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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드 엔딩 후에-13화 (13/139)

13.

이 어린놈의 새끼가.

물론 내가 사고를 쳤어도 저만한 애는 없겠지만 한참 어린놈이 못 하는 말이 없었다. 혈압이 아주 조금, 상승하는 기분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내 앞에 놓인 멧이나 들이켰다.

참자. 상대는 아치보다 조금 더 커.

목구멍을 타고 시원한 탄산이 튀자 혈압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나저나 이래서 서부를 못 벗어나게 한 모양이군.’

에리카나 가신들이 한사코 서부 외 잠행을 말렸던 이유가 이 때문인 듯했다. 어쩐지 서부를 조금만 벗어나면 무조건 영주 성에만 처박혀 있게 하더라.

‘이딴 건 평생 겪은 기상천외한 수모들에 비하면 별것도 아닌데 말이지.’

물론 가신들 입장에선 아직도 저런 개소리가 정설처럼 떠도는 것이나, 그 개소리가 기어코 가주의 귀에 들어가는 것이 면이 서지 않기는 할 것이다.

맥포이의 입김이 세고 맥포이 덕에 풍요로운 서부는 ‘아이사 맥포이’를 서부를 부흥시킨 여장부로 여긴다. 거대한 제국 땅에서 서부를 주름잡는 맥포이의 가주는 서부의 왕과 같았다.

그러나 그 외 제국인들은 아이사 맥포이를 저주를 부려 가주가 된 마녀나 몸을 팔아 가문을 재건한 창부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잘나가는 옆 나라의 여왕처럼, 풍문으로만 들어 본 존재를 욕하는 것이야 그들에겐 단순히 유흥이었다.

대귀족이 제 이름을 앞세워 장사를 하고 그 주 품목이 술이라는 점에서 귀족의 수치라는 건 나도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바였다. 법이 금지하진 않았지만 귀족 안에서의 룰이 그랬다. 너무나 당연한 진리라 법으로 쓰여 있지 않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제국에 악명을 떨친 것은 결국 내 선택이었다. 그러나 결국엔 악명도 명성이었다. 악명이 자자한 맥포이 가주는 누구도 쉽게 건들 수 없다.

나는 그렇게 힘을 키웠다. 내 힘은 그런 것이다.

평판이 바닥이라는 것이나 저런 희롱조의 쌍욕에 일일이 상처받기에 맥포이 가주는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

그러나 노마는 아니었나 보다.

‘저 인간은 또 왜 저래.’

소년이 내 면전에 대고 홀린 듯이 ‘창부’라고 지껄이자 항시 상승 곡선을 그리던 노마의 입매가 일자로 무섭게 굳었다.

아니, 그 전부터인가. 꽃을 풀풀 뿌리고 다니는 사람이 정색을 하니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그 변화에 주목했다.

‘곱게 자란 성기사님에겐 너무 난잡한 단어들이었나 보구나!’

그러거나 말거나 멍청한 주정뱅이들은 맥포이 가주의 별명을 퀴즈 맞히듯이 하나씩 불러 젖히더니, 이내 그 품행에 대해 큰 목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시골 양아치 수준답게 내용은 더러웠다.

오늘의 안줏거리가 정해지자 놈팡이들은 앞다투어 자신이 알고 있는 맥포이 가주 ‘계집’에 대해 신나게 입을 털기 시작했다.

불편해도 후드 쓰고 있을걸. 후회할 땐 늦었다.

으레 소문이란 것이 한 사람 한 사람을 거칠수록 자극적으로 뻥튀기되기 마련이라,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소문들의 변형이었다. 거기에 폭력성과 수위가 한껏 올라갔다.

개중엔 나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 분명한 묘사도 섞여 있었다. ‘맥포이 가주는 키가 남자보다 큰 꺽다리’라는 부분부터 그 목격담은 거짓부렁이라는 것이 확정되었다.

내 키는 제국 여성의 평균보다 조금, 아주 조금 작았다. ‘조금 작은 키’는 내 작은 콤플렉스였다.

어쨌든 양아치들의 입에서 나오는 음담패설은 노마의 사전엔 오를 수 없는 것들이 분명해 보였다. 노마는 무차별적인 음담패설의 폭격 속에서 몇 번 황망히 입술을 벌렸다 닫길 반복했다.

“저게 지금 당신을 두고 하는 소리가 맞습니까?”

결국 노마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대단히 침착했지만 평소와 결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가라앉은 목소리는 어쩐지 화가 난 것만 같아서, 나는 노마의 굳은 입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뒤통수가 서늘한 것이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뭐, 마녀나 창부……. 전부 절 말하는 게 맞습니다. 제 평판이 원래 안 좋습니다. 저들은 제가 본인이라곤 생각하지 못하니 저러는 것이죠.”

나는 부러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으나 노마는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게 사람을 좀 불안하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설마 저런 도발에 넘어가는 건 아니죠? 분명 기사도 따위는 집어치우라고 했습니다. 여긴 황도 귀족 저택의 무도회장이 아니라 그저 후미진 술집입니다. 나라님은 물론 귀족 욕하는 건 아주 당연합니다.”

“도가 지나칩니다.”

“저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니 신경 끄세요. 저들의 재미 뺏지 말고 못 들은 척하시란 말입니다.”

“…….”

이틀간 겪은 노마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대신 불리할 때는 말을 굉장히 아끼거나 침묵으로 대신했다. 이번엔 침묵을 택한 모양이었다.

얼씨구, 뭐 하자는 거지? 나는 눈썹을 치켜뜨고 그를 주시했다.

노마는 명예와 평판, 긍지로 사는 디아시이니 일단은 같은 귀족이, 보호 중인 레이디가 저런 욕설과 희롱의 대상이라는 것에 어지러움을 느낀 듯했다.

‘그런데 뭐. 불쾌하면 어쩔 거야. 결투 신청이라도 하게? 누가 보면 당신 욕인 줄 알겠어.’

타이밍 좋게 아까 그 건방진 소년이 음식을 날랐다. 오리 다리 요리가 제법 맛있는 냄새를 풍겼다.

“여관은 여기뿐인 거 몰라요? 저는 오늘은 침대에서 자고 싶거든요. 저런 같잖은 도발은, 넘어가 주는 것도 쪽팔립니다. 그러니 밥만 먹고 조용히 올라가 쉽시다.”

소년이 저만치 물러간 후에 나는 속사포로 하고픈 말을 뱉어 냈다.

“귀족들이 하는 일이 뭔가! 그런 요부가 대귀족이랍시고 가문을 이끌고 있는 꼴이라니, 어? 내가 해도 고 계집년보단 품위 있고 교양 있겠다아―, 이거야!”

“할 줄 아는 게 해적에게 아양 떠는 것밖에 없는 어린 계집이 가문의 수장이라니! 맥포이도 쪽팔리겠군!”

하지만 내 은밀한 목소리는 양아치들의 주정에 대부분 묻히고 말았다.

그럼에도 노마에겐 다 들렸을 것이다. 저 인간은 성력을 다루는 동시에 ‘검기’를 다루는 성기사이다. 신체 기능이 평범한 사람과 달랐다.

“…….”

“…….”

대답 안 하냐?

나는 순간 땡깡을 부리기 직전의 아치를 마주한 것만 같은 아찔함을 느꼈다. 잠시 아치라고 부르기로 했다지만 왜 자꾸 한 똥고집 하는 우리 아치와 자꾸 겹쳐 보이는지.

……왜긴. 노마가 은근히 말 안 듣는 똥고집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 일단 후퇴였다. 적어도 잠은 편하게 자야지. 무엇보다 기어코 여기서 밥을 먹었다간 내가 아니라 노마가 체할 것 같았다.

“번거롭지만 그냥 방에 올라가서 식사하…….”

“그런 것도 귀족이라고! 황제 폐하는 뭐 하나! 메헤라 신은 뭐 하나!”

“그 나대는 계집, 그냥 확 뒈져 버렸으면 좋겠어!”

나는 순간, 하던 말을 잊고 말았다.

죽어라, 뒈져라. 거드는 목소리와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눈앞이 순식간에 검어지는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노마의 반응을 보지 못했다.

맥포이의 가주는 제국 유명 인사에 가십의 중심이다. 온갖 망측하고 해괴한 소문, 조롱, 욕설이 나를 따라다녔다. 그러니 죽어라, 뒈져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실제로 손에 피를 많이 묻혀 살아남아 왔다. 면전에 대고 죽으라느니 뒈지라느니 그런 말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들어 봤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게 원한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뒈져라 맥포이 가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엔 타이밍이 안 좋았다.

안 그래도 죽음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한테 면전에 대고 죽으라고 굿을 하니 기분이 아주, 개같았다. 얼굴이 막을 수 없이 와작 일그러졌다.

“그래서, 도도한 척하는 저 아가씨는 저 얼굴 가린 나리를 따라다니는 창부인가! 으하하핫!”

“놀리지 말게! 울어 버리면 자네가 책임질 건가? 우하하!”

때마침 안줏거리가 저들 바로 눈앞에 있는 나로 바뀌었다.

“아가씨! 그 곱고 하얀 얼굴, 우리도 좀 구경하게 여기 좀 돌아봐 주시오! 응?”

박수 소리와 휘파람이 터져 나왔다. 지들만 재밌는 농담이고 장난이었다. 재수 없었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그냥 올라가죠.”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다. 맹세코 더러워서 피하는 거다. 죽어라 뒈져라가 조금 치명타였지만 무시로 대응하는 편이 나았다.

“나리! 나리는 좋겠소! 곱디고운 어린 계집을 데리고 여행이나 다니고 말이야! 어디, 후드 좀 벗어 보쇼. 척 보니 몸도 좋구만 그래.”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이번엔 노마였다.

주정뱅이들의 상태가 내 생각보다 심각했다. 사리 분별 불가. 딱 봐도 무인의 덩치인 노마를 건들다니 패기만큼은 놀라울 정도였다. 안타깝게도 술김이라 가치가 없지만.

나는 그제야 다시 노마를 봤다. 자리에서 일어나길 종용하기 위해서였다.

“…….”

그런데 노마의 상태가 이상했다. 아까부터 내내 고집스럽게 침묵하던 그는 급기야 고개를 조금 숙인 채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왜지? 그렇게 역겨운 말들이었던가? 그러나 저 모습은 비위가 상했다기보단 오히려…….

‘맙소사.’

순간 상위 포식자를 마주할 때나 느낄 소름 같은 것이 전신에 끼쳤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구나, 당신.’

노마에게서 살벌한 검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문제는 노마 스스로 그것을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다는 부분이다.

동시에 옆 시야로 뚱뚱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이쪽을 향해 서는 것이 들어왔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남자는 무거워 보이는 다리를 들어 용케도 한 걸음을 디뎠다.

“어엉! 지금 우리 말을 계속 무시하는 거요! 응? 친절하게 말도 걸어 줬건만!”

삿대질을 하면서 침을 튀겨 가며 다시 한 걸음.

‘오지 마, 이 돼지 새끼. 공기를 읽어라.’

그러나 다시 한 걸음.

‘멧 통에 빠져 뒈져도 모를 놈.’

사람은 술에 취하면 용감해진다. 온 감각이 무뎌져서 그렇다. 그리고 용기는 생각보다 일상생활에 필요하지 않았다. 인간이라면 응당 자신의 주제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나 신체 능력의 차이가 천차만별인, 계급 사회에선 더더욱 제 주제를 알아야 한다.

저 살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아장아장 다가오다니 당장 죽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아치. 집어넣어요.”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물론 저 주정뱅이들의 편을 들어 준 것은 아니다. 이 여관에서 소란을 피워 쫓겨나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나는 이 밤, 침대를 원할 뿐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최소 보름 최대 달포. 마을 치안 기사단에게 쫓기거나 붙잡혀 시간을 낭비할 새가 없었다.

“아치.”

언뜻 후드 사이로 금안과 마주쳤다. 그늘진 눈동자는 동공이 다 죽어 있었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노마에겐 지금 내가 안 보인다. 안중에도 없었다. 뭔지는 몰라도 무언가 노마를 건든 것이 분명했다.

노마의 기척이 불안정했다. 몹시 흉흉했다.

‘갑자기 왜 상태가 저렇게 된 거지?’

그러나 당장 왜인지를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검기 쓰는 자가 저렇게 눈이 돌면 곤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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