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사실 나는 옴짝달싹하지 못할 뿐 한참 전에 눈을 떴다. 온몸이 근육통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몸을 옆으로 돌리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줄곧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나무 천장이나 노려보고 있었다.
사실 노려본 건 아닌데, 꽤나 사납게 올라간 눈썹 탓에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생각에 빠질 때면 내 왼쪽 눈썹산은 하늘을 찌를 것처럼 올라가곤 했다. 버릇이었다.
‘정말 아무도 없나?’
눈을 뜨고 벌써 몇 시간째,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감격에 겨운 건 잠시였다. 나는 여태 최악의 결과를 상상하며 불안에 떨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갈등했다. ‘누구 없는가?’를 해 볼까, 말까 하고. 누군가를 불러 보기엔 정보가 너무 부족한 탓이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전혀 모르겠거든.’
다행히 기절 전의 기억은 선명했다. 나는 술에 절어 기절한 다음 날에도 기억은 멀쩡한 편이었다.
꼴사납게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콧물까지 흘려 가며 운 것도, 그 남자의 품에서 울다 지쳐 기절한 것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이번만큼은 비상한 기억력이 조금 저주스럽게 느껴졌다.
“미쳤지……. 아이사 맥포이, 돌았구나.”
체통을 잃고 오열한 과거의 자신을 때려 주고 싶었다.
“후…….”
아무튼 문제는 기절한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신을 잃기 직전이 노마 디아시의 품이었다고 마지막까지 그였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노마는 뭐, 일단은 기사이긴 하지만 어쨌든 내게 의리나 충성을 보일 필요 없는 생판 남이지 않는가.
나는 그를 모른다. <오필리아와 밤>에서 그는 남주 니콜라스의 시선으로만 보여진다. 특히, 긴 잠에서 깬 노마가 어떤 인물일지 짐작이 잘 가지 않았다.
혹시 노마가 나를 그대로 두고 가서 중간에 다른 놈들에게 납치를 당한 상황이라면, 일이 아주 복잡했다.
내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나는, 맥포이 가주는 필요하면 해적과도 손을 잡는 장사치 중의 장사치이기 때문에 적이 아주 많았다. 자산이 넘치다 못해 흐르는 미혼의 여성이니 납치의 대상으로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얼굴이 잘 알려진 편은 아니었지만 감히 맥포이 가주를 노리는 자들이면 내 외적인 특징을 알아내기는 쉬울 것이다. 자색 눈에 흑발은 제국에서 흔치 않기도 했다.
자색 눈 자체가 맥포이를 상징했다. 맥포이의 상징색 또한 자색이었다.
차라리 적대 관계자나 금품을 노린 이들에게 납치된 상황이라면 그나마 최악은 아니었다.
최악은, 내가 여전히 닉스의 손아귀에 있는 경우다.
과거 그 잘난 오필리아도 놈을 완전히 죽이진 못했다. 물론 그때 오필리아는 어렸고 본능처럼 움직인 탓에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겠지만 어쨌든 닉스를 없애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닉스가 새로 믿는 신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닉스가 죽지 않았다면. 오히려 노마를 살해하고 날 여기에 데려온 게 닉스라면?
“…….”
그건 진짜 아닌데.
갑자기 또 서러움이 몰려왔다. ‘누구 없는가?’ 하나에도 이렇게 맹렬히 고민을 해야 하다니.
<오필리아와 밤>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면서 메말랐던 감성이 함께 살아나기라도 한 건지 기분이 시도 때도 없이 날뛰는 것 같았다.
“뭔 놈의 인생이 이렇게 어렵…….”
천장에 대고 나도 모르게 한탄을 뱉을 때 불시에 방문이 열렸다. 나는 퍼뜩 입을 다물고 방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끼이이이―.
잔뜩 녹이 슨 방문은 조심스러운 손길에 더욱 요란한 쇳소리를 냈다.
숨을 죽였다.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서서히 열리는 방문을 핏대 선 눈으로 바라봤다. 쿵쿵쿵, 심장이 빠르게 달음질쳤다.
이이이익―.
‘아―.’
쇳소리 끝에, 당혹으로 물든 낯이 드러났다. 상대는 문짝이 내는 시끄러운 소리에 당황한 듯했다.
눈이 마주쳤다. 안 그래도 당황한 그 얼굴은 조금 붉어지기까지 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상대를 마주하자 맥이 탁 풀렸다. 긴장했던 것이 억울할 지경이었다.
“……깨어나 계셨군요. 함부로 들어와 죄송합니다. 어쩐지 당신께는 계속 죄송한 일 뿐이네요.”
저런.
노마 디아시는 엄청난 숙맥인 모양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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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바뀐 지도 8년은 족히 넘었는데, 옛 성기사단복을 입고 있는 것은 너무 눈에 띄긴 하지.’
성기사단복을 입고 있던 노마는 전형적인 평복 차림이었다. 밀 농사를 짓는 농민의 노동복이라고 해야 하나…….
헐렁한 셔츠는 겉보기에도 질이 나빠 보였고 짙은 색의 바지는 무릎이 다 늘어나 있었다. 마구간에서 노동할 때나 신을 법한 장화는 그 차림의 화룡점정이었다.
그럼에도 아름다워 보이는 건, 그 개안할 미모와 발군의 몸매 덕분일 것이다.
뭐 내 옷차림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가 걸치고 있는 통짜 원피스는 잠옷인 듯했다. 가문 재건 시절, 말 그대로 사막을 굴러다녔던 때에 비하면 이런 차림은 호사였다.
‘신이 디아시를 빚을 때만 집중했다는 게 사실인가 보군.’
나는 바짝 경계한 채로 열심히 노마를 탐색했다.
‘오필리아보다 아주 쪼오오끔 더 예쁜 거 같기도 하고.’
어쩐지 얼굴만 열심히 탐색한 것 같지만 밝은 데서 마주하니 더 잘 보이고, 그래서 색다른 걸 어쩌겠는가.
“손목과 발목의 상처가 심하여 실례를 무릅쓰고 먼저 치료를 했습니다. 아픈 곳이 더 있으십니까?”
들어오자마자 열심히 눈으로 나를 살핀 끝에 노마가 입을 열었다. 퍽 조심스러운 행동과 말투였다.
‘어쩐지. 손, 발목이 멀쩡하더라.’
“……온몸이 욱신거리는데 이건 성력으로 어떻게 안 되나? ……요?”
나는 대놓고 의뭉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느리게 대답했다.
“아, 근육통이 있으시군요.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괴한 취급하는 눈빛을 뻔히 읽었을 텐데 노마는 햇살처럼 웃으며 말했다. 치료라도 할 수 있는 것이 기꺼운 사람처럼. 치료사야 뭐야…….
워낙 급박한 상황이기야 했지만, 탄타로스를 빠져나갈 땐 묻지도 않고 사람을 덥석덥석 안더니 이제 와서 일일이 허락받는 것도 조금 우스웠다.
‘내가 딱히 그의 은인은 아닌데. 오히려 저 사람이 내 은인 아닌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부디 편하게 누워 눈을 감아 달라는 노마의 말에 얌전히 따라 줬다. 따듯한 빛이 전신을 감싸는 느낌은 퍽 기분이 좋기도 했다.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에 절로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경계를 푼 건 아니었다.
‘그나저나 왜 아무것도 안 물어보지? 궁금한 게 천지일 텐데.’
노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수발드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 페이스에 말리는 바람에 나도 노마에게 선뜻 물어볼 수가 없었다.
어쩐지 그는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기도 했다.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 신분이기도 했고.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타이밍을 쟀지만 좀처럼 입을 열기 어려웠다. 노마는 정말 무지렁이 신자를 치료하는 신관이라도 된 것처럼 치료에 열중하기만 했다.
설마하니 내가 또 발작할까 봐 닉스 일에 대해서 얘기를 안 하는 건가 싶었다. 노마가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이 닉스를 보고 오열하는 내 얼굴이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쓸데없는 배려에 부응해 간단한 것부터 묻기로 했다.
“……그런데 내, 아니 제 옷은요?”
“아……. 환복은, 이 집의 여주인이 도와주었습니다.”
노마는 또다시 얼굴을 조금 붉히고 말했다. 저런……. 안타깝게도 노마에겐 간단한 질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
“드레스가 젖어서 그대로 둘 수가, 없었습니다.”
성기사라는 걸 이렇게 티 내다니. 물론 모든 성기사가 그쪽으로 순진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들의 규율엔 성욕과 충동을 멀리하라는 것이 있긴 했다.
뭐, 이런 규율은 신자들에게도 해당되니 노마가 유독 자주 붉게 타오르는 건 그 융통성 없는 ‘디아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나름 차기 성기사단장 후보였던 사람 아닌가? 이렇게 표정 하나 감추지 못해서야…….
연신 당황하는 노마의 모습이 조금 우스웠지만 모르는 척했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네.”
아.
“……요.”
연방 말실수를 하는 내 쪽도 우습기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
“용서하세요. 제가 영지에만 있는 일이 많다 보니 하대나 명령밖에 할 일이 없어서 말실수가 많습니다.”
나는 눈썹을 까딱이며 말했다. 오만해 보였을 테지만 기선 제압은 상단주 된 자로서 본능이었다.
이번같이 건국제 때가 아니고서야 나는 이 제국에서 나보다 신분이 높은 자들을 상대할 일이 딱히 없었다. 때문에 의식하지 않으면 존대가 어색했다.
노마가 그제야 똑바로 나를 보았다. 그러나 선뜻 입을 열지는 않았다.
‘아하. 처음 본 레이디에게 질문을 퍼붓는 게 실례라 이거지? 디아시답구만.’
죽어도 노마가 먼저 무언가를 묻진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제가 수상하겠군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맥포이 가주, 아이사 맥포이입니다.”
나는 왼손 검지를 들어 맥포이의 문양이 박힌 반지를 보여 주며 말했다.
“수상하다니, 당치않습니다. ……맥포이의 가주님이시군요. 섣부른 호칭의 무례를 부디 용서하십시오.”
“피차 무례했으니 넘깁시다. 당신은 노마 디아시 경이겠죠?”
“가주께선 저를, 아십니까?”
순간 노마의 눈에 온갖 감정이 스쳤지만 나는 알아채지 못했다.
“당신은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성기사이지 않습니까. 디아시 경께서 저를 모르는 건 당연합니다.”
나는 여상한 말로 그의 질문을 넘겨 버렸다.
“네. 저는 가주님을 처음 뵙습니다. 맞습니까?”
“제가 알기로 그렇습니다만, 제가 가주가 된 것은 아주 오래전 일입니다. 선대께선 이미 10년도 전에 신의 품으로 돌아가신지라.”
나는 노마의 얼굴을 빤히 보며 말을 이었다.
“경이 행방불명된 지도 십수 년이 흘렀어요.”
노마는 담담했다.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오호라. 기사는 기사라 이건가?’
아무래도 노마가 당황하는 건 그런 쪽에만 한정된 모양이다.
“별로 놀라지 않네요?”
“꽤 오래 잠들어 있었다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그 미친 새끼, 아니. 닉스가 그대를 봉인했다는 것은 아십니까? 고위 신관이었는데.”
노마는 ‘미친 새끼’에서 조금 움찔했지만 잠시였다. 나 역시 습관처럼 튀어나온 욕설을 애써 모른 척했다.
“제가 봉인된 거였군요.”
“네. 고위 신관 닉스가 잠이 든 당신을 봉인하고 그 요새에 숨겼습니다.”
잠이 든 노마를 굳이 탄타로스에 봉인한 것은 닉스가 자신의 첫 범죄를 기념하기 위해 벌인 개짓거리였다. 나는 굳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요새에서 본 자는 성력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힘은…….”
노마는 그 힘을 언급하다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저주를 퍼부은 친구’가 떠오른 모양이다. 닉스가 부리는 힘과 그 친구의 저주는 같은 힘이니, 노마는 그것을 모른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요새에서 마주친 자는 닉스가 아닙니까?”
“닉스가 맞습니다. 닉스는 당신을 봉인하고 몇 년 두문불출하다가, 어느 날 맥포이에 나타나 맥포이 전체를 갖다 바쳐 알포 신을 깨웠어요. 예상하셨겠지만 그 힘은 알포 신의 것입니다. 모시던 신을 배신했으니 닉스가 가진 메헤라 신의 힘은 그때 사라졌을 겁니다.”
대륙인들이 가진 성력은 이 땅의 신, 메헤라의 힘이다.
알포는 수천 년 전 메헤라가 봉인한 악신이다. 인간에게 7대 죄를 처음 알려 준 것이 알포이고, 인간을 사랑한 메헤라가 알포를 봉인했다는 것이 이 대륙의 신화였다.
알포 신과 그가 전해 준 저주법들은 대신전 깊숙한 곳에 봉인되어 있었다. 고위 신관 닉스는 그것들이 봉인된 금서에 손을 대 저주에 맛 들리고, 급기야 맥포이 전체를 바쳐 알포를 깨웠다.
맥포이가의 한 소녀가 그때 닉스를 봉인했고, 닉스 역시 최근에야 봉인이 풀렸다는 것까지. 공공연한 사실만 골라 최대한 남 일처럼 말했지만 노마는 드물게 미간을 모았다.
그 얼굴엔 어쩐지 슬픔이 가득 차 있어, 나는 되레 불편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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