각이 스쳤다.
나는 정색을 하고 노마를 돌아봤다. 햇빛을 받아 대단한 광채를 뽐내고 있는 그와 어렵지 않게 눈이 마주쳤다.
‘카탐에 도착하기 전에 롬닥 상단과 만났을 때, 우리 계약은 어떻게 되는 거지?’
계약에 이런 상황에 대한 내용은 없다. 이런 운은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대로 헤어지나?’
그게 이상적이긴 하다. 나는 롬닥 상단과 함께 이대로 카탐으로 가면 된다. 상단에 딸린 기사단이 있으므로 노마의 호위도 더 이상 필요 없다.
보상 문제 또한 가문 대 가문으로, 후에 정식으로 공문을 보내는 편이 더 귀족적이기도 했다.
더 이상 노마와 함께할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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