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울지 마세요.”
노마가 내 눈가를 짧게 쓸며 말했다.
내 볼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쓰다듬는 미인은 퍽 가슴 아픈 얼굴을 하고 나를 올려다봤다. 그는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울지 말라고? 눈물을 닦아 준다고?
……내가 울고 있다고?
아니, 그보다 지금 노마 디아시가 깬 건가? 당신이 왜 깨?
꿈에서 깨워 달랬더니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눈가를 더듬었다. 온갖 액체로 범벅이 된 얼굴이 만져졌다. 이제 보니 시야가 뿌옇고 눈가엔 잔뜩 열이 올라 있었다.
“어, 어?”
그제야 나는 내가 눈물 콧물을 쏟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내가 당황하는 사이 노마가 상체를 일으켰다. 십수 년 봉인된 사람의 몸놀림 같지가 않았다. 상체를 일으킨 그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눈물과 콧물을 닦는 것에 열중했다.
나는 상황을 잊고 그런 노마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의 눈동자에서 여전히 눈을 떼지 못했다.
“저자가 그대를 해치려 했습니까?”
“어……, 아!”
나는 퍼뜩 놀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
몹시 찬란한 금빛을 띤 투명한 막이, 나를 향해 쏟아지던 검은 손들을 막아 내고 있었다. 검은 손들은 당장이라도 내게 달려들 것처럼 투명한 막을 사이에 두고 내 코앞에서 우글거리고 있었다.
“너, 너……! 노마 디아시!”
닉스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경악에 차 일그러진 얼굴이 아주 볼만했다.
닉스는 분하다는 듯이 애먼 땅을 잘근잘근 밟더니 이쪽을 향해 게걸스럽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닉스의 가냘픈 몸매처럼 엉성한 달리기였지만, 닉스가 발을 디디는 곳마다 수십 개의 새로운 검은 손이 솟아오르는 장면은 커다란 공포감을 주었다.
노마의 결계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철렁거렸다.
“사, 살려 줘. 살려 줘요, 노마 디아시.”
나는 당장이라도 결계를 뚫고 들어올 듯 맹렬하게 부딪히는 검은 손들을 보며 바보처럼 더듬거렸다.
혀가 굳어서 논리적인 설득이고 뭐고를 죄다 생략해 버린 말이었다. 오열의 여파로 숨이 부족한 것도 있었다. 아무튼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이기는 했다.
“아가씨, 부끄럽지만 저는 당장 저것을 제거하진 못합니다. 잠시 시간만 벌겠습니다.”
여전히 내 콧물이나 닦던 노마는 차분한 어조로 내게 빠르게 속닥였다. 와중에 그렇게 낮지 않으면서도 동굴에 있는 것 같은 울림을 주는 미성은 오싹했다.
“그러니 제 무례를 용서하세요, 아가씨.”
노마는 그 말을 끝으로 내 대답과 상관없이 나의 허벅지 뒤와 등허리에 팔을 끼워 넣었다. 이게 무슨, 이라고 할 새도 없이 다음 순간 상체가 훅 뒤로 넘어갔다. 그대로 몸이 번쩍 들렸다.
일명 ‘공주님 안기’에 내가 미처 충격을 느끼기도 전에, 노마가 날아올랐다.
날아? 이게 가능해?
“억!”
급박한 전개에 고상하지 못한 비명을 질렀다.
“잠시 눈을 감으세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눈을 질끈 감자 이내 무중력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닫힌 눈꺼풀 너머로 샛노란 빛이 터졌다. 온 세상이 따스한 햇볕으로 차는 것 같았다. 노마의 성력이었다.
세상이 멸망하는 것만 같은 폭음과 따사로운 빛의 조화는 퍽 역설적이었다.
삐―, 하는 이명이 들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나를 안고 있는 노마의 품에 고개를 묻고 폭발을 견뎠다. 그래야만 숨을 쉴 수 있는 사람처럼 그 품에 점점 더 파고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다시는 눈을 못 뜰 것 같아서 정신을 놓을 수도 없었다.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복부가 뚫렸던 아픔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아서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더욱 몸을 옹송그렸다.
‘언제 끝나는 거야. 나는 살아 있는 건가?’
노마의 성력이 뿜어내는 빛은 수천 개의 폭죽이 터진 것과 같아서 도저히 눈을 떠 상황을 살필 수가 없었다.
‘아, 젠장. 아파. 아픈 것 같아. 목은 붙어 있는 것 같은데……. 설마 또, 또 배가 뚫렸나?’
그런 생각을 하자 숨을 쉬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려던 찰나.
“정신이 드십니까?”
단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실눈을 떠 목소리의 주인을 보려 했다. 어서 내가 살아 있다는 걸 확인받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그 빛이 사라졌음에도 말이다.
“으, 하……. 숨이, 숨…….”
“……실례하겠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손이 이내 빠르게 드레스 앞자락을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실밥이 드드득, 뜯기는 소리가 들렸다.
“아…….”
드레스 앞섶이 벌어지자 그제야 앞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몽롱한 기분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죽음에서 벗어나 처음 보는 세상은 경이로웠다. 막 해가 솟아오른 드높은 산맥을 배경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미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잠시 사후 세계에 도착해 천상계의 인물과 만난 것은 아닌가 싶어 가슴이 철렁거렸지만, 곧 저 얼굴은 ‘노마 디아시’라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자 눈물이 주르륵 관자놀이를 타고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 내 목덜미를 더듬었다.
‘부, 붙어 있다.’
덜덜 떨리는 손은 이어 복부를 향했다.
“어어……. 사, 살았…….”
살았다.
다급하게 내가 누워 있는 땅바닥을 더듬었다. 축축한 풀과 흙이 잡혔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렇게 감정이 복받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참을 수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사, 살, 으헝, 헝, 미쳤어……! 살았어, 진짜……! 으허엉!”
나는 10년 동안 참은 눈물을 다 흘릴 기세로 또다시 울기 시작했다.
‘사실은 살 줄 몰랐어.’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울음이 터졌다.
“으, 으허……. 어, 어떻게 해! 으헝! 사, 으, 살았어……! 나, 살아 있어, 어떡해!”
“네, 살아 있습니다. 이제 괜찮아요.”
전부 말도 안 된다고 느껴져서 노마를 향해 도리질을 쳤다. 분명 더럽기 짝이 없는 몰골이었을 텐데 노마는 천사라도 되는 양 다정한 얼굴을 하고 또다시 내 눈물 콧물을 닦아 주었다.
순간 저 사람은 진짜 신, 뭐 그런 거고 사실 나는 지금 죽은 건가 싶은 불안감이 다시 들기까지 했다.
“제 차림이 온전치 못해 손수건 하나 없군요. 무례를 용서하세요.”
그런 건 문제도 아니다. 나는 하염없이 고개를 저으며 울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가끔은 소리 내 우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우시니 쓰러지실까 걱정이 됩니다. 저를 보고 숨을 쉬어 보세요.”
“흑, 흐……! 아니, 살았어. 진짜, 진짜…… 죽는 줄, 흑……!”
노마를 따라 하려고 해도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노마는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그런 나를 보다가 조금 망설인 끝에 다시 내 등허리와 허벅지 뒤로 단단한 팔을 끼워 왔다.
“제가, 누군가를 달래는 데 소질이 없습니다. 다만 제게 어린 동생이 있는데 이렇게 마주 안아 주면 진정하더군요.”
그대로 다시 나를 품에 안은 노마가 아까와는 다르게 상체를 완전히 밀착해 왔다.
나는 순간 너무 놀라 숨을 잠시 멈추었다. 그가 이걸 노린 건 아니겠지만 과호흡에서 벗어나는 데 제법 효과적이었다.
맥포이가 그렇게 된 후에는 타인과 이렇게 친밀하게 접촉을 해 본 일이 없었다. 맨손으로는 악수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당연히 누군가 나를 이렇게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로 꽉 안아 준 적도 없었다. 덜덜 떨리던 몸이 애매하게 경직됐다. 히끅이는 소리와 함께 딸꾹질이 터져 나왔다. 추태도 이런 추태가 없었다.
노마는 그런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커다란 손이 규칙적으로 등을 쓸어 주자 점차 몸의 떨림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굳었던 어깨도 점점 힘이 빠졌다.
“이제, 괜찮습니다.”
노마는 주문처럼 괜찮다는 말을 되뇌었다. 그 목소리는 어쩐지 조금 떨려서 꼭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 꽉 안아 주는 팔에 난생처음인 것처럼 안정감을 느꼈다.
‘내가 이렇게 단순한 사람이던가.’
곧 수마가 몰려들었다. 몸이 더 이상 버티질 못했으나 눈을 감으면 다시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아 불안했다. 가물거리는 눈을 몇 번 고쳐 떴다.
“눈을 감고 잠시 쉬세요.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죽지 않아요.”
그걸 또 눈치챘는지 노마는 귀신같이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 해 주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 부드럽고 자상해서 아주 잠깐이라면 눈을 감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정신이 빠르게 멀어졌다.
* * *
harbaragi_syk
“오필리아?”
오필리아는 니콜라스에게 안겨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아. 아……!”
니콜라스의 노력에도 오필리아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탄식을 뱉었다.
“오필리아, 정신 차려. 나를 봐. 괜찮아. 진정해.”
“니, 니콜라스. 어쩌면, 어쩌면 좋아. 내가 얼마나 기절했지? 건국제로부터 얼마나 지난 거야?”
“맥포이 가주가 놈에게 납치당한 지 채 하루가 안 지났어. 아직 놈을 쫓고 있는 중이지만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그사이에 아이사 맥포이에게 손을 대진 않았을 거야. 그런 놈이니까.”
니콜라스가 그 딴에는 최대한 긍정적인 투로 말했다.
“아니. 망했어. 이번엔 정말……! 어떡하지? 하필이면 지금……!”
“오필리아, 도대체―.”
니콜라스는 당황스러웠다. 평소 유난히 장난스럽지만, 오히려 심각한 상황에선 가장 냉철하고 침착한 것이 그녀였다.
그런데 지금의 그녀는 꼭 10년 전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듯이 불안해했다.
“당장 가야겠어. 당장.”
“네 마음을 알아. 하지만…… 아직 놈의 자취에 대한 단서조차 없어.”
니콜라스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는 오필리아를 붙잡으며 말했다.
“내가 알아, 니콜라스. 탄타로스가 어딘지 나는 알아. 지금의 나는…….”
오필리아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시리도록 푸른 눈에 눈물이 가득 찬 것을 보고 니콜라스는 마음이 쪼개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빨리 기억났더라면. 왜 하필이면 지금.”
오필리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오필리아, 무슨 소리를…….”
“니콜라스. 당장 가야 해. 나 혼자서라도, 당장.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어.”
단호하게 말한 오필리아의 표정이 결연했다. 어느 때보다 감정적이었지만, 그녀는 평소의 오필리아였다.
니콜라스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빠르게 납득했다.
‘그녀가 이렇게 행동하는 데엔 이유가 있으며 상황은 매우 긴박하다.’
“바로 준비하지.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제발. 부탁이야, 오필리아.”
제발 혼자 튀어 나가지 말라는 당부였다. 니콜라스는 그녀를 목숨보다 사랑하지만 그녀가 망아지 같은 성미를 지닌 것은 부정하지 못했다.
오필리아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니콜라스가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서자마자 오필리아는 머리를 싸맸다.
“하필이면 이때로…….”
그녀는 초조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직 한참 어두운 밤이었다.
“제발.”
오필리아가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떨궜다.
중앙, 황도에 위치한 디아시 저택에서 중앙과 북동부의 경계에 있는 탄타로스까지는 아주 먼 거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흘 가까이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니콜라스의 성력을 이용해 많은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음에도 말이다.
오필리아는 참담함을 느꼈다.
‘이미 늦었다.’
탄타로스 근처에 다다랐을 때, 오필리아는 마침내 결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정확히는 결계의 흔적이었다. 곧장 보이는 요새는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완전히 허물어져 버린 건물은 돌무덤에 가까워 보였다.
탄타로스였다.
“오필리아, 이건.”
“달라.”
오필리아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달라졌어, 니콜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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