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손바닥만 한 툴레를 떠나기 직전, 나를 새댁이라고 부르는 노부인이 인심 좋게 물주머니와 육포 몇 덩이를 챙겨 주며 배웅을 나왔다.
노부인은 끝내 나를 붙들고 친밀하게 굴더니 마지막엔 내 귀에 대고 이런 말을 남겼다.
“아기 같은 새댁, 괜찮아. 겁낼 것 없어. 눈이 돌아 버려서 같이 도망가고 싶은 사람은 평생에 한 명 나타날까 말까야. 잘 도망쳤어.”
“……부인, 우린 도망치는 게―.”
“한때의 치기라고? 불꽃이 튀는 상대는 두 번은 없어. 이 늙은이가 다 해 봐서 알아. 잘생기고 조신한 게 최고야. 새댁은 행복할 거야. 이 노인의 말을 믿어 봐.”
노부인은 마음씨 좋은 사람처럼 후후 웃었고, 나는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말았다.
아기 같은 새댁은 개뿔! 행복은 얼어 죽을!
* * *
harbaragi_syk
함께 말에 오르는 건 생각보다 더 민망한 일이다.
물론 각자 말을 모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하루 종일 말을 몰아 이동하는 강행군을 견디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배, 등허리, 허벅지, 엉덩이 근육이 없다시피 했다. 합석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좋고 싫고를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말이다.
등짝에 닿는 단단한 가슴팍이나 어깨를 감싸는 두꺼운 팔뚝의 존재감, 정수리에 닿는 남자의 뜨끈한 숨결에 신경이 내내 곤두섰다. 이런 이벤트와 연이 없는 스물다섯 해를 살아온 탓에 나의 전신 근육이 촌스럽게도 긴장으로 굳었다.
이랴, 하고 말고삐를 내리치기 직전 노마가 물었다.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가주님. 노부인이 당신께 실례되는 말을 했습니까?”
“경께선 알 것 없습니다. 노망이었어요.”
여기에 노부인의 주책맞은 음성이 떠오르는 바람에 나는 더욱 돌처럼 굳어 싸가지를 스프에 말아먹은 대답을 했고, 우리 사이에 한층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숨 막히는 침묵은 다음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신체적 거리감은 지나쳤지만, 감정의 거리는 조금 더 멀어진 기분이었다.
이동하는 내내 노마는 이따금 뭔가에 홀린 듯이 먼 곳을 바라봤다. 넋을 놓은 그 모습은 꼭 귀신을 본 강아지가 허공을 보는 것과 비슷했다.
노마는 몸에 밴 교양과 매너로 겉으론 정상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제정신은 아닌 듯했다. 저주를 받고 오래 잠들었다 방금 깼으니 그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었다.
막말로 그가 오랜 잠의 부작용으로 조금 미쳐 버렸더라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말만 잘 몰아 나를 안전히 카탐까지만 데려다주면 되었다.
느지막하게 툴레를 떠난 그날은 결국 예상대로 노숙을 했다. 다음 마을까지 가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 밤, 별이 쏟아질 듯 맑은 밤하늘이 보이는 얕은 굴에서 나는 제대로 자지 못했다. 노마도 마찬가지였다.
‘제발, 제발.’
정확히 뭘 바라며 애타게 ‘제발’을 되뇌는지는 나도 잘 몰랐다. 그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쫓기는 사람처럼 연신 탄타로스 방향을 돌아볼 뿐이었다.
노마라고 다를 바 없었다. 탄타로스를 탈출한 두 남녀는 각자 다른 불안에 쫓기고 있는 듯했다.
누구 하나랄 것 없이 밤을 꼴딱 샌 몰골을 하고, 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다시 말을 몰았다. 나도 노마도 지나치게 성실한 탓이었다.
불필요한 대화는 역시 오가지 않았다. 또다시 쉴 새 없이 달려 해가 지기 직전에 목표했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 노마. 당신은 후드 벗지 마요. 벗으면 큰일 납니다.”
“예……?”
나는 마을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후드를 벗으며 말했다. 노마의 반짝이는 은발은 밤에도 너무 튀었다.
사실 자체 발광하는 은발보다도 큰 문제는 노마의 금안이었다. 금괴를 갈아 만든 듯한 순도 높은 금안은 100미터 밖에서 봐도 디아시라고 광고를 하는 꼴이었다.
노마 디아시라는 존재가 잊혀진 지금, 니콜라스 디아시가 아닌 금안을 가진 자가 제국을 돌아다니면 디아시의 사생아라는 소리나 널리 퍼질 것이다. 제국에서 금안은 그 정도로 특별했다.
고귀한 존재를 자처하는 디아시는 평판과 명예, 긍지를 목숨처럼 여겼다. 디아시에 사생아? 디아시의 늙은 장로들은 아마 펄쩍 뛰며 죽으려고 들 것이다. 상상만 해도 재미있는 구경거리일 테지만 그만큼 이쪽으로 시선이 쏠리는 것이 문제였다.
물론 디아시의 사정을 봐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내 안위가 우선이라 그런 것뿐이지.
외양적인 특징을 차치하고도 노마의 각별한 미모는 가릴수록 편리했다. 그는 매우 아름다운 동시에 부드러운 인상으로 만인을 끌어모으는 재주가 있었다.
그가 가진 인간 자석 기능은 이미 툴레에서 경험한 바가 있다. 귀걸이 한 쪽 바꾸러 나갔다가 온 마을 사람들에게 잡혀 한참이 걸렸던 것을 생각하면…….
한밤중 후드를 눌러쓴 떡 벌어진 장신의 남자는 누가 봐도 수상할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신혼부부라고 우겨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후드를 까는 순간 다른 의미로 시선을 모을 텐데. 파티할 일이 없다면 노마의 얼굴은 무조건 가려야 했다.
다행히 내 쪽은 외양적으로 특별하진 않았다. 관리 받은 태가 나기야 하겠지만 난 절세 미녀도 아니었다.
또 자색 눈동자는 흔치 않은 색일 뿐이지 맥포이가 아닌 사람도 가질 수 있었다. 금안처럼 특정한 혈통을 확정하는 색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후드를 내리고, 노마는 후드를 더 깊게 쓴 채 마을에 들어섰다.
마을은 툴레보다는 컸으나 작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나마 좀 더 크다고 여관이 있었다. 툴레의 노부인이 말한 그대로였다. 노망난 소리를 하는 노인이었지만 그녀는 보기 드물게 선한 사람이 분명했다.
이 마을에서 카탐까지는 반나절이 채 안 걸리니 내일 동이 트자마자 출발하면 오전 중에도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목표했던 것보다 조금 이르게 롬닥 상단과 접촉할 수 있을 듯하다.
지금까지는 매우 순조롭다고 할 수 있었다. 느지막하게 식사를 하려고 여관에 딸려 있는 식당에 내려갔다가 작은 소란에 휘말린 것만 빼면.
나는 식당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앞장서 내려가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젠장. 아깐 개미 새끼 하나 없더니.’
아까와 다르게 그새 식당엔 대여섯의 진상이 전세를 내고 있었다.
딱 봐도 매일같이 이곳에 출근 도장을 찍는 마을 놈팡이들인 듯했다. 그들은 그 짧은 사이 만취해 다른 손님이 떠나가라 진상을 부리고 있었다. 혹은 2차전을 벌이기 위해 이곳에 왔던가.
얼큰하게 취한 면면을 보니 내려가기 꺼려졌다. 그러나 하루 종일 고작 육포 한 덩이와 물이나 조금 먹지 않았나. 고작 저런 취객들 때문에 식사를 거르고 싶진 않았다.
뒤따라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노마를 힐끔 돌아봤다. 세 칸 위에 선 노마가 의아한 낯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을 지은 뒤 노마에게 후드를 잘 쓰라는 손짓을 보냈다.
태연한 척 계단을 마저 내려가 식당에 발을 내디딘 순간, 식당 안에 긴 정적이 흘렀다.
탐색하는 시선들이 한 번에 꽂히는 것이 얼마 만이더라. 간만이라 그런지 더욱 거지 같았다.
‘저것들이 시비를 건다에 이 가게에 있는 멧 통 전부를 걸지.’
나는 노마를 데리고 최대한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으며 생각했다. 여전히 흩어지지 않는 시선을 느끼며 쯧, 세차게 혀를 차곤 노마만 들릴 정도로 속닥였다.
“기사인 거 절대 티 내지 마세요.”
“티가 납니까?”
그럼 그 덩치에 티가 안 나겠나. 망토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렸다지만 노마의 거대한 몸뚱이는 누가 봐도 최소 용병으로 보일 것이다.
“지금부터 절대, 어떤 상황에서도 기사도를 발휘하지 말란 소리예요. 기억해요. 당신은 아치, 나는 에리카. 아치는 기사도 같은 거 몰라요. 그런 설정이니까.”
“네, 에리카.”
노마가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간 겪은 노마는, 아주 온화한 사람이었으며 미소가 습관이었다. 마치 그게 노마의 기본값이라도 되는 양 그는 시종일관 순하고 착하게만 굴었다. 이 와중에도 후드의 그늘에 가려지지 않는 입술은 적당한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항시 부드럽게 휘어진 입꼬리에서 시선을 뗐다.
“술은 해요?”
“잘 못합니다.”
“그럼 나만 한잔하죠.”
술을 하지 않고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물었다. 혼자 마시기엔 뭐하니 물어봤더니만. 재미없는 디아시 같으니라고.
동부 귀족 디아시는 대대손손 술을 못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서부 사람들은 1년 내내 취해 있다’는 말의 대표 주자 격인 맥포이와 아주 종족부터 달랐다.
“주인장. 여기 멧 한 잔과 함께 오리 다리 요리, 콩 스프 두 사람 분 주시게.”
멧은 맥포이 영지의 특산품이었다. 주로 서부, 맥포이에서 나는 벼목 식물 ‘멧’으로 빚은 술을 그 이름 그대로 멧이라 불렀다.
멧은 평민들의 술이었다. 달콤한 과실주는 아직도 부유한 사람들의 사치품에 해당되었다. 그랬기에 평민들은 달달한 술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한 8년 전에는, 말이다.
맥포이 재건의 1등 공신은 단연 멧이라고 할 수 있었다. 롬닥의 사업 중에 주류 사업은 가장 큰 매출을 자랑했다.
물론 멧을 개발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상품으로써 가치를 발견하고 대량 생산해 화끈하게 유통한 것이 나의 롬닥일 뿐이지.
싸고 만들기 쉬운, 달달한 멧은 이제는 제국에서 물보다 많이 마시는 술이 되었다. 부어라 마셔라, 마시고 죽자가 가능한 술이 멧이었다. 멧이 어떤 맛인가 하면 흔한 곡식 발효주에 꿀을 탄 맛으로, ‘꿀 곡주’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자체로 도수가 높지도 않아서 물에 희석할 필요도 없었다. 평민들의 술이지만 교양 차리는 무도회가 아닌 이상 귀족들도 물처럼 찾는 술이기도 했다.
고로 멧의 어머니인 나 역시 멧을 매우 사랑한다. 이렇게 기분이 내 것도 네 것도 아닐 때는 시원한 멧을 들이부어 주는 게 최고였다. 불행히도 노마는 그런 재미를 모르는 모양이지만.
내가 제법 큰 목소리로 주문하자 이쪽을 향한 시선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고 수군거림은 한층 명백해졌다.
그때였다.
“맥포이의 창부처럼 천박한 보라색 눈이군!”
‘어이구.’
결국 그중 가장 시끄러운 자의 목소리가 식당 전체 들으라는 듯 커다란 소리로 울려 퍼졌다.
별 색다르지도 않은 도발이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진부한 시비에 실망감이 들 정도였다. 나는 매우 심드렁한 얼굴로 앞만 봤다.
맥포이 창부를 시작으로 ‘신이 버린 여자’, ‘서부의 마녀’, ‘동족 살인자’, ‘바다의 창녀’, ‘해적의 정부’, ‘술 파는 귀부인’ 등 나의 오래된 별명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서부 귀족 맥포이는 귀족의 수치다! 까지. 완벽한 풀 세트였다.
‘창의성이 이렇게 없어서야.’
때마침 식당에서 일하는 소년이 멧 한 잔을 먼저 테이블에 가져다 놓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소년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감히, 내 눈동자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우와……. 진짜 보라색이다……. 진짜 맥포이 창부랑 같은 눈이네.”
소년은 태어나 교양의 ‘ㄱ’자도 접하지 못한 티를 냈다. 아치보다 나이를 조금 더 먹은 듯한 소년이 면전에 대고 내게 창부라고 지껄이는 건 처음이라, 이건 또 색다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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