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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드 엔딩 후에-5화 (5/139)

5.

그러나 그 순간, 등 뒤로 우당탕 소리와 함께 다수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아악! 멈춰!”

“으, 으아아악”

“와악!”

우당탕탕! 쿵! 와작! 소리가 요란하게 복도를 울렸다.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뒤를 돌아봤다. 놀랍게도 광신도 무리는 죄다 뒤엉켜 있었다. 지들끼리 깔고 뭉개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투명한 벽에 가로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들은 괴상하게 찌부러진 채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느리게 상황이 파악되었다. 나는 결계 안에 들어온 듯했다.

투명한 결계가 나와 광신도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날 쫒아오던 광신도들이 모조리 걸러진 것이, 저런 조무래기들은 통과할 수 없는 복잡한 결계인 모양이었다.

오, 미친.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내가 25년 내내 운이 안 좋았던 건 오늘을 위해서인 듯했다.

“하, 하! 하하, 하하핫! 꼴좋다, 등신들아!”

절로 비웃음이 터졌다. 짜부라진 주제에 내게 손가락질하는 광신도들을 향해 나는 미친 사람처럼 비웃으며 조롱을 던졌다.

“하하, 하하하! 별 볼 일 없는 조무래기 같으니라고! 니들은 이걸 못 넘나 봐? 하핫, 하……!”

그러면서도 여태 긴장과 공포에 절은 몸을 일으키다 여러 번 헛발질을 해야 했다.

나는 걸리적거리기만 한 구두를 아예 벗어 던졌다. 마음 같아선 저 머저리들의 얼굴에 던져 주고 싶었지만 구두는 투명한 경계에 튕겨 나갔다.

그제야 저것들에게도 성력을 갈길 것을, 괜히 당황해서 도망부터 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자고 달려드는 놈들인데 나라고 죽이지 못할 이유가 없지, 흥.’

나는 한껏 비열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몸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광신도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나를 향해 온갖 욕설과 야유, 폭언, 저주의 말 따위를 쏟아 냈다.

욕도 아까운 놈들에게 더 이상 내 시간을 써 줄 이유가 없었다. 그것들을 전부 무시하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다리가 절뚝거렸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나만 결계를 통과한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만 이런 건 보통 깊숙한 곳에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탄타로스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 가야 했다.

웃음도 잠시, 길을 단단히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다고 다시 뒤를 돌 순 없었다. 내게 분노한 광신도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계속 앞으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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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얼마나 큰 거야? 어떻게 지하에 이런 데가…….”

나는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최대한 내 위치를 숨겨야 한다는 판단에 더 이상 뭔가를 부수지도 않았다.

결계를 기점으로 복도는 더 이상 복도가 아니었다. 들쭉날쭉한 비포장 암석 길이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암석 동굴에서 길을 잃은 기분으로 나는 하염없이 걸었다.

맨발로 그 불편한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와.”

나도 모르게 멍청한 감탄사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게 눈앞에 자연의 경이로움을 담은 비현실적인 공간이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기다란 석주들이 받치고 있는 천장은 매우 높았다. 빽빽한 석주들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처럼 보였다.

경이로운 크기의 자연물은 어쩐지 성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자연이 지은 거대한 신전 같은 느낌이랄까. 황도에 있는 대신전보다 거룩해 보여 절로 경건해졌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천장 어딘가로부터 뻗어져 나오는 빛줄기들을 따랐다. 사선으로 떨어지는 빛줄기들은 바닥까지 이어졌다. 그 빛줄기들은 공간의 가운데를 가리켰는데, 그곳엔 작은 연못 같은 게 있었다.

아까부터 주변이 지나치게 고요했다. 똑똑, 규칙적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와 내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나는 홀린 듯이 그 공간에 발을 디뎠다. 그러면서도 경계심을 놓지 못하고 휙휙, 연신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공간에 대한 놀라움도 잠시, 곧 나는 또다시 절망을 느껴야 했다.

길이 없었다. 이 공간은 막다른 길이었다. 이곳과 이어지는 통로라곤 내가 걸어온 길 하나였다.

“아, 안 돼.”

어쩐지 잘 나간다 했다. 나는 여전히 운이 나쁜 편이었다.

“있겠지, 있겠지. 닉스의 성인데. 분명 비밀 통로 같은 게……!”

나는 미친 사람처럼 공간을 이룬 벽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랬을까. 한동안 벽면에 들러붙어 이곳저곳을 두드려 본 나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길은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진짜 장난하냐!”

성질대로 소리를 버럭 지르자 현기증이 몰려왔다. 나의 분노는 맥 빠지는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었다.

나는 잠시 무릎을 꿇고 심호흡을 했다. 혈압을 다스리고 고개를 들자 다시 중앙의 연못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빛줄기가 가리키고 있는 그 연못 말이다.

‘빛이라……. 저 빛은 어디서 온 거지. 혹시 바깥인가? 오필리아의 성력이라면 천장이라고 못 뚫을 것도 없는데, 뚫어 봐?’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절뚝이는 다리를 끌고 연못에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지하수가 고여 물웅덩이가 된 것인지 그렇게 깊어 보이지도 않았다.

사실 굳이 빛줄기가 뻗어 나오는 천장 바로 아래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무릎 꿇은 자리에서도 충분히 천장을 부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나는 몹시 피곤했으며 하나하나 계산할 정신이 없었다. 뇌는 단순한 사고 과정을 거쳤고, 몸을 혹사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나는 참방참방 소리를 내며 물웅덩이 한가운데를 향해 나아갔다.

“죽인다. 죽이고 만다, 내가. 가만 안 둬. 하, 까짓것 살아 돌아가기만 하면 닉스한테 저주를 걸어 버리지 뭐. 불법이고 황달 드는 게 대수인가? 진짜로 죽여 버릴 거야.”

헛소리를 뱉으며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이는데.

물컹―.

맨발바닥으로 물컹함이 느껴졌다.

물컹?

오늘 정말 날이구나.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

사람은 너무 놀라면 순간 소리도 못 지르는 법이다.

“아, 아…….”

맙소사.

물속에―.

“아, 아아악!”

사람이 있어요.

첨벙!

혼비백산한 나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당연한 수순처럼 물에 빠졌다.

‘물에 빠져? 그럴 리가 없는데.’

얼핏 봤을 때 물웅덩이의 수위는 겨우 내 무릎에 차는 정도였다. 수심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빠졌다.

“……!”

나는 번쩍 눈을 떴다. 거짓말처럼 무한한 물속이 눈앞에 펼쳐졌다. 대차게 인상을 쓰고 반사적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물에 저항해 다급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어렴풋 물속의 풍경이 들어왔다. 내가 밟은 물컹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간이 내 눈앞에서, 물속에서 보란 듯이 둥실 떠 있는 광경이란―.

학습이 부족한지 또다시 기절할 듯이 놀라고 말았다. 바보같이 입을 벌렸다가 물을 먹었다. 몇 번 허우적거린 끝에 나는 아주 조금 침착함을 찾을 수 있었다.

‘젠장, 적어도 물귀신이나 시체는 아닌 것 같군.’

용기를 내 똑바로 마주한 인영은 혼비백산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나 멀쩡한 상태였다. 분명 같은 물속인데, 물에 푹 퍼진 나와 다르게 하나도 젖어 보이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꼭 방수 처리라도 한 것처럼 보송했다. 오히려 잘 땋은 머리가 죄다 풀린 내 쪽이 더 물귀신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봉인이구나.’

은발에 전체적으로 매우 하얀 성인 남성. 물속이라 자세히는 안 보여도 대충 그 정도는 파악이 되었다.

탄타로스 깊숙한 지하에 봉인된 은발 성인 남성. 그게 여러 명일 리는 없지 않은가.

“…….”

당신이, 노마구나.

노마 디아시구나.

나는 홀린 듯이 그 기다랗고 새하얀 인영에게 다가갔다. 노마 디아시를 찾아 도움을 받자는 계획은 아예 폐기했는데, 당신을 이렇게 찾게 될 줄이야.

그의 뺨을 살짝 건드려 봤다. 역시 보송했다. 마치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처럼 노마에겐 이 물도, 시간도 닿지 않는 듯했다. 그의 시간은 봉인된 후로 아주 멈춘 모양이다.

당신은 그럼 저주를 받은 그 순간에 계속 머물러 있는 건가?

그런 생각에 미치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빨리 그를 데리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까움, 연민, 동정, 뭐 이런 걸로 해 두자.

나는 망설임 없이 노마를 부여잡고 단숨에 수면 위로 올랐다.

“푸하!”

물속을 빠져나오자마자 수면은 다시 무릎 높이로 돌아왔다. 도대체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천장을 부숴 보겠다는 계획은 저 멀리로 날아갔다. 기대도 안 했던 노마를 발견했으니 그를 깨워 볼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이었다.

나는 노마의 양 겨드랑이에 두 팔을 끼워 넣고 질질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뭐야, 보기보다 되게 무겁잖아?”

막상 꺼내 놓고 보니 노마는 생각보다 매우 키가 컸으며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딱딱하기도 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노마는 현역 기사의 몸으로 봉인됐으니, 이 바위 같은 몸은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 건장한 수준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평균보다 아주 조금, 작은 키에 운동 부족인 20대 중반 여성이었다. 심지어 이런 최악의 몸 상태로 노마 같은 덩치를 가볍게 옮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 그냥 버릴걸!”

그렇게 성질을 내면서도 진심으로 그를 버리고 나갈 마음은 아니었다. ‘그를 건져 내서 깨워야 한다’는 생각이 이미 뇌를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가까스로 물웅덩이 한가운데를 벗어났다. 완전히 빠져나가진 못했고 가장자리 근처까지 오는 정도가 한계였다. 물가 쪽에 다다르자 수면이 발목 부근에서 찰랑거렸다.

아무렇게나 널브러뜨려 놓은 노마 옆에, 나는 마찬가지로 대충 드러누워 잠시간 거칠게 호흡했다. 손목과 발목은 구속구에 쓸리다 못해 파고들어 엉망이었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드레스는 정말이지 당장에 찢어 버리고 싶었다.

나는 대신 얼굴에 미역처럼 들러붙은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떼어 냈다. 안 그래도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칼은 물에 흠뻑 젖어 더욱 해초나 미역 따위 같았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그대로 기절할 것 같아서 억지로 힘을 주고 부릅떴다.

“이……. 큼, 큼, 음, 아, 아. 이봐요, 디아시 경. 디아시 경?”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어 일단 노마를 불러 봤는데 역시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래, 물에서 건진다고 저주가 풀리는 건 아니겠지. 하…….”

나는 피곤에 절은 몸을 반만 일으켜 노마의 머리맡까지 무릎으로 기어갔다. 그제야 제대로 본 노마 디아시는…….

“……콜록, 어우.”

너무 아름다워서 헛기침이 나올 정도였다. 나는 심각한 얼굴로 노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뭘, 건진 거지?”

노마는 모두의 취향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릴 외모의 소유자였다. 고작 잠자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파괴력이 어마어마했다.

‘내 취향이 이런 건가? 아니, 굳이 취향을 따질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나는 파괴적인 미모를 자랑하는 오필리아를 보고 자랐다. 스스로 미인에 대한 면역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얀 얼굴에 장밋빛 뺨이라니.

길게 뻗어 올라간 눈꼬리에 빽빽한 속눈썹이라니.

가지런하고 반듯한 아치형 눈썹이라니.

코는 또 왜 저래. 거기에 투명한 은발이라고?

자기가 공주야? 정말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도 되는 걸까?

나는 대단한 충격에 빠져 노마의 말도 안 되는 얼굴을 내려다봤다. 인상까지 쓴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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