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때는 건국제.
나는 황제의 부름으로 아주 오랜만에 영지를 벗어나 황도로 향했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에 무거운 보석을 주렁주렁 걸치고 땡볕에 앉아 지루한 연설을 듣고 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나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축제를 현장을 노려봤다.
“안녕, 아이사. 진짜 살아 있었네. 어떻게 살았어?”
질문을 한 주제에 대답은 들을 생각이 없는지, 방글방글 웃는 낯을 한 놈은 곧바로 내게 둔기를 휘둘렀다.
둔기가 내 옆통수를 강타했다. 고통은 굵은 대신 짧았다. 눈앞이 하얀 섬광으로 번뜩이고 빨갛게 달아올랐다가 마침내 검게 점멸했다.
‘이런 미친, 저 새끼가 또…….’
치솟는 혈압과 다르게 멀어져 가는 감각을 느끼며 나는 불가항력으로 그날을 떠올렸다. 운이 좀 나쁜 편에 불과했던 내 인생이, 거꾸로 봐도 기구하게 흘러가기 시작한 ‘그날’을 말이다.
부러 찾지 않았던 10년도 더 된 기억은 한번 떠올리기 시작하자마자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내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주마등이란 게 바로 이런 건가. 10년을 그날에서 도망쳤는데, 우습기도 하지.
빠르게 넘어가던 기억이 어느 한 부분에서 멈췄다.
“아이사.”
선명한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아름다운 소녀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날 돌아봤다.
‘오필리아.’
나는 오랜만에 마주한 오필리아를 보고 반사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원망인지 그리움인지 증오인지 애정인지가 마구 뒤섞여 나조차 내 감정을 정의할 수 없었다.
내 옛 의자매. 아름답고 총명한 말괄량이, 오필리아.
오필리아에겐 엄청난 변태 스토커가 있었다.
아니, 있다.
닉스. 오필리아를 징그러운 눈으로 좇던 그 사이코 범죄자 새끼는 급기야 그녀의 모든 걸 망가뜨리는 방식으로 달려들었다. 사실 망가뜨리다, 괴롭히다라는 표현은 다분히 순화된 것이었다.
그의 집착은 자길 봐 달라는 목적도 아니었다. 그저 언제나 맑게 빛나는 오필리아가 진창에 떨어져 차라리 죽여 달라 비는 걸 보고 싶어 하는, 지극히 변태적인 욕망일 뿐.
그건 추잡한 질투와 끝없는 동경에 가까웠던 것 같기도 하다.
불행히도 오필리아는 다정하고 사랑이 많은 아이였기 때문에 범죄 대상이 될 것은 너무나도 많았다.
닉스가 망가뜨린 것엔 당연히 오필리아의 가족 비슷한 나와 나의 가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필연적으로 오필리아가 잃은 것들은, 대부분 내게 소중한 것이기도 했다.
* * *
harbaragi_syk
벌써 10년도 전인 그날, 내가 아직 열다섯 살이었을 때.
나의 가문 맥포이는 닉스의 손에 한순간 박살 났다. 그 난장에서 살아남은 자는 나와 젖도 못 뗀 어린 조카, 아치뿐이었다.
오필리아가 측은지심으로 거두었던 닉스는 전설로만 남은 삿된 힘을 쓰는 자였다.
그날, 맥포이 성과 그 영지에 동시다발적으로 솟아난 검은 손들은 그 땅 위에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의 몸체를 뚫고 지나갔다. 누구 하나 그 손을 피할 수 없었다.
듣도 보도 못한 사악한 힘이었다. 끈적하고 질척거리는 그 손들은 미처 방어할 새도 주지 않았다. 정신이 멀어지는 와중에 오필리아의 비명 소리가 들렸고, 나는 오필리아를 원망했다.
‘너만 없었으면.’
오필리아가 맥포이가에 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나의 자상한 할머니, 엄하지만 존경스러웠던 부모님, 가문을 이었을 든든한 오빠, 아름답고 품위 있던 새언니, 곧 새 신부가 된다며 기뻐하던 언니. 그리고 맥포이 영지에 사는 수천의 사람들.
모두 죽지 않았을 텐데.
이러한 가정을 하자 오필리아가 끔찍하게 여겨졌다. 그 애의 친절, 아니 오지랖이 모든 불행의 시작임이 분명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은 나는 원망할 게 필요했다. 그래서 오필리아, 나와 함께 자란 그 오지랖 넓고 명랑한 기집애를 맹렬하게 증오하기로 했다.
남겨졌으니 살려면 증오라도 품어야 했다.
무섭기도 했다. 그 애가 계속 옆에 있으면 내게 달랑 하나 남은 가족인 아치까지 언제 잃을지 몰랐다.
그래서 나는 오필리아를 버리기로 했다. 그 애를 영영 맥포이 땅에서 내쫓기로 했다.
무려 일곱 살 때부터 의자매라고 허울 좋게 묶여 있었지만, 애초에 오필리아는 진짜 맥포이 사람도 아니었다. 고아였던 그 애를 어느 날 갑자기 가문에 들인 것은 아버지였다.
오필리아의 잘못은, 그래. 엄밀히 그 애의 잘못은 아니다. 모든 건 오필리아에게 괴이할 정도로 집착한 범죄자 ‘닉스’의 탓이지.
그 멍청하게 생긴 놈. 매가리 없게 생긴 놈. 어설픈 척, 얼빠진 척하는 것이 어쩐지 싸하다 했다.
오필리아는 명백한 피해자다. 그럼에도 나는 그 애가 끔찍하게 여겨져 더 이상 볼 자신이 없었다.
그날 오필리아는 일말의 양심은 남았는지 내가 쫓아내기 전에 제 발로 성을 떠났다.
실은 떠난 것인지 죽은 것인지는 나도 잘 알지 못했다. 자지러지는 아치의 울음소리에 겨우 눈을 떴을 땐 오필리아도, 범죄자 닉스도 이미 없었으니까.
다만 그 변태 사이코가 자신의 집착 대상인 오필리아를 죽이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필리아가 그 망할 놈을 죽이고 떠난 거라면 모를까.
나는 그 애가 없어진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주치면 살의를 느꼈으리라. 그뿐일까. 이 손으로 그 애를 해쳤으리라.
내가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정신을 잃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전부 끝나 있었다.
폐허가 된 성 안에는 나와 조금 옆에 떨어진 곳에서 울고 있는 아치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정신없이 기어가 아치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 다른 생존자를 찾아보려 했던 것 같다.
한참 성을 헤매던 나는 아치를 안고 성벽에 올랐고, 그곳에서 검푸른 새벽 속에 맥포이 영지 여기저기가 불타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 같다.
그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넓디넓은 맥포이 영지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이라곤 나와 아치뿐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열다섯 소녀와 갓난아기만 남은 나의 맥포이는 어떤 가문이었나.
서부를 대표하는 귀족, 맥포이는 전설적인 기사를 많이 배출한 역사가 있으며 그 영광 덕에 기사단이 유명했다. 역사적으론 황실 기사단장을 가장 많이 역임하기도 했다. 또한 맥포이 가문에만 내려오는 검법이 있으며 이는 제국 검법의 기본 중 하나이다.
제국은 30년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채 되지 않아 기사 출신인 귀족들의 입김이 센 편이었다.
무예 하면 당연히 맥포이였기 때문에 검기를 다룰 수 있었던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당시 공을 세우고 돌아왔다. 그 덕에 맥포이는 서부는 물론 중앙에서도 힘깨나 쓰는 가문으로 간만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뿐만 아니라 맥포이는 영지 자체에도 축복이 깃들어 있었다. 온화한 기후와 비옥한 토지를 가져 다른 사업에 목매는 일 없이, 그 자체로 영지와 영지민들이 부유했다.
사람들은 큰 걱정이 없었고 아이들이 많았다. 매일 아침 젊고 유능한 기사들이 맥포이의 기사가 되기 위해 문을 두드렸다.
넓은 곡창이 황금빛으로 출렁이고 강과 바다가 주변을 완만하게 감싸고 있는 평화로운 곳. 맥포이는, 그런 가문이었다. 나는 그런 맥포이를 사랑했다.
내가 멍하니 그 자리에 가만 서 있자 아치가 내 목덜미에 눈물 콧물을 쏟으며 숨넘어갈 것처럼 울어 댔던 것 같다. 나는 기계적으로 아기의 등을 살포시 두드리며 달랬다.
배가 고파서, 혹은 유모나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울어 댔을 테지만 당시에 나는 아치가 왜 우는지 어떻게 해 줘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아치를 품에 안고 함께 엉엉 울었던 것 같다.
아아―, 너 때문이야. 오지랖 넓은 기지배, 오필리아. 내가, 닉슨가 낙슨가 뭔가 하는 놈, 미친놈 같다고 도와주지 말쟀잖아. 내가, 이상한 새끼 같다고 성에 들이지 말쟀잖아.
“흐으, 너 때문이야. 맥포이가 이렇게 된 건 다…….”
나와 아치가 목 놓아 울고 있을 때,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어둠이 내렸던 성채와 영지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딜 봐도 찢겨 나간 맥포이 사람투성이였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다, 너 때문이야. 이 마녀 같은 기지배. 오필리아 너도, 닉스 새끼도 다 용서 못 해. 죽여 버릴 거야.’
이보다 악몽일 순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리고 다시 촤라락―.
기억이 빠르게 기억을 지나쳐 갔다. 더 예전, 아주 먼 옛날의 기억을 찾듯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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맴맴―.
매미 우는 소리 사이로 수다스러운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렸다. 따분할 만큼 평화롭고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그때 내 앞에 앉아 있던 여자애가 홱 뒤를 돌아보더니, 내게 말했다.
“야. 6권 다 읽었어?”
“아―.”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가방을 뒤졌다.
“잠시만.”
뒤지고 말고 할 필요 없이 하드커버로 감싸진 두꺼운 종이책이 바로 손에 잡혔다.
“자.”
나는 친구에게 <오필리아와 밤> 6권을 넘겼다. <오필리아와 밤>은 최근 반 애들 모두가 열심히 돌려 보고 있는 중인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었다.
“오, 혹시나 했는데 진짜 벌써 다 읽었네? 역시 빠르다니까. 흐응, 근데 로맨스 판타지는 별로라더니. 요거, 요거. 너도 드디어 로맨스에 눈을 떴구나!”
“……이건 로맨스가 적잖아. 그냥 좀 피폐한 판타지물 같아서 본 거거든.”
책을 받아 든 친구가 능글맞은 투로 말했다. 로맨스와 거리가 먼 것으로 유명했던 나는 어딘가 머쓱해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아오, 떨려. 해피 엔딩이지? 이건 좀 피폐해서 걱정돼.”
그러거나 말거나 친구는 책을 바라보며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6권은 마지막 권이었다. 친구는 결말이 궁금한 모양이다.
“…….”
나는 6권의 내용을 찬찬히 복기했다. 음……, 그걸 해피 엔딩이라고 할 수 있나?
내가 이맛살을 찌푸리자 친구가 빠르게 죽을상을 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뭐야? 새드냐? 설마, 설마 누구 죽어? 미친 거 아니야?! 이 작가를 그냥!”
“말해도 괜찮아?”
“아, 그냥 말해 봐. 난 누구 죽고 그런 거 싫단 말이야. 내가 왜 로판을 보는데.”
“……아이사. 아이사가, 죽어.”
나는 말을 뱉고 어쩐지 씁쓸함을 느꼈다. 살아남은 사람끼리야 해피 엔딩이라고 볼 수 있지만, ‘아이사 맥포이’에겐 아니었다.
아이사의 죽음은 소설을 절정으로, 모든 캐릭터들을 화해와 용서로 이끄는 장치였다. 그녀의 죽음은 여주인공 오필리아를 각성으로 이끌고, 오필리아가 맥포이 가문으로 돌아오는 계기가 된다.
범죄자 닉스가 아이사를 납치해 살해하는 것이 바로 이 6권의 시작이며, 그대로 결말을 향해 숨 가쁘게 이야기가 진행된다.
“아, 뭐야. 아이사가 죽어? 깜짝 놀랐네. 그럼 상관없어.”
친구가 화색을 띠며 말했다. 크게 안심한 표정을 본 나는 심장이 아주 조금,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아이사가 내 최애였던가?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일단 주인공들만 살면 해피 엔딩이지. 난 일단 여주랑 남주만 살면 돼. 아이사는 뭐, 데드 플래그도 많았고……. 일단 죽어야 이래저래 해결될 일들이 많긴 했지. 뭔가 죽을 것 같았어.”
친구의 말투는 가볍기 그지없었다.
“……아이사가 악역은 아니잖아.”
“악역은 아니지만……. 오필리아가 자기 성력까지 잃어 가면서 겨우 살려 놨더니, 원수로 알고 10년 동안 도망자로 만들잖아. 그것 때문에 오필리아가 좀 고생하냐? 오필리아 팬은 아이사를 악역이나 민폐라고 생각할걸? 그리고 뭔가 죽이기 좋은 캐릭터야. 극적이기도 하고.”
악역이라니, 민폐라니. 죽이기 좋은 캐릭터라니! 죽어도 괜찮은 게 어디 있어? 순간 울컥 감정이 솟구쳤다.
“야! 오필리아도 음침하거든? 말을 하던가, 말도 없이 구해 주고 말도 없이 그렇게 사라지면 아이사가 무슨 생각이 들겠냐? 당연히 짜증나지.”
그래서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했다. 반 친구들의 시선이 모이는 게 뒤늦게 느껴져서, 마지막엔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오필리아도 피해자거든? 가문의 복수는 닉스, 그 사이코한테만 해야지! 왜 오필리아까지 싸잡아서 죄인 취급을 하냐 이거야!”
“잘못이 없진 않지! 신원 불명인 사람을 멋대로 본성에 들였으니까! 자기 성도 아니면서! 굳이 따지자면 엄연히 맥포이가 아니거든, 오필리아는!”
“……뭐야, 왜 이래. 누가 보면 네가 아이산 줄 알겠어. 알았어, 알았다!”
친구가 다소 놀란 얼굴을 하고 말했다. 나는 어쩐지 심장이 벌렁벌렁거려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여간 너도 별나다. 보통 주인공한테 이입하지 조연한테, 심지어 죽는 캐릭터에 이입하진 않지. 정신 건강에 안 좋잖아.”
“…….”
나도 모른다. 난들 죽을 줄 알고 아이사를 좋아했겠나?
아이사는 등장이 많은 주요 인물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면 서술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아이사는 주인공이 아니니까.
사실 아이사가 내 최애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보다 보면 어쩐지 아이사에게 이입하게 됐다. 불쌍……하기보단, 뭔가……. 이상하게 아이사한테 저절로 이입이 된다고 해야 할까.
“죽는 캐릭터는 잡는 게 아니야.”
친구의 마지막 말이 어쩐지 메아리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친구도, 친구와 함께 떠들던 공간도 점점 멀어졌다.
마침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홀로 부유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 이 기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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