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러나 아무리 주위를 돌아봐도 빠져나갈 구석이 안 보였다. 철창은 촘촘했고 모든 벽은 틈 하나 없이 견고했다.
납치당하고 다시 눈을 뜨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딱히 감이 안 잡혔다. 바깥을 지키는 간수가 몇 명 있는지 역시 알 수 없었다.
그렇다. 나는 한때 무예로 이름을 떨친 맥포이 가문의 주인이지만 그건 다 옛말에 불과했다. 실제로 내겐 무예에 재능이 없었다. 그런 건 죽은 내 오빠 아이노, 내 언니 시프에게나 조금 있었다.
동물적인 감각은 조금도 타고나지 못했으며 검기나 성력은 더더욱 찾아보기 어려웠다. 기척을 읽기는 무슨, 발걸음 소리로 수를 파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다시 말해 나는 매우 고귀한 신분에 가문을 재건한 역사적인 인물이었지만, 이쪽으론 아주 무능력하다는 거다.
물론 검기나 성력을 가진 사람이 흔한 것은 아니었다. 검기와 성력을 타고난 사람은 손에 꼽으며 그 안에서도 능력은 천차만별이었다. 자연히 두 가지 모두 타고난 사람은 더더욱 찾기 어려웠다.
내가 잘하는 것은 셈과 암기, 빠른 상황 파악과 추진력, 뭐 이런 것들이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은 내 의외의 재능을 신기하게 여겼을 뿐 귀하게 여기진 않았다. 이것들은 제국에서 장사치나 말단 관리들에게나 필요한 덕목이었기 때문이다.
맥포이, 나아가 대귀족은 아직도 물건을 사고파는 일을 미천한 것으로 여겼다. 귀족이 일을, 그것도 장사를 한다? 끔찍하게 저급한 일로 알았다.
최근 조금씩 무역이 활발해지며 그런 인식도 서서히 나아지고 있긴 했지만……. 아무튼 당장 내 능력으론 이 감옥에서 빠져나갈 수 없어 보였다.
나는 억지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쇳덩어리로 만들어진 구속구가 발목, 손목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곧이어 숨을 죽이고 복도 쪽을 재빠르게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듣지 못한 모양이다. 사방이 조용했다.
발목과 손목에 채워진 구속구를 보니 성물은 아닌 듯했다. 닉스 놈이 내가 검기나 성력이 없는 무능력자란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와중에 치렁치렁한 드레스 차림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건국제 중에 황제 앞에서 보란 듯이 대귀족을, 맥포이 가주를 납치하다니.’
모르는 사람들에겐 닉스 새끼가 제국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닉스에게 황제나 제국은 따분한 상대일 뿐이다. 그 미친 자는 오직 오필리아에게만 관심이 있다.
쪽팔릴 정도로 대대적인 이 납치극은 닉스가 순수하게 오필리아 보라고 벌인 짓거리였다. 나 네가 건 봉인 풀렸다, 네 의자매는 내가 납치한다, 날 찾아와라! 뭐 이런 메시지라고 볼 수 있었다.
납치당하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리자 다시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주먹에 불끈 힘이 절로 들어갔다.
‘미친놈, 내가 여기 꼭 빠져나가고 만다. 멍멍이 같은 새끼.’
나는 다시 의욕을 가지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간수를 끌어들여 볼까?’
곧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내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면 당장 손가락 하나를 잘라 가려 들 거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닉스를 신이라고 여기는 추종자들은 사이비 광신도와 같았다.
닉스는 본래 대신전의 고위 신관으로,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선 성력이 강해야 했다. 그는 몇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엄청난 성력을 타고난 사람이었으며 그 덕에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종교인이었다.
그를 따르는 신자도 수두룩했다. 아마 얌전히만 있었으면 자연스럽게 대신관이 됐을 것이다.
대신전 깊숙한 곳에 봉인되어 있던, 삿된 힘을 봉인한 고서에 손만 안 댔다면.
‘그 새끼가 지금 대신관일지도 모르지.’
그의 추종자들에게 닉스는 절대적인 아버지 같은 존재이며, 닉스의 성이자 감옥인 ‘탄타로스’에 갇힌 자들은 곧 추악한 악마였다.
정작 신을 배신해 모든 성력을 잃고 그 대신 삿된 힘을 쓰고 있는 새끼는 닉스지만 그들의 믿음에 따르면 그렇다. 대화를 통한 협상은커녕 인사조차 먹히지 않을 확률이 농후했다.
혹시라도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날까 무서워 옴짝달싹도 못 한 채 연신 입술만 짓씹어 댔다.
<오필리아와 밤>에는 그런 서술이 있었다.
탄타로스는 그 자체로 난공불락의 요새로 마음대로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어렵다. 지금껏 탄타로스의 죄수 중에 살아서 나간 사람은 없었다.
대충 이런 느낌의 서술이었다.
지금 내가 갇혀 있는 이 거지 같은 감옥이 바로 그 탄타로스일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내가 갇힌 곳은 지하는 아니고 가장 위층, 나름 귀빈을 위한 감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요새와 같은 감옥은 벽돌 한 땀 한 땀 닉스 새끼의 힘으로 견고하게 다져졌기 때문에 검기나 성력이 없는 일반인이 자력으로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젠장.’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의욕이 또다시 팍 꺾였다. 내 고개도 함께 힘없이 앞으로 떨어졌다.
나는 잠시간 죽은 사람 같이 침묵했다. 그러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 뒤의 내용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잠깐. 있잖아, 살아 나간 사람.’
순간 있잖아! 하고 육성으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미친……! 있다고, 있어.”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힌 나는 입술만 달싹여 중얼거렸다.
탄타로스에서 숨이 붙은 채 나간 사람은 없다. 그러나 곧, 처음으로 살아 나가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10년 하고도 몇 년째 이곳에 갇혀 있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이곳을 살아서 나갈 것이다.
나를 구하러 탄타로스에 쳐들어온 오필리아가 우연히 발견하는 사람. 디아시가 오래전 잃어버린 후계자.
‘남자 주인공의 형, 노마 디아시.’
<오필리아와 밤>에서 아이사 맥포이는 죽어서 탄타로스를 나가지만, 노마 디아시는 살아서 나간다.
나는 희망을 품은 채 다시 맹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고 고민할 시간은 별로 없다. 당장 닉스가 돌아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가만히 여기 앉아 운을 시험하든가 <오필리아와 밤>을 믿고 움직이든가 둘 중 하나다.
사실 양쪽 다 도박이긴 했다. 그리고 나는 독보적으로 운이 나쁜 편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 기억을 믿자.
움직이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단 뭐라도 해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 세계가 <오필리아와 밤>이 맞다는 가정하에 움직이자. 소설 속 정보를 모조리 이용해 보자.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뒤엉킨 기억을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쓸 만한 정보를 찾아야 했다.
먼저 노마 디아시. 잠시만 생각해 봐도 그는 쓸모가 아주 많았다.
일단 노마는 검기와 성력을 모두 타고났다. 남자 주인공의 형답게 이 세계의 균형을 가뿐히 파괴하는 인물이었다.
<오필리아와 밤>에서 노마는 남주와 마찬가지로 손에 꼽는 능력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물론 작중 최강자로 나오는 오필리아보다는 못하지만.
당시 새로운 성기사단장이 될 예정이었던 노마는 탄타로스에 잡혀 들어왔다고 보긴 어려웠다. 모종의 사건에 의해 자포자기해서 스스로 사로잡히길 택한 것에 가까웠다.
피할 수 있었음에도 노마는 기꺼이 삿된 저주를 받아 10년 조금 넘게 탄타로스 가장 밑바닥에 잠들어 있다. 그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 나오는 공주 포지션이라고 볼 수 있겠다.
디아시 가문은 사라진 후계자의 행방을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찾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닉스가 숨긴 탄타로스는 아무도 찾을 수 없으니까.
나는 혼자서 이 탄타로스를 못 나간다. 그러나 노마는 가능할 것이다.
노마의 힘은 닉스보다 강하거나 그와 비등할 테니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노마가 스스로 잡혔다는 허세 가득한 묘사는 불필요했다.
무엇보다 곧 성기사단장이 될 예정이었던 인물이 아닌가? 노마가, 나는 노마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노마를 어떻게 찾아가지? 저주에 걸려 잠들어 있을 노마를 어떻게 깨우지?
나는 힐끔 손목을 내려다봤다.
“젠장…….”
구속구도 못 풀고 있는 주제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냥 손가락을 포기하고 간수에게 지하 감옥으로 옮겨 달라고 말이라도 해 볼까?
“…….”
그러나 어떻게 재주 좋게 노마를 찾았다 쳐도 그에게 걸린 저주가 또 문제였다. 일단 저주는 그 저주를 건 사람이거나 그보다 강한 힘을 가진 이가 아니고서야 풀 수 없었다.
이 경우 이야기가 조금 복잡했다. 노마가 긴 잠에 빠진 건 그를 질투한 어느 엑스트라의 저주 때문이고, 그를 지하 감옥에 봉인한 건 닉스가 사용한 저주였다. 노마도 참 다사다난한 남자였다.
그러니 그의 저주를 풀려면 엑스트라보다, 닉스보다 성력이든 뭐든 강해야 했다. 설정상 노마를 깨우는 건 작중 최강자로 뽑히는 노마 본인 또는 남주, 혹은 성력을 되찾은 오필리아가 등판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성력이 0에 수렴하는 내가 노마를 깨울 수 있을 리 만무하……. 잠시만.
잠시만, 성력을 되찾은 오필리아? 오필리아의 성력?
나는 천천히 양손을 들어 손바닥을 펼쳤다.
“…….”
정말 내가 오필리아의 성력으로 살아 있는 거라면……. 내 존재 자체가 오필리아 성력 아닌가?
……그럼 나 성력 쓸 수 있나?
손금을 보는 사람처럼 양 손바닥을 잠시간 심각하게 내려다봤다.
쿵쿵쿵―.
심장의 두근거림이 점차 빨라졌다. 혈류가 뜨겁게 달궈지는 기분이 들었다.
만약 내가 오필리아처럼 성력을 쓰는 게 가능하다면 지금 당장 혼자 빠져나갈 수도 있잖아? 노마고 뭐고 필요 없는데? 당장 이 손으로 닉스도 죽여 버릴 수도 있겠는데?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나는 어린 시절 내내 아이노와 시프, 그리고 오필리아를 꽤 많이 동경했다. 그도 그럴 게 나 빼고 죄다 조금이라도 성력 또는 검기가 있었으니 부러워할 수밖에.
심지어 한 명은 전설적인 성력을 가져 모두의 관심을 독차지했으니, 나는 그 세 사람을 퍽 부러워했다. 조금 창피한 이야기이지만 성력도 없는 주제에 남몰래 혼자 책을 보고 연습 아닌 연습을 했던 적도 있었다. ……꽤, 자주.
그러다 보면 없던 성력이 혹시나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시 말하자면, 나는 암기에 능하다. 십수 년 전에 몇 번이고 읽었던 책 내용쯤이야 대강 기억난다. 성력을 다루는 기본적인 이론 따위가 말이다.
‘쓸데없는 뻘짓이라고 생각했던 내 부끄러운 과거가 도움이 되는 날이 오다니.’
쿵쿵쿵―.
긴장감과 기대, 그리고 묘한 불안감으로 아까부터 심장과 머리 부근이 터질 것 같았다.
‘해 봐.’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며 날 부추겼다.
‘해 봐, 살아야지. 아치는 열한 살이라고.’
주저할 시간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시도해 봐야 했다.
떨리는 눈꺼풀을 감았다. 집중하자. 처음엔 혈류를 따라가는 느낌으로. 분명히, 뭔가 흐르고 있을 거야. 흐름을 찾아야 해.
오필리아의 성력. 오필리아의 성력이 어떤 느낌인지 생각해 내. 나는 그 애 가장 가까이 있었잖아. 찾을 수 있어.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나는 기를 쓰고 오필리아를 떠올렸다.
‘오필리아, 오필리아.’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오필리아를 불러 댔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등에 땀이 줄줄 흘렀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알 수 있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설명할 길이 없는, 어떤 느낌. 또는 직감 따위가 내장 깊숙한 곳에 스쳤다.
“아이사.”
그것은 마치 오필리아가 나를 부를 때와 비슷한 느낌. 내 부름에 그 애가 대답할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딱 그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오필리아의 성력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 애 자체였다.
온화하며, 밝고, 사랑스럽다.
전부 나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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