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노마 정도 검기를 다루는 인물이면 엄지만 가지고도 충분히 여러 명을 순식간에 죽일 수 있었다. 지금 노마 앞에 놓인 포크와 수저가 그에겐 엄청난 살상 무기라는 소리였다.
“아치, 나 좀 봐요. 이봐요.”
나는 급한 대로 포크와 수저를 치우며 간절하게 노마를 불렀다.
그때, 턱! 하고 테이블에 웬 불어 터진 족발 같은 손이 얹어졌다.
“이것들이, 내가 누군 줄 알고! 뒈지고 싶어서 작정을, 헉, 컥!”
“노, 아니지! 아치!”
테이블에 족발이 얹어진 순간 노마가 움직였다. 동시에 나 또한 노마를 불렀지만 그가 훨씬 빨랐다.
지방이 두툼하게 감싸고 있는 얼굴과 목이 노마의 커다란 손에 반죽처럼 잡혔다. 그 손아귀에서 으드득, 우그러지는 기괴한 소리가 났다.
“그만! 뭐 하는, 이 씨!”
기겁하는 나의 비명과 함께 노마가 그대로 뚱뚱한 남자를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거기서 멈췄다면 수습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노, 아니 아치. 아치! 아치 네 이 녀석을 정말!”
노마는 그대로 주정뱅이들의 테이블로 빛처럼 날아올랐다. 경이로운 움직임이었지만 나는 아득함만 느꼈다.
아치라고 백날 불러도 들은 척도 안 했다. 와중에 내 눈동자 색을 처음 걸고넘어졌던 놈의 목이 노마에게 붙잡혔다. 솥뚜껑처럼 크고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 아래에서 그 목이 기이하게 비틀렸다.
‘시체는 안 된다! 이 미친놈아!’
“노오마아악!”
그 목이 비틀리다 못해 꺾이기 직전, 나는 분노의 비명을 내질렀다. 난 목청이 큰 편이고 여자치고 목소리가 낮았다. 그럴듯한 사자후를 지를 수 있는 몇 없는 귀족 여성일 것이다.
노마를 멈출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그저 통제를 벗어난 상황에 매우 분노해 사자후가 나간 것일 뿐.
그러나 의외로 노마가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날래게 식당 중앙으로 이동하는 사이 후드가 벗겨졌는지 식당의 노란 조명 아래로 노마의 밝은 뒤통수가 드러나 있었다.
여전히 남의 목을 쥔 노마가 천천히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의 옆얼굴이 보였다.
그러나 시선은 나를 향하지 않은 채였다. 그는 또다시 어딘지 모를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노마의 손에 잡힌 남자가 발버둥 끝에 게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노마. 내려, 놓으세요.”
너무 화가 나서 목소리가 다 떨렸다.
“그만. 내려놓으세요. 노마, 이 미친놈. 뭘 보고 있는지 몰라도 현실은 내 쪽이야. 나를 봐.”
이 미친놈아. 엄청나게 화난 날 보라고.
나는 살벌한 표정을 하고 노마를 불렀다. 그때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끼에에에엑!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모든 일이 어? 하는 찰나 일어나는 바람에 반응이 느리기 짝이 없었다.
여관 주인이고 식당 일손이고 손님이고 괴물을 마주친 사람들처럼 문을 향해 뛰거나, 다리에 힘이 풀려 엉덩이로 뒷걸음을 쳤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건 바닥에 얼굴을 박고 기절한―혹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뚱뚱한 남자와 노마의 손아귀에 붙잡혀 거품을 물고 있는―곧 죽을지도 모르는― 목소리 큰 남자뿐이었다.
“…….”
가관이었다. 아비규환이 한눈에 보이는 명당자리에 서서 나는 분노를 키웠다. 노마가 이렇게 화려하게 일을 저질러 주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피곤했다. 충분히, 한계였다.
그놈의 옛 의자매 때문에 불구대천의 원수에게 납치당한 것도.
이 세계가 한낱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는 것도.
내가 오필리아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격 나쁜 조연이라는 것도.
죽음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났다는 것도.
어떻게든 살아 보겠답시고 하루 종일 말 타고 이동하는 것도.
조용히 밥 먹으러 왔다가 나 죽으라고 저주하는 말을 듣는 것도.
나는 이미 한참 전에 한계였다.
“노마. 당신이 이러지 않아도.”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찬찬히 둘러본 나는 다시 노마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충분히 힘들다고.’
뚱뚱한 남자를 사뿐히 밟고 지나 노마를 향해 걸었다.
“노마 디아시. 당신, 계약 어겼어.”
나는 노마 디아시의 멱살을 억세게 잡아당기며 말했다. 온 힘을 다해 끌어당겼지만 노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옷깃만 당겨졌을 뿐이었다. 이런 것 하나까지 내 마음대로 안 되다니 열불이 났다.
우리 계약엔 이런 세부 조항이 있다.
‘카탐까지 가는 동안, 갑은 아이사 맥포이다.’
‘행동 결정권은 갑이 가진다.’
이에 또다시 세부적인 조건들이 붙지만, 간단한 예시로 아이사가 ‘그만!’이라고 하면 노마는 그만해야 했다. 아주 간단하지 않은가!
나는 계약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을 아주 싫어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 명령에 즉시 따르지 않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전형적인 꼰대 기질을 가지고 있다. 거대한 가문과 상단의 대가리로 10년을 군림했으니 어쩔 수 없다.
특히나 이 경우 내 목숨이 경각에 달린 계약이었다. 나는 다른 때보다 예민했다.
노마가 잡힌 옷깃을 따라 내 쪽으로 부자연스럽게 얼굴을 돌렸다. 그의 아름다운 눈에 그제야 내가 그득 들어차더라. 총기를 잃었던 눈에 제정신이 스치자 나는 더욱 거칠게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제 내가 좀 보이나?”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으르렁거렸고, 노마는 눈동자를 떨며 몸에 힘을 풀었다. 노마의 손에 힘이 풀리자 그 손아귀에 잡혔던 남자는 그대로 풀썩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나는 그대로 노마의 멱살을 휘어잡고 여관을 빠져나갔다. 그러곤 여관 마구간에서 말만 챙겨 도망치듯이 마을을 빠져나갔다.
멀리서 마을에 위급 상황을 알리는 고동 소리가 들렸다. 한발 빠르게 여관을 빠져나간 누군가가 그새 마을 치안 기사단에 괴한이 있다고 꼰지른 듯했다.
‘X발!’
자제하던 쌍욕이 마구 튀어나왔다. 나는 한 손엔 노마의 멱살, 한 손엔 말고삐를 쥐고 빠르게 튀었다.
가로로 보나 세로로 보나 쫓기는 신세가 되니 여기서 더 오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혈압이 올랐다. 정점을 찍은 분노에 뒷골이 띵하고 울렸다.
* * *
harbaragi_syk
사람이 다니는 길을 피해 우거진 숲으로 최대한 깊숙이 들어갔다. 숲의 그림자 속에 완전히 몸을 숨기고 나서야 일단 도주를 멈출 수 있었다.
여름이 덜 가신 밤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는 후드를 쓰고 열나게 움직였으니 온몸엔 땀이 줄줄 흘렀다. 누적된 피로에 찝찝함이 더해지니 화가 가라앉을 새가 없었다.
‘카탐에 도착하면 계약 조건 불이행으로 위자료를 잔뜩 뜯어 버리겠어.’
나는 이를 바득 갈았다.
“가주님,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제가…….”
그때 머뭇거리던 노마가 내 쪽을 향해 손을 뻗으며 정적을 깼다. 나는 홱 몸을 돌려 버렸다.
“멀리 떨어져요. 내가 지금 화가 굉장히 나서 욕을 한 바가지 할 것 같으니까. 고아하신 디아시 공자는 저급한 말들을 못 버티잖아요. 안 그래요?”
최대한 음량과 성질을 죽이고 한껏 비꼬아 말했다. 그러나 한마디를 하니 분노와 서러움이 차올라 다음 마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팩 다시 몸을 돌려 노마를 마주했다.
“내가 말했지, 침대에서 자고 싶다고! 피곤해 죽겠다고! 안 그래도 심란한데 아주 고오오맙네, X발!”
내 적나라한 욕설에 노마가 멈칫했다. 나무 사이사이로 쏟아진 달빛에 그의 눈동자가 자르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뭐가 그렇게 힘들었는데? 그게 뭐 당신한테 한 소리예요? 나보고 창녀네, 죽으라네 하는 걸 당신이 뭔데 나서!”
“가주―.”
노마의 얼굴이 일순 아프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노마가 슬프든 기쁘든 알 바 아니었다.
“계약대로만 하라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지? 이봐요, 노마 디아시.”
나는 박력 있는 걸음으로 노마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겨우 노마 어깨에 차는 키 때문에 장렬하게 올려다봐야 했지만 지금껏 검기가 없어도 기 싸움에서 진 적은 없었다.
“당신이 저 지하에서 십수 년 자고 있을 때, 나는 10년을 이 바깥에서 살아남아 보려고 별 짓거리를 다 하고 살았어요.”
“…….”
“아까 그 양아치 새끼들이 지껄인 게 대부분 맞다고. 나는 술을 파는 귀족의 수치이고, 더 이상 맥포이에 검을 바치는 기사가 없어 용병과 해적을 부렸습니다!”
새삼스러운 자기소개였다. 내 인생은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른다. 선택지는 언제나 좁았고 상황은 언제나 극한이었다.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귀족의 품위고 명예가 밥 먹여 줍니까? 날 지켜 줘요? 내 가문을 지켜 줍니까? 난 명예를 버린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습니다. 명예가 하수구 바닥을 흐르든 말든 상관없다고요. 근데 당신이 왜 지랄이야!”
그래서 나는 마녀, 요부, 창녀로 불리길 택했다. 이것들은 내가 그 진창에서 살아남았기에 따라온 것이다. 저딴 호칭 따위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다. 근데 당신은 그걸 잠시도 못 참아서 이 지랄을 만들어?
“창부를 데리고 다니는 나리 취급이 그리 싫었나? 잠시도 못 참아? 그렇게 비위가 상했나! 비위가 왜 그 정도야, 엉?”
말을 하다 보니 노마가 더욱 괘씸했다.
“안 그래도 뒈질 것 같은데 왜 당신까지 이 모양이야!”
나는 온갖 감정을 실어 노마를 노려보다 다시 팩 등을 돌려 버렸다. 꼴도 보기 싫어서 그대로 잠시 거리를 둘 작정으로 발을 떼려고 할 때였다.
“그게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에요.”
여전히 신체 접촉 기준이 이상한 노마가 내 손을 붙드는 바람에 그대로 발이 묶였다.
“아, 놔요.”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노마는 꽈아악 잡은 손을 놓아 주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서 다시 그에게 한 소리 하기 위해 몸을 돌리려는데 노마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죽으라는 말을, 죽으라고 하는 말을 그저 듣고 있는 당신을.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걸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어요, 가주님.”
“…….”
나는 마저 몸을 틀어 노마를 올려다봤다. 달빛이 구름 사이로 숨어 버렸는지 어느새 사위가 새카맸다. 노마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죽음. 죽음. 죽음.
사실 확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평소답지 않게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야 나는 지금 죽음에 쫓기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다면 노마는 왜 나 죽으라는 말에 이성을 잃었나.
“죽기 싫다, 그렇게 말하셨습니다. 아닙니까?”
노마는 정해진 답을 갈구하는 사람처럼 다급히 물었다.
“그게 지금 무슨 상관―.”
힘주어 내 손을 붙잡은 노마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어서 나는 입을 닫았다.
구름에 숨었던 달이 나타나 노마를 비추었다. 창백히 질린 노마의 얼굴이 찬찬히 드러났다. 식은땀이 고인 흰 이마가. 절박하게 무언갈 찾는 눈동자가. 어딘가 찔린 듯한 표정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이런―.
어쩐지 그가 바라는 말을 해 주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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