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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드 엔딩 후에-6화 (6/139)

6.

자연스럽게 <오필리아와 밤>의 남자 주인공이 떠올랐다. 노마의 나이 차이 나는 동생이자, 현 디아시의 젊은 가주인 ‘니콜라스 디아시’가 말이다.

니콜라스를 생각한 것만으로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마 니콜라스도 그럴 것이다.

“아니……. 분명히 그 싸가지 없는 자식하고 똑 닮았는데 왜 잘생겨 보이지? 그 자식도 인상을 안 쓰면 이런 느낌이려나?”

니콜라스는 나를 마주쳤다 하면 미간을 구기니, 나는 그 괘씸한 놈의 평소 얼굴을 모른다. 인상이 매우 더럽다고 기억할 뿐.

디아시의 새 가주와 연배가 비슷한 맥포이 가주가 서로 싫어한다는 건 제국의 어린애도 아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싸가지를 봐도 잘생겼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었는데…….

흑발과 은발의 차인가? 은발이 내 취향이었던가?

노마가 눈을 감고 있어서 그런지 나이조차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동안 잠들어 있었으니 나이 따위는 의미가 없을지도 몰랐다.

굳이 따져 보자면 노마 디아시는 저주에 걸렸을 때 이미 성년을 넘긴 나이였을 거다. 그렇다면 대충 지금 서른이 넘었다는 건데.

괜히 그의 볼을 꾸욱 찔러 봤다. 말랑했다.

“허.”

생각지 못한 부드러운 촉감에 불에 댄 듯이 손가락을 물렸다.

서른 살 먹은 털 난 남자 피부가 이렇게 말랑하고 부드러울 일인가? 돈이나 만졌지 남자를 만져 본 일이 있어야 알지.

“……이럴 때가 아니지.”

생각도 못 한 얼굴 공격에 내가 처한 상황을 아주 잊을 뻔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노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어딘가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저주에 걸린 상태라면, 뭔가 보여야 했다.

“안 보일 리가 없는데.”

<오필리아와 밤>에 의하면 성력이 높은 사람은 저주에 걸린 사람을 구분할 수 있었다. 저주에 걸린 사람에겐 마치 향수처럼 그 자취가 남아 눈에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노마에겐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뒤통수를 박박 긁으며 고민했다. 내 성력이 아니라서 안 보이나? 혹은 그가 잠이 든 건 저주의 문제가 아닌가?

“……설마. 지금, 그냥 본인 의지로 자고 있는 건가?”

“뭐야? 오필리아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온몸이 또다시 땅끝으로 꺼지는 기분을 느꼈다. 오늘만 심장이 몇 번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건지.

나는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목에서 삐그덕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이런 젠장할. 역시 노마를 버리는 게 나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작은 키에 마른 체형, 파리한 낯빛. 순한 눈매와 따듯한 녹안, 부드러운 밝은 갈색 머리. 누가 봐도 연약하고 무해해 보이는 남자가 입구에 서 있었다.

닉스였다.

“아이사. 뭐야?”

아아―.

“왜 너만 있어? 분명히 오필리아의 성력이 느껴지는데. 오필리아는 어디 있지?”

10년 동안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닉스를 잡아 죽이는 상상을 해 왔다. 그것은 오래된 습관 같은 거였다.

생각의 고리는 단순했다. 어느 순간 미친 듯한 고독을 느끼고, 마냥 행복했던 순간을 그리워하다, 마냥 행복했던 날에 갑자기 온 가족이 죽었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러면 다시 닉스에 대한 증오로 배 속이 마구 끓어올랐다. 오필리아에 대한 미움도 가득 찼다.

이 고리는 언제나 닉스를 잡아 죽이는 상상으로 끝났다. 나는 닉스를 잡아 내 앞에 끌고 오는 수만 가지 방법을 상상했고, 닉스를 고통스럽게 죽이는 수만 가지 방법을 상상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상이었던 모양이다. 막상 닉스를 마주치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저것은 10년 전, 맥포이에 나타났을 때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였다.

친한 척 오필리아의 흉내를 내며 날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입버릇처럼 오필리아가 어디 있냐고 묻는 것도. 어벙하고 무해한 척 풀어진 낯짝도 전부 그대로였다.

내 머릿속은 단숨에 시커메졌다. 꼭 그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검은 손이 바닥을 뚫고 나와 순식간에 내 몸을 꿰뚫었던 순간에 멈춰 있는 기분이었다.

비명도 못 지르고 죽어 가던 열다섯 소녀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했다.

“뭘 멍청히 보고만 있어. 대답해. 오필리아는 어디 있어?”

그러곤 닉스는 내가 붙들고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게 노마라는 것을 알아본 닉스가 대번에 미간을 구겼다.

“……노마 디아시? 저걸 어떻게 꺼냈지?”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말을 걸어 대는 닉스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수천 번의 상상과 너무나 달랐다.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러 댔다. 좀처럼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화를 내야 하나. 소리를 질러야 하나. 비명을 질러야 하나. 울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무작정 달려들어야 하나?

“아! 역시, 오필리아가 왔구나! 어디 있어? 그녀는 지금 어디 있지? 분명 가까이 있는데. 어서 말하렴, 아이사.”

닉스가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하……!”

나는 그제야 헛웃음이나마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자글자글 끓던 머리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놈의 오필리아, 오필리아.”

“뭐?”

“오필리아도, 너도. 정말, 지긋지긋해.”

나는 고개를 치켜들고 한 글자 한 글자를 꾹꾹 눌러 말했다. 닉스는 황당한 얼굴로 그런 나를 쳐다봤다.

“오필리아를 봐서 어쩌려고. 그 애 눈앞에서 날 또 죽이면 걔가 무너질 것 같아? 지난번에는 내 배를 뚫었으니 이번엔 목이라도 썰게? 그러면 될 것 같아?”

닉스는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다. 오필리아는 맥포이를 떠나 10년간 자신만의 견고한 세상을 만들었다. 아이사 맥포이의 죽음은 더 이상 오필리아를 무너뜨릴 수 없다.

니콜라스 디아시, 그 건방진 놈을 잡아다가 죽이면 모를까.

물론 오필리아는 내 죽음에 크게 슬퍼하겠지만 그 사실은 어디까지나 각성의 동력이 될 뿐이다. 오필리아는 그 일로 무너지지 않는다. 그 애 옆엔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이미 차고 넘친다.

‘난 더 이상 그 애의 유일한 가족 따위가 아니야.’

따지고 보면 먼저 내친 건 내 쪽인데 괜히 비참한 마음이 들어 나는 더 독하게 입을 열었다.

“오필리아 여기 없어. 안 와. 못 와. 네가 내 손가락을 잘라다가 황도 광장에 장식하지 않는 한, 걔는 여기 못 찾아온다고.”

“이봐, 맥포이.”

“찾을 수 있었으면 진작 왔겠지. 걘 그런 애니까.”

오필리아는 사람을 도와주지 못하면 죽는 병이라도 있는 것처럼 굴고는 했다.

“무슨 헛소리야. 내가 머리를 너무 세게 쳤나? 미쳤어?”

“오필리아는 여기 못 찾아.”

“하! 너 따위는 성력이 없으니 모르겠지만, 오필리아의 성력이면―.”

“없어.”

“뭐?”

“그 대단한 성력, 그거 오필리아에게 없다고. 이제.”

“무슨…….”

“신에 가장 가까웠던 여자는 이제 없다고, 이 멍청한 새끼야.”

나는 악당같이 웃으며 말했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썹 덕에 제법 비열해 보였을 것이다. 신나게 쏘아붙이고 나니 더 이상 목소리가 떨리지도 않았다.

그와 동시에 빙글빙글 웃던 닉스의 낯이 삽시간에 귀신처럼 굳어졌다. 불긋불긋 얼굴이 달아오른 채 경련하는 닉스의 얼굴을 보니 웃음이 조금 났다.

“걔가 왜 지금까지 널 못 찾았을까? 설령 걔가 지금 여기 온다 해도, 걔 앞에서 백날 날 죽여 봤자 넌 그 애를 무너뜨리지 못해. 영원히.”

오필리아는 자신의 사랑이자 이해자인 니콜라스를 만났다. 닉스는 성력 따위와 상관없이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 마침내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 오필리아를 아마 평생 이해하지 못하겠지.

“똑바로, 똑바로 설명해. 빙빙 돌리지 말고 제대로 말하라고!”

분노가 극에 달했는지 닉스의 뒤로 우글거리는 검은 손들이 나타났다.

호기롭게 닉스를 약 올린 것이 무색하게 반사 작용처럼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검은 손은 내게 트라우마 자체인 모양이다.

그러나 그 뻔뻔한 얼굴이 괴로움으로 일그러지는 꼴을 보니 이대로 몸을 사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는 도발을 선택했다.

“야, 이 돌대가리야. 머리가 안 돌아가? 내가 그날 어떻게 살아남았을 거라고 생각해? 그 오필리아가 설마 사술이라도 썼을까!”

닉스가 온몸을 무섭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자글자글 떨리는 얼굴 근육이 새삼 가증스럽다. 드디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모양이다.

“잘 봐. 네가 그렇게 집착하던 게, 지금 누구한테 있는지. 그게 지금 어떤 형태로 있는지. 너라면 보일 거 아니야.”

너도 절망을 좀 느껴 봐.

“네가 사랑한 오필리아는 한참 전에 사라졌어. 그날, 네가 맥포이를 부순 날.”

닉스가 가장 끔찍한 이유는, 오필리아 자체를 사랑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그걸 사랑이라고 표현해 주기도 싫지만, 아무튼.

닉스는 오필리아가 가진 성력을 사랑한 것에 가깝다. 같은 신을 모시는 종교인으로서, 오필리아는 신에 가장 가까운 인간이기 때문에 그 애를 동경하고, 사모하고, 증오하고, 질투하고, 탐했다. 그것은 폭력적이고 추잡하며 음습한 애증이었다.

그러니 성력이 없는 오필리아는 더 이상 자신이 사랑하는 오필리아가 아닐 것이다. 닉스는 삶의 이유와 목적을 잃었다.

곧 닉스의 끔찍한 비명이 시작되었다. 그는 한참을 데굴데굴 구르며 발버둥을 쳤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기괴한 울음소리였다.

성질대로 일단 닉스의 화를 돋우기는 했으나 이다음이 생각나지 않았다. 화를 돋운 건 돋운 건데, 죽을 작정으로 이런 건 아니었다.

닉스가 절박하게 몸부림치는 사이, 나는 노마를 흔들어 보기도 하고 눈꺼풀을 뒤집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역시 노마는 포기해야겠군’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닉스가 상체만 벌떡 일으킨 채 소리쳤다.

“너, 너. 아이사, 이 못된 것. 천박한 것. 그건 너 따위가 가지고 있을 게 아니야! 너는 항상 내 일에 방해됐어.”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욕을 갈기려 했지만 닉스가 조금 더 빨랐다.

“오필리아의 몸은, 몸은 어쨌어? 죽은 거야? 땅에 묻었어?”

이것 봐라. 오필리아가 성력을 잃고 아주 죽었다고 생각하나?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오필리아는 이제 없어. 그러니까 날 죽여 봤자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오필리아의 성력은 나와 함께 영영 사라질 뿐이야.”

“진짜, 진짜 오필리아가 없어? 죽었어? 그 입 닥쳐! 어디서 새빨간 거짓말이야, 더러운 년!”

이미 정신이 나간 닉스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이야. 이미 10년 전에 오필리아는 너를 봉인하고 남은 힘과 맞바꿔서 날 살리고, 죽었어.”

내 입에선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아냐, 아냐. 아냐! 그래, 내가, 내가 살릴 수 있어. 오필리아의 뼈만 있으면 방법이 있어.”

……그런 방법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저런 미친놈 같으니.

“어디 묻었는지 기억 안 나. 미워서 그냥 아무 데나 던져 버렸어. 너는 오필리아를 절대로 못 찾아.”

“아, 아……. 아냐. 그럴 리…….”

눈이 완전히 맛이 간 닉스는 몇 분 사이에 완전히 늙어 버린 몰골이었다. 닉스는 제 얼굴 가죽을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아냐, 그럴 리가. 분명히 살아 있어. 나는 알 수 있어. 오필리아, 오필리아가 죽었을 리 없잖아? 신이 그렇게 사랑하는데……. 뼈, 그래 뼈를 찾으면 다 해결돼! 뼈 어디 있지? 뼈만 있으면 되는데―.”

닉스는 자기 어떤 말을 뱉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급기야 돌바닥에 연신 이마를 찧어 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뚝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응? 응, 응. 그래. 그렇다고? 후후, 그렇구나! 그러면 되는구나?”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댄 닉스가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말라비틀어진 동태눈이 나를 향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움찔 어깨를 떨었다.

“아하, 그렇구나.”

닉스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감탄을 뱉었다.

“너. 아이사 맥포이. 널 죽이면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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