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노마는 어떤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디아시 경.”
그러나 나는 노마를 더 기다려 줄 여유가 없었다. 사실 아까부터 초조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
“이봐요, 디아시 경?”
결국 용병을 부리던 버릇대로 날이 선 목소리가 나갔다.
“아, 맥포이 가주님.”
노마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맥포이의 일은, 유감입니다.”
“지난 일입니다.”
묘하게 슬픈 표정을 한 노마가 나를 살폈다. 그 얼굴을 보자니 또 가슴이 조여드는 답답함이 느껴졌다.
“이래저래 정신이 없으신 모양이니 딱 세 가지만 묻겠습니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답하세요.”
그래서 더 고압적인 말투가 나왔다. 누가 보면 내가 노마를 혼내는 줄 알 것이다.
“네, 가주님.”
“닉스는 어떻게 처리된 것이며, 제가 기절하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고, 여긴 어딘가요?”
노마는 내 말투에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곧 차분하게 대답했다.
“제 성력으로 그를 잠시 봉인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시간 벌기였으니 언제든 봉인이 풀릴 수 있습니다. 변수가 없다면 적어도 보름, 길게는 달포를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역시나. 담담한 척하던 나의 입매가 대번에 일그러졌다.
“하여간 지긋지긋한 새끼를 그냥…….”
참지 못하고 욕설을 읊조렸다. 살벌한 음성에 노마가 눈을 땡그랗게 뜨는 게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보름에서 한 달 남짓.
그나마 가장 이상적인 상황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그 안에 닉스를 처리할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내가 안 죽고 닉스를 완전히 처리할 방법을.
그런 게 있나? 벌써 머리가 아팠다.
“다음. 시간은, 요?”
“정신을 잃으신 지 꼬박 하루하고 반나절이 지났습니다. 지금은 정오가 지난 시간입니다.”
“허……. 그렇게 잤다고요? 내가? 아니, 제가?”
그가 착각한 것 아닐까? 나는 하루에 네 시간도 자지 않고 일하는 사람인데?
“외상과 내상 모두 상당했으니 당연합니다. 그리고 여기는 중앙과 동부의 경계에 있는 작은 마을, 툴레입니다. 세리아 산맥의 서쪽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건 그나마 희소식이군요. 서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카탐이 나오니.”
카탐은 맥포이가 부리는 상단 ‘롬닥’이 머무는 도시였다. 생존 신고는 카탐에서 하는 게 좋을 듯했다.
“맥포이 가주께선 지리에 밝으시군요.”
“제가 사업을 크게 합니다. 경이 잠든 사이에 제국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귀족이 직접 상단을 부리고 그래요.”
물론 대놓고 상인 행세를 하는 귀족은 아직도 나뿐이긴 했다.
“아, 그럼 여긴 여관인가요?”
“여관……이 아닙니다. 툴레는 작은 마을이라 여관이 없었습니다. 여긴 그저 마음이 좋은 노부부의 집입니다. 친절하게도 방을 내어 주더군요.”
노마가 어쩐지 또 부끄러움을 타며 말했다. 황도 한정으로 여관이라는 게 그렇고 그런 일을 하는 곳이긴 했다.
‘노부부는 아마……. 저 얼굴 때문에 누가 봐도 쫓기는 행색인 수상한 외지인을 들여보내 준 것 같군…….’
나는 수줍음을 타는 조각상을 신기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혹시 제게 궁금한 것이 있으면 더 물어도 좋습니다.”
“이미 많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노마가 예의를 차렸다.
“다음 기회는 딱히 없을 텐데. 정말 궁금한 게 더 없어요? 맥포이 가주는 남들이 얻기 어려운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대 기억의 공백부터 시작해서 이 세계에 대한 비밀도 아는데?”
나는 순간 <오필리아와 밤>이 생각나 예의를 팔아먹은 채 자조적으로 대꾸했다. 그러곤 곧바로 뱉은 말을 후회했다. 적어도 보름은 벌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떠들지 않아도 될 말까지 떠든 것일지도 몰랐다.
노마는 그저 예쁘게 눈을 깜빡이더니 말했다.
“맥포이 가주께선, 재밌는 분이십니다.”
내가 웃긴 사람은 아닌데.
노랗게 빛나는 눈이 반달로 접혔다. 둥글게 휘는 눈꼬리를 보며 나는 괜스레 주먹을 움켜쥐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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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정보 교환을 마친 후 나는 당장 카탐으로 떠나겠다며 자리를 박찼다. 그러나 노마는 내가 아직 환자라며 뜯어 말렸고 승자는 의외로 똥고집인 노마였다.
나는 포슬포슬한 감자를 까 주는 노마를 노려봤다. 식사를 조금이라도 하는 것이 먼저라며 웃는 낯으로 내 어깨를 꾹 내리누르던 모습을 생각하자 다시 치가 떨렸다.
침대에서 벌어진 짧은 실랑이는 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마자 맥없이 끝났다. 공복이 길긴 했다.
나는 수치로 달아올라 알겠다고 소리쳤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아무래도 전염성인 듯했다.
왠지 어깨가 아픈 거 같아서 만족스러운 얼굴로 감자 껍질이나 까고 있는 노마를 다시 째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노마의 신체 접촉 기준은 좀 이상한 것 같았다. 이상하다 뿐인가, 의문이 퐁퐁 솟아났다.
‘그런데 이 남자는 뭐 때문에 여기 남아 있는 거야? 왜 나와 움직이지? 집에 안 가나?’
내가 당장 카탐에 가든 말든!
순간 욱해서 입을 열려고 할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 여주인이 스프를 나눠 준다 했는데 직접 들고 온 모양입니다.”
노마가 안심하라는 듯이 나를 향해 방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감자를 씹어 대며 고개만 까딱였다.
노마의 말처럼 노크의 주인은 푸근한 인상의 노부인이었다. 예의상 침대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려했지만 단박에 저지당했다. 노부인은 호들갑을 떨며 내게 누워 있으라고 말했다. 여전히 몸이 돌덩이 같은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나는 냉큼 그 호의를 받아들였다.
노부인은 문가에 서서 노마와 즐겁게 몇 마디를 주고받았는데 그렇게 화기애애할 수가 없었다. 노마는 마치 혼자만 다른 종족인 것처럼 생겨서 괴리감이 들 정도지만, 인상이 하도 따사로워 다가가긴 쉬운 사람처럼 보였다.
노부인은 노마와 이야기하는 틈틈이 무언가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힐끔힐끔 나를 쳐다봤다. 나는 어색하게 그 시선을 피해 느리게 턱을 움직였다. 빤한 시선이 불편해 퍽퍽한 감자를 좀처럼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했다.
그때였다.
“아유, 새댁은 부끄럼쟁이구만! 남편은 이렇게나 싹싹한데!”
“풉!”
갑작스런 습격에 억지로 씹던 감자를 뱉고 말았다.
“그나저나 남편이 아주 잘생기고 몸까지 훌륭하니 새댁은 좋겠어! 복도 많기는!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둘이 있어들. 방음은 잘되니 걱정 말고!”
노부인은 어린 새댁을 놀리는 것이 재밌다는 듯이 깔깔거리며 그대로 도망가 버렸다. 내 얼굴 근육이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무슨?”
나는 입가를 문지르며 한발 느리게 중얼거렸다. 노마는 여주인이 떠넘긴 접시를 든 채로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그는 안 봐도 뒷목까지 붉게 타고 있을 게 뻔했다.
“…….”
“……여주인이 오해를 한 모양입니다. 제가 가서 해명을―.”
노마가 삐걱거리며 말했다.
“아니, 그걸 해명해서 어쩌게요. 그럼 수상해 보일 거 아니야.”
“그렇지만.”
“……불쾌하시겠지만 참는 게 좋겠어요.”
노부인에겐 나와 노마의 꼴이 시골 귀족 영애와 평민 기사가 사랑의 도피라도 한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노부인의 지루한 일상에 의도치 않게 자극적인 재미를 준 듯했다.
소란스럽게 움직이는 것은 이롭지 않았다. 나는 적이 많고 이 꼴로 신분을 증명하기는 어렵다. 구구절절 사연을 설명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사랑의 도피로 보이는 쪽이 덜 소란스럽겠어요.”
사랑의 도피. 적당히 가벼우며 순진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에 나쁘지 않은 설정이었다.
……노마만 괜찮다면 말이다. 나는 힐끔 노마의 기색을 살폈다.
“사……, 사랑…….”
그는 여전히 김이 날 것처럼 빨간 낯을 하고 중얼거리다 퍼뜩 고개를 저었다.
“저는, 불쾌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런―.”
“그럼 다행이고요.”
나는 애써 시선을 틀어 감자 바구니를 보며 최대한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솔직히 이쪽도 매우 당황스럽고 민망했다.
노마는 무언갈 말하려는 듯이 입을 벌렸다가 그대로 닫았다. 어정쩡하게 문가에 서 있던 그는 곧 스프 접시를 들고 내 쪽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보다 저는 카탐으로 갈 것인데, 경은 어디로 가십니까?”
어쩐지 공기가 어색해서 황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저도 카탐까지 함께 가겠습니다.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
생각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허, 이놈 봐라. 진짜 무슨 꿍꿍이야.’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굳이요?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이미 저는 당신께 생명을 빚졌어요. 무슨 이득으로 움직이는 겁니까?”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영리한 질문도 아니었으며 귀족다운 화법은 당연히 아니었다.
뭐 하나 공평하게 오가는 게 없으니 약점이 잡힌 사람처럼 마냥 불안했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호의가 내 상식으론 이해가 되지 않았다.
노마는 무엇으로 움직이고 있는 건가?
“제겐 성기사로서 메헤라의 딸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부족해서 봉인이 불완전하지 않습니까?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데 카탐까지 혼자 가시게 둘 수 없습니다.”
“성기사의 의무, 봉인의 불완전함? 진심으로 하는 소리입니까?”
“네.”
노마가 지금까지 중에 가장 단호하게 대답했다.
‘과연, 오필리아 과인가.’
손익 계산 없이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인간은 오랜만이라, 가끔 이런 사람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정의로운 주인공 과라 이거지. 그래도…….’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노마 디아시를 훑어봤다. 열린 창문을 타고 들어온 바람에 노마의 은빛 머리칼이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그림이었다.
‘뭐, 우리가 서로 속내를 밝힐 필요는 없지.’
“그래, 일단 그렇다고 쳐요.”
“맥포이 가주님.”
“호위 하나 없이 움직이는 게 위험하다는 걸 알아요. 오히려 이쪽에서 먼저 카탐까지 함께 가 달라 부탁을 드리려 했습니다. 그저 경이 저를 왜 돕는지, 어디까지 도울지 궁금했어요. 감히 떠보는 짓을 했으니 그 점은 사과하겠습니다.”
“…….”
“전 경이 한 말을 전부 믿지 않아요.”
나는 입꼬리만 올려 가식적으로 웃어 보였다. 노마가 딱딱한 얼굴로 그런 나를 바라봤다.
“그나마 기사도를 운운하시니 반은 믿어 주겠습니다. 첫눈에 반했다느니 그런 되도 않는 말을 했으면 소리를 질렀을 거예요. 처음 보는 남자라고.”
나는 집주인 부부가 있을 아래층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제야 노마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왜 집 나온 소년처럼 구시는지 모르겠지만.”
다시금 짧은 침묵이 나와 노마 사이에 감돌았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우실 텐데 몰아붙여 죄송하군요.”
나는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나 말했다. 그러곤 노마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맥포이 가주님, 제게 고개를 숙이시면 안 됩니다.”
“늦었지만 제 목숨을 구해 주어 감사합니다, 디아시 경.”
“저 역시―.”
“경께서 제게 고마울 일은 없을 텐데.”
“은인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제가 잠에서 깬 건 가주님 덕분입니다.”
“전 한 게 없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서로 도왔다고 쳐요. 지금부터는 앞으로 일어나는 일들만 정산하면 되겠네요.”
노마는 잠시 이해하기 어렵다는 얼굴을 했지만 곧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해요. 노마 디아시 경.”
나는 손을 내밀었다. 거래를 텄으면 그다음은 악수 아니겠는가?
노마는 악수를 청하는 내 손을 어색하게 내려다봤다. 제국에서 악수가 흔치 않은 인사법이긴 했다. 특히나 남녀 사이에는 더더욱.
머뭇거리는 모습이 어쩐지 웃겨서 나는 피식 웃어 버렸다. 노마는 그런 내 얼굴을 빤히 보다, 느리게 손을 맞잡았다.
그 손은 동굴에서 내 얼굴을 감싸 주었을 때처럼, 커다랗고 따스했다. 그러고 보니 장갑 없이 악수를 한 건 또 처음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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