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나와 노마는 카탐까지만 함께하기로 했다.
카탐으로 출발하기 전, 나는 노마와 나를 ‘계약 관계’로 규정했다. 그 계약에는 카탐에 도착해 롬닥 상단과 접촉할 때까지 노마가 나를 호위해 주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나의 고집으로 호위에 대한 보상을 지불하는 것도 계약 내용에 포함됐다.
계약은 구두로 이루어졌다. 나는 이 허술한 계약을 절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카탐에 도착하자마자 구두로만 약속된 이 계약을 반드시 문서화할 셈이었다.
노마는 어떤 물욕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내게 어떤 보상을 받을지 정하지 못했는데, 아마 이대로 카탐에 당도한다면 그에게 금전으로 대가를 지불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을 듯했다.
우리가 별다른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금전은 가장 깔끔한 보상 방법이었다.
이외에 자잘한 계획이 세워졌다. 우리는 최대한 빠르게, 이틀 안에 카탐에 도착해 롬닥 상단과 접촉하는 것을 목표로 움직이기로 했다.
다행히 내 소지품 중엔 패물이 남아 있었다. 귀걸이 한 쪽과 반지 두 개. 분명 공작새처럼 주렁주렁 많이도 달고 있었는데 전부 어디에 떨어뜨렸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노부부를 통해서 엄지손가락만 한 사파이어 귀걸이 한 쪽을 약간의 금전과 식량, 후드가 달린 어두운 망토 두 벌, 그리고 말 한 필과 맞바꾸기로 했다.
귀걸이 한 쪽 값에 털끝도 못 미치는 것들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단하진 않아도 집안 가보인 자수정 반지나 가문의 문장이 박힌 가주 반지를 팔 순 없지 않겠는가.
친절을 베푼 노부부에게는 귀걸이를 롬닥 상단에 되팔면 후하게 쳐줄 것이라 상냥히 말해 주었다. 이걸로 선의를 베푼 그들에게도 값을 대충 치러 준 셈이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맥포이 가주와 디아시의 도련님이 아닌, 평민 신혼부부인 척하기로 결정했다. 조금 더 세부적인 설정을 보태면 ‘신부의 어머니가 위독해 단둘이 빠르게 이동하는 중’이라는 설정이다.
20대의 평범한 차림의 남녀가 말을 타고 이동할 때는 그만한 위장이 없었다. 도망자 신세로 보이는 순간 주둔 경비대에 붙잡힐 테니.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자는 주의라 그에 따라 각자 호칭에도 변화를 주기로 했다.
“딱히 생각나는 이름이 없네요.”
나는 얄팍한 나의 인간관계에 잠시 회의감을 느꼈다.
“주변 사람 이름을 사용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럼……. 아치?”
내게 익숙한 남성 이름이라고는 조카 이름뿐이었다. 노마는 아치가 내 어린 조카의 이름이라는 말에 멈칫하더니, 그럼 자신은 나를 ‘니콜’이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그 이름은 누가 봐도 노마의 동생, 니콜라스의 여성형이라 나도 모르게 단박에 거부했다. 소설에서 노마는 동생 바보라는 설정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정말 니콜라스 그 싸가지를 아끼는 모양이었다.
노마는 나의 빠른 거절에 조금 시무룩한 듯했지만 그놈은 내 천적 중의 천적이라 ‘니콜’로 불리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거늘. <오필리아와 밤>에서 놈의 행적을 떠올리면 뒤통수가 후끈해졌다. 감히 오필리아를 10년이나 숨겨 주고 있었으면서 뻔뻔하게 굴었다는 생각을 하면 정말이지 분했다.
물론 니콜라스에게 날 도울 의무는 없었다. 뭐, 그의 입장에선 제 형을 찾기 위해선 오필리아가 필요했으니 그랬겠지만 그 태도가 괘씸한 건 여전했다.
“그냥 에리카. 에리카로 합시다.”
결국 짧은 고민 끝에 내 보좌관 에리카 시모어의 이름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카탐까지 아이사 맥포이는 ‘에리카’, 노마 디아시는 ‘아치’가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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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가 귀걸이 한 쪽으로 필요한 것들을 얻어 올 동안 나는 머리를 굴리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테이블 하나 없는 작은 다락방에는 작은 화장대, 좁은 침대, 간이 세면대뿐이었다. 노마가 생각보다 더 늦길래 나는 별수 없이 침대에 누웠다.
언제나 일에 치여 살아서 그런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대낮부터 침대에 누워 뒹굴고 있는 것이 심히 어색했다.
정확히는 찝찝하고 미치도록 불안했다. 조금 과장하자면 내 자리가 사라진 기분까지 들었다. 나 하나 없어도 세상은 잘만 돌아간다는 게 실감이 난다고 해야 할까.
상단주가 실종된 지 사나흘. 그럼에도 나의 롬닥 상단은 잘 굴러가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신분에 관계없는 인재 영입과 유연한 조직 구성에 얼마나 열을 냈는지 모른다. 촘촘하게 중간 관리자가 들어차 있는 롬닥 상단의 조직도는 나름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나뿐인 조카를 생각하면 절대 죽을 수 없다며 악착같이 살아남긴 했지만, 사실 가주가 급사했다고 하루아침에 아치가 맥포이와 함께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방계의 힘을 완전히 눌러 버리는 일. 이 또한 내가 가문을 재건하며 가장 힘쓴 일이었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가주로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영지에 피바람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며, 당연히 후회는 없었다.
‘그렇게 지킨 가문인데. 갑작스럽게 내가 죽었을 때 외부와 내부의 정적들로부터 아치를 보호할 수를, 설마 하나도 마련하지 않았을까.’
나는 썩 도덕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이제 보니 ‘주인공’이 아니라서 그런가도 싶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 수는 수많은 협박과 누군가의 죽음, 희생, 공포 따위로 몇 겹을 쌓아 놨다. 그렇게 쌓은 벽은 의외로 견고하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사라진다 해도 아치가 맥포이를 장악하는 게 어렵지 않도록 아주 견고하게 입지를 다져 놓았다.
그러니 맥포이 가주가 실종된 지 사나흘이면 맥포이든 롬닥이든 비상 상태의 지침에 따라 각자 잘만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내가 행방불명됐을 경우를 비롯해 암살을 당했을 때나 사고사 했을 경우까지, 그에 따른 시나리오가 각각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철두철미한 대비에 뿌듯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만 돌아간다 이거지.’
나 죽고 다들 멀쩡하게 사는 꼴 보기가 이렇게 싫을 줄이야. 나는 오필리아의 성력이 고여 있을 명치 쪽을 노려보다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필리아 걔는 진짜……. 괘씸해.”
어쩐지 머리가 아파져 양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렸다. 딱히 눈물이 나서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냥, 생각만으로 여러모로 참담했다.
<오필리아와 밤>.
소설대로라면 난 아직 탄타로스에 갇혀 있어야 하고, 지금쯤이면 다리가 절단됐을 것이다. 그리고 목이 잘린 뒤엔 또 어떻게 되더라.
너무 사후 대비를 잘해 놔서 아치든 맥포이든, 롬닥 상단 사람들이든 잘만 살아간다.
“……몸이 편하니까 별 시답지 않은 생각이 다 드는군. 역시 사람은 굴러야 해.”
손바닥 아래에서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러나 아직 섭섭해하긴 일렀다. 나는 아직 죽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닉스가 죽지 않는 한, 나는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
‘봉인으론 부족해. 죽여야 해.’
노마가 건 봉인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보름에서 달포였다.
물론 이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없는 건 사실이었다. 그 안에 닉스를 쳐 죽일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롬닥 상단과 접촉해서 대신전과 황제에게 급서를 보내고, 에리카에게 도그만 경을 보내라 하고. 또…….
아, 그래. 봉인된 닉스의 몸체를 곧장 성지에 옮길까? 동부 끄트머리에 있는 성지, ‘바그나트’라면 메헤라의 기운이 가장 강한 곳이니 시간을 더 벌 수 있을지도 몰라.
그 새끼를 바그나트까지 옮기려면 맥포이 기사단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겠어. 어디에 지원을 요청할까. 닉스는 이단이니, 역시 성기사단? 그렇다면 대신전에 급서를 보낼 때 같이 요청해야겠군. 그다음엔…….
“맥포이 가주님.”
닉스를 완전히 없애려면 보름 안에 오필리아의 성력과 맞먹는 수준의 사람을 찾는 것이 관건일 텐데.
“맥포이 가주님.”
닉스 새끼가 한 말대로면 나는 오필리아의 성력을 제대로 다룰 수 없을 거야. 내 그릇으론 그 애의 성력을 반도 못 주워 담고 있다고 했으니까. 역시, 다른 사람을 찾아야겠지.
“가주님.”
그런 사람이 또 있긴 할까? 이 세계에서 제일 강한 건 오필리아인데. 나 진짜 살 수 있겠냐?
“또, 우시는 겁니까?”
‘엉?’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노마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내 손을 조심스레 떼어 냈다. 부드러운 손길이었지만 맥없이 눈가에 얹어져 있던 손을 잡아 내리기엔 충분했다.
따뜻한 황금빛 눈동자가 퍽 걱정스럽게 나를 살피고 있었다. 코앞에 금안이 반짝이자 나는 잠시 넋을 놓고 말았다. 노마 특유의 시원한 체향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뭐, 뭐야. 언제 왔어요?”
나는 한 박자 늦게 그에게 붙잡힌 손을 어색하게 빼냈다.
“몇 번이고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길래. 또 울고 계신 줄 알고 놀랐습니다, 가주님. 몸이 안 좋으십니까?”
노마에게 나는 완전히 울보로 찍힌 모양이었다. 내 막되어 먹은 자존심이 꿈틀거렸다.
“저는 절대로 안 울어요. 원래 잘 안 웁니다. 쉽게 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노마는 영 못 믿겠다는 얼굴을 하고 나를 내려다봤다. 억울했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다.
“진짭니다.”
“……네에.”
안 믿는구만. 노마의 표정과 마지못한 수긍은 마치 ‘내가 본 게 있는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게 또 은근히 수치스러워서 나는 얼굴을 팩 돌려 버렸다.
“그러니까 이제 좀 떨어지시죠. 너무 가깝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가주님.”
노마는 그제야 지나치게 가까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황급히 몸을 물렸다. 그의 거리감은 알다가도 모를 것이었다.
와중에 그의 귓바퀴는 또 착실하게 달아올라 되레 내가 다 부끄러웠다. 그는 이런 것에 면역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나라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노마가 하도 저러니 나까지 사소한 일 하나하나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생각보다 늦으셨네요. 준비 다 되었으면 출발하죠. 이러다 해 떨어지겠습니다, 아주.”
“오래 기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가주께서 환복하시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노마가 긴 망토와 옷가지를 침대 머리맡에 두며 말했다. 옷을 가져다주러 온 거였구나.
“아, 네.”
나는 다급하게 상체를 일으켜 옷 꾸러미를 집어 들었다.
“…….”
“…….”
그런데.
“……안 나갑니까?”
왜 안 나가니.
“예?”
“옷 갈아입게요. 여기 계속 있으시게요?”
“……!”
아, 하는 탄식과 함께 노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앉아 있던 작은 스툴이 뒤로 나가떨어지며 우당탕 여운을 주었다.
“제가…… 부끄럽게도 당신께 실수를 너무 많이 합니다.”
짧은 침묵 끝에 그가 회개하는 사람처럼 눈꺼풀을 내리고 말했다. 파들거리는 기다란 속눈썹이 너무나 가련해서 순간 사과를 할 뻔했다.
그 말을 끝으로 노마는 등을 돌려 번개처럼 문밖으로 사라졌다. 침대에 덩그러니 남은 나는 노마가 박차고 나간 문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뭐야……. 뭔데…….”
순수한 영혼을 추잡하게 희롱한 희대의 파렴치가 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의 짧은 여정이, 어색하고 민망한 기류와 함께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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