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진짜 있다. 있어.’
나는 미친 듯한 기쁨과 절망을 함께 느꼈다.
“미친, 미친. 오필리아. 제길, 이게 무슨 짓이야. 이 미친 계집애가 진짜.”
오필리아는 정말 지독했다.
“진짜, 네 성력이……. 나를 살리고 있는 모양이구나.”
어쩐지 가슴이 울렁거려 길게 숨을 뱉었다.
그날 성벽에서 아치를 안고 통곡한 이후 나는 한 번도 운 적이 없다. 울 시간도 정신도 없었다. 이것은 내가 무척 자랑거리로 여기는 사실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전적이 무색하게 안구가 빠르게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눈을 꾹 감고 그것을 뒤로 넘겨 버렸다.
“하나도 고맙지 않구나, 오필리아.”
그러곤 눈을 부릅뜨고 중얼거렸다.
<오필리아와 밤>에서 나온 대로 그 애의 성력이 나를 살리고 있다. 그렇다면 <오필리아와 밤>은 더 이상 내 망상이 아닐 확률이 높았다.
이대로 있으면 나는, 아이사 맥포이는 데드 엔딩이란 소리였다. 시간이 없었다.
이 세계의 성력이란 제국이 믿는 유일신의 힘이었다. 신의 힘인 성력은 만능. 그러니 성력의 용도는 비단 치유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 힘은 어떻게 쓰냐에 따라 물리적으로도 발휘될 수 있었다.
성력의 흐름을 찾았다면 그 뒤는 쉬웠다. 필요한 만큼 힘을 떼어 내서 쓰고 싶은 곳으로 향하게 하면 됐다. 말로 하면 매우 간단하며, 실제로 응용에 재능만 있으면 숨 쉬는 일보다 간단하다.
나는 곧바로 손발의 구속구부터 해제하기로 했다. 구속구는 처음 성력을 써 보기에 가장 만만한 대상이었다.
‘최대한 소리 안 나게, 살살 하는 거야. 구속구만 깔끔하게 댕강.’
나는 열심히 계획을 되뇌며 몸속에 흐르는 경건한 흐름을 굴렸다. 기를 쓰는 만큼 이마에 땀이 삐질삐질 배어 나왔다.
곧 흐름이 삐뚤삐뚤하게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정말 되잖아?’
나는 속으로 환호했다.
‘그럼 이제 구속구만 댕―.’
그 순간 하얀 섬광이 감옥 안을 한차례 휩쓸었다. 번개가 치기 전 번뜩이는 빛이 세상을 비추듯이, 나를 중심으로.
일순 등골에 오싹함이 쭉 끼쳤다. 이변을 감지한 나는 반사적으로 번쩍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쾅―!
엄청난 소리와 함께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런, 씨―.”
나는 세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첫째, 성력은 별도의 조절 훈련과 안전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
둘째, 오필리아의 성력은 역사를 통틀어 가장 신에 가깝다는 것.
마지막으로, 나는 딱히 천재가 아니라는 것.
오필리아처럼 먼치킨 주인공이 아니고서야 첫 시도에 그런 엄청난 성력을 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초보자가 안전장치나 보호자도 없이 멋대로 강력한 성력을 썼다가는, 그것도 뭔가를 부수기 위해 사용했다가는 간혹 이렇게 건물을 날려 먹는 대형 사고가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그만 그 점을 간과하고 말았다.
이런, 젠장맞을. 구속구만 자르기는 개뿔. 본디 뭐든 섬세한 조절이 가장 어려운 법이거늘, 그 간단한 진리조차 잊다니 내가 많이 급하긴 했나 보구나.
나는 끔찍한 부유감을 느끼며 패착 요인을 되짚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미 한참 늦었다. 나를 중심으로 파문이 일듯 감방과 감방을 나누는 벽이 연달아 폭파되고 쇠창살이 저 멀리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아, 오필리아. 더럽게 세네.’
곧 천장은 아래를 향해 무너지고, 내가 쭈그리고 앉아 있던 바닥은 나와 함께 주저앉기 시작했다.
벽이 차례로 부서져 내리며 바깥을 지키던 간수 또는 광신도들이 보였다. 그들 역시 제멋대로 날아가고 있었다.
하나같이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당혹, 놀라움, 공포감이 어린 얼굴들은 마치 멸망을 목도한 사람과 같았다.
내 표정도 크게 다를 바 없을 거다. 이게 무슨 자폭이란 말인가.
나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날아가는 장면과 얼빵한 닉스 광신도들의 얼굴 따위가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나는 곧 심장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끼며 돌덩이들과 함께 빠르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갑작스러운 사고였기 때문에 떨어지는 와중에도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내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단 말이다. 누구보다 조용하고 빠르게 최대한 외벽으로 향해서, 외벽만 작게 뚫어 저것들을 따돌려 나갈 작정이었단 말이다.
그러나 야심 찬 계획과 달리 나는 입을 쩍 벌리고 추락하고 있을 뿐이었다.
바닥은 두 층 아래까지 뚫려 있었다. 곧 울퉁불퉁한 돌바닥이었다. 나는 하필 머리를 아래로 향한 채 추락하고 있었고, 이대로 저 돌바닥에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으아아악!”
그 사실을 깨닫자 절로 괴성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또 한 번 나를 중심으로 섬광이 일었고, 곧바로 쾅! 소리와 함께 내 주변 모든 것이 다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성력을 쓴 듯했다.
그때부터 나는 그냥 울며 겨자 먹기로 성력을 몸에 두른 채 추락했다.
“아아악!”
알 수 없는 기합 역시 본능이었다.
닉스의 광신도들 입장에선 폭탄이 계속 터지면서 수직 낙하하는 격이었을 것이다.
맹세코 이렇게 성대하게 도망갈 생각은 없었다. 최대한 감시자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살금살금 빠져나가려 했다. 바닥을 수직으로 뚫어 만든 지름길 따위를 이용할 생각이 없었다.
추락은 단 몇 초였지만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이쯤 되니 본래의 계획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당장 눈앞에 닥친 추락의 위기만 보였다. 추락사를 피하는 것에 급급했다.
또다시 돌바닥이 가까워졌다. 나는 여전히 성력을 두른 채 어서 저 돌바닥이 쪼개지길 바랐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점점 가까워지는 돌바닥은 무너질 기미가 안 보였다. 심지어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뭐야, 왜? 어째서 저건 왜 안 부서져?’
그 짧은 순간 수십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어, 어어억! 망할! 멈춰, 멈춰! 오, 오필리아!”
급한 대로 오필리아를 부르며 비명을 질렀다. 왜 오필리아를 불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아악!”
나는 단말마의 비명을 끝으로 충격적인 고통을 기대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
그러나 어떤 고통도 없었다. 나와 함께 떨어졌던 건물 잔해들이 바닥에 충돌해 쪼개져 가루가 날릴 때까지, 내 몸엔 어떤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간 정적이 흘렀고.
“죄, 죄수가 도망간다아아아!”
“마녀를 잡아라!”
“닉스 님을 모셔 와!”
몇 박자 늦게 머리 위에서 광신도들의 다급한 외침이 시작됐다.
“헉!”
나는 급하게 헛숨을 들이켜며 번쩍 눈을 떴다. 내 몸은 바닥에서 조금 떨어져 둥실 떠 있었다.
“뭐, 뭐야.”
멍청하게 중얼거리기 무섭게 내 몸을 받치고 있던 어떤 힘이 사라졌다.
“억―!”
나는 그대로 돌바닥에 가볍게 내동댕이쳐졌다. 꼬리뼈를 타고 짜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와아아! 죄수를 잡아라아아!”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머리 위에서 우레 같은 함성 소리가 들렸다. 마치 사냥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기사들의 함성과 같았다.
나는 치가 떨리는 얼굴로 위를 올려다봤다. 미치광이 신도들이 각 층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나를 향해.
그 꼴은 여러 의미로 장관이었다. 모 왕의 3천 궁녀 전설이 실제라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끔찍했다.
줄줄이 호기롭게 번지 점프를 하는 꼴에 나는 새롭게 혈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저 미친놈들!”
아찔함에 사지를 허우적거리다 구르듯이 몸을 일으켰다. 마음처럼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지만 일단 되는대로 뛰기 시작했다. 벽이 없는 곳이 길이요, 나는 무조건 가장 외벽을 향했다.
“다 죽여 버릴 거야……!”
불특정 다수에게 살인 예고를 던지며 미친 듯이 뛰었다. 이렇게 뛰어 본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는 맥포이 가주다. 맥포이 가주는 현재 제국 최고의 부자였다. 내가 뼈를 깎아 재건한 맥포이는 더 이상 무예의 명가가 아니라 부의 명가였다. 무역이 움트기 시작한 시대의 흐름을 잘 반영한 결과였다.
‘뛰는 건 고사하고 최근엔 걸을 필요도 없었다고.’
부유한 귀부인은 딱히 다리 근육을 쓸 일이 없었다. 안 그래도 엉성한 뜀박질은 거치적거리는 드레스에 제대로 끊지 못한 구속구까지 더해져 더욱 엉성했다.
심지어 구속구는 구속구와 벽을 연결하던 사슬째로 딸려 온 탓에 뛸 때마다 짤랑짤랑 소리가 났다.
나는 오필리아의 전지전능함을 믿고 성력을 아무렇게나 방출했다. 최단 거리로 도망치기 위해 무조건 직선으로 달리며, 가로막는 모든 벽을 부수어 앞으로 나아갔다. 나의 저질스러운 신체 능력을 고려한 전략이었다.
“뭐, 뭐야?”
그러나 지금 내가 내달리고 있는 이 돌바닥처럼 좀처럼 부서지지 않는 벽이 존재했다.
탄타로스를 이루는 모든 것들엔 닉스의 힘이 깃들어 있었다. 보통 성력으론 이 건물을 부술 수 없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작중 최강인 오필리아의 성력을 쓰고 있지 않나? 부술 수 없는 게 없을 텐데?
이것보다 더 강하게 쓸 수 있는 건가? 그렇다면 어떻게?
……설마 나는 오필리아의 성력을 전부 쓸 수 없나? 하긴 이 몸뚱이가 오필리아의 것이 아니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외벽을 뚫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젠자아앙!”
나는 욕지기를 비명처럼 내지르며 부술 수 있는 벽을 골라 뛰었다. 덕분에 방향 감각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잠시 머뭇거린 사이에 광신도들의 함성이 가까워졌다.
“악마다! 마녀다! 마녀를 잡아!”
“닉스 님! 닉스 님! 닉스 님께 저 마녀를 끌고 가자!”
‘닉스 이 쳐 죽여도 모자랄 새끼!’
광신도들의 우레 같은 고함, 발소리.
쩔렁쩔렁 규칙적인 사슬 소리.
한계에 다다른 호흡.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고함 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힐끗, 뒤를 돌아보면 이제 광신도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제길, 제길, 제길. 어디가 외벽이야. 대체 어디야!’
초조함이 극에 달해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실제로 시야가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다시 등 뒤를 힐끔 돌아봤을 땐 광신도 무리가 더 가까워져 있었다.
좁아 들다 못해 길쭉해진 동공, 황달기, 검은 안색. 달리면서 봐도 저주를 부린 부작용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만큼 그것들은 나와 가까웠다. 당연히 질겁할 수밖에 없었다.
“으아악, 저리 꺼져!”
나는 그 끔찍한 몰골들이 코앞에 다가온 꼴을 보고 비명처럼 욕지기를 뱉었다.
그리고 가장 선두로 달리던 광신도의 손끝이 출렁거리는 나의 드레스 자락을 아슬아슬하게 잡았다 놓친 순간―.
“아!”
균형을 잃으며 대차게 앞으로 미끄러졌다.
‘망할……. 결국 죽나 봐. 뭘 해도 나는, 죽나 봐.’
나는 미칠 듯한 절망감을 느끼며 온몸으로 울퉁불퉁한 돌바닥을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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